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조화를 이뤄내기는 참 어렵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저 되는 일이 아니다. 기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보기 좋은 그림을 원했다. 그러나 멋진 결과는 아니었다.
안철수 후보가 오랜 협상 끝에 약간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표정으로 백의종군하겠다고 했다. 뭔가 아쉬움과 분노가 남아 있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서로 극단