<12월 2일 시범라운딩을 마치고>
삶에는 꺼리가 있어야만 맛을 느낄 수 있다. 본디 그렇게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고 믿어왔고, 구태여 어떤 짓을 만들지 않아도 모두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결국은 인생이 세 끼 밥 먹고 똥싸기일 따름이다. 대부분 일상이 그렇다. 거기에 뭔가 하나를 얹기 위해서는 꺼리를 지어야 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진다.
반복되는 것이 왜 의미가 없겠는가.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인데 말이다. 주기의 크기만 조절하면 세상만사를 그 순환의 고리로 엮을 수 있다. 이것이 질서일 수 있고, 영속의 근본적인 까닭일지도 모른다. 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놈의 감정이란 게 늘상 그런 것은 늘 그런 것으로 여겨 도무지 그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병원에 가봐야 일상의 모습이 귀한 줄을 알 듯이, 관성에 젖은 것은 아무렇게나 여겨진다. 어떤 계기를 만나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일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머무르는 데에는 새롭게 해석할 것이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쌓이는 것도 있고, 변화나 발전이 생기면서 조화가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 변화와 조화에서 무언가의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건강한 놈이 운동선수가 되어 뛰어야 볼 맛이 생긴다. 제 몸 추스르기에도 버거운 놈에게 짐을 얹히기는 힘들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아직까지 유효하다. 일상에서 다소의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꺼리를 짓지 않겠는가.
겨울의 소풍은 일상의 격을 깨게 하는 데 더없이 충분하다. 소풍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의 설렘을 그대로 지닌 채 오십이 넘은 놈의 가슴을 일렁이게 만든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봄바람에 실리는 벚꽃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기도 하고, 그저 안에서 솟구치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내뱉는 왁자지껄한 소리들, 단무지와 멸치볶음, 엿장수의 가위소리 등등이 떠오른다. 몇 시간이 지나 다음 일을 볼 때서야 남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건망증이 심해지는 나이에 말이다.
어딘가 잠시 다녀오는 일이 왜 이렇게 지금까지 생명을 가지고 설레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말 단순한 행사에 지나지 않는데, 이 날이 잡히기만 하면 몇 밤을 설치게 된다. 눈을 멀뚱하게 뜬 채 오만 생각이 오가고, 그렇다고 대단한 어떤 계획을 짜는 것도 아닌데 가슴속에서는 뛰쳐나오려는 힘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꿈틀거린다. 철없던 때의 데이트 약속이 그렇고, 애타게 찾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개나 소나 제게 좋은 것을 제일 좋아한다. 사람인들 뭐 다르려고. 어쩌면 제 좋은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삶인 줄도 모른다. 이미 어떤 사명감을 가지기에는 사치스럽고, 의무감이 너무 버거워 찾을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일까.
의무감은 소수의 사람에게 해당된다. 일정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밖에는 제 좋은 것을 탐한다. 권력을 바라는 자 그 힘을 좇고, 맛을 탐하기도 하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명예를 드높이고자 하는 자 자신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종을 흔든다. 아름다운 여성의 향기와 맵시는 풀리지 않는, 아니 풀 필요도 없는 불랙홀이다.
가슴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제 좋은 것을 애타게 그려야 움직인다. 그럴 듯한 군더더기를 붙여 그럴싸한 명분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 좋아야 힘이 나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운신하기 조차 버거운 비개덩어리의 바다코끼리가 교미를 하기 위해 끙끙대는 모습은 참으로 처절하다. 하지만 그 놈의 일만 아니다.
추운 겨울에 소풍에 나서고자 설레는 놈과 뭐가 다르랴. 화사한 봄바람에 벚꽃이 휘날리는 것도 아니고, 영롱한 단풍잎이 세상을 수놓은 날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렬하는 햇빛 아래 파도가 일렁이는 백사장도 없다. 세상 만물이 숨을 죽이고 안으로만 파고드는 계절에, 밖으로의 나들이는 예사스럽지 않은 일이다.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밤잠을 설친 것도 없다. 오히려 내복을 챙겨야 하고, 외투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추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렇게 기어 나온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다. 열이 훨씬 넘는다. 시간을 어긴 녀석도 없다. 얼굴에는 설렘과 웃음이 잔뜩 배였다. 속으로 웃음이 난다. 혹 마음을 들킬까 해서 표정을 관리한다. 담배를 꼬나물면 그나마 괜찮다. 어떤 고상한 짓을 하려고 바쁜 시간을 내서 억지로 나온 듯한 몸짓을 만드는 데 제격이다. 우리뿐만 아니다. 옆에서는 더욱 왁자지껄이다. 벚나무 아래 엿장수 손수레 옆에서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드는 국민학생과 뭐가 다르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하늘의 심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보기에도 우스운데, 하늘이 보기에 얼마나 가련하고 귀여울까. 그래서 바람을 약간 잠재우고, 해를 내보냈다. 이것은 순전히 갓난애를 지긋하게 내려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마찬가지다. 날을 잘 잡았다느니 하는 허풍도 제 흥겨움을 이기지 못한 소리이지 말은 아니다.
얕은 산자락에 잠긴 소풍자리는 제법 구미를 당겼다. 온화한 기운이 전해왔다. 천연 그대로가 가끔 감동을 안겨주기는 해도, 정성스런 인공을 대하여 그 지은 사람의 마음이 읽혀지면 더욱 좋을 때가 있다. 여기에서 그 맛을 조금 보았다. 무슨 선물이든지 간에 준비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전해져야 좋다. 그 씀씀이가 특별할 때 더욱 그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역시 가치는 줍는 게 아니라 만드는 데 있다. 너른 공간 여기저기서 만드느라 많은 공을 들인 마음과 손길을 엿보았다.
어울려 노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혼자 노는 것도 아니고, 어울려 논다는 데 그 기쁨이 오죽하랴. 항시 하는 말이지만, 먹고 노는 것은 같이 해야 제맛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풍을 설레며 기다리는 것이 단순히 본능만은 아닌 모양이다. 어울림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품앗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제가 와서 나에게 주고, 내가 와서 제에게 주니 서로 어울려지는 것이고, 그 가련한 정성이 모였으니 즐거움이 더 할 수밖에.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단순한 짓이라도 같이 하면 좋은 일이 많은데, 왜 이리 마음 졸이는 일이 많은지 모를 일이다.
삶이 더욱 그 뜻을 소중하게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이 억지로 짓는 공을 필요로 한다. 습관된 일상은 늘 그런 것으로 여겨져 의미부여가 어렵다. 겨울에 소풍을 계획한 것은 일종의 파격이다. 격은 정체이고 습관이니 파격이라 해도 남는다. 파격은 반드시 비난과 감동을 수반한다. 미친 놈들 아니면 부러운 놈들이다.
세상에 파격이 없으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교과서에 피 아무개의 수필이라는 수필에 상감청자 연꽃잎 하나가 격을 깼다고 하며 그 맛을 적은 게 있었다. 곧바로 박물관에 달려가 그 물건을 몇 십분 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문학적 감상을 사실적 관찰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 딴에는 사실적 관찰을 문학적 감상으로 옮겨간 과정을 적나라하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그 뒤에도 그 파격을 볼 수 없었다. 더욱 섬세한 자에게만 보이는 정도인 모양이다. 주로 강렬한 맛을 좋아하고, 다소 투박한 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겨울의 소풍은 누구에게나 파격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섬세한 마음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적나라하게 격을 깨뜨렸다. 초겨울의 바람을 산들바람으로 착각하고,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잔디를 푸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흰머리가 확연한 오십대의 녀석들을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바라보고, 하는 말마다에 치기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미쳤다!’
대체로 세상은 따분하다. 어리고 젊은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게 여겨진다. 떨쳐버리려고 애를 많이 쓴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습관과 일상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애를 써야 하고, 공을 들여야 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 된다. 미친 놈이 격을 깨고, 격을 가끔 깨야 사는 맛이 느껴진다. 될 수 있다면 계속 미친 놈으로 살고 싶다.
그래도 혼자 제 정신이 아닌 놈으로 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손가락질을 견디는 데 힘을 다 써버리게 되고, 짓거리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또 혼자로 작은 파격이야 가능하지만 좀 들썩거리는 파격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미친 짓에도 동지가 필요하고, 연대가 필요하고, 나아가서는 조직을 갖춰 격을 깨는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늙지 않기 위해서는 격을 깨뜨려야 한다. 새로운 것을 힘들여 찾아나서야 한다. 눕히고 싶은 몸을 일으켜 광야로 끌고 가야 한다. 움츠러드는 마음을 일깨워 생기 넘치는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그 몸과 마음을 모아 엄청난 동력을 만들고, 그 힘으로 세상의 격을 깨뜨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지. 꿀과 젖이 흐르는 세상, 아니 희망이 넘실거리고, 삶의 희열이 가슴에 차오르는 세상을 건설해보자.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애들아! 우리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도 소풍가자. 아니면 영하 십여 도가 되는 날에도 나가보자. 땡땡 언 땅에서 뒷땅을 쳐서 찌릿찌릿 어깨와 손목에서 번개를 체감하자. 따분한 세상을 깨뜨리고, 우리들만의 새 세상을 이룩하자. 그 세상은 마음에서부터 지어질 것이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소풍 전날의 설렘을 위하여. 그리고 젊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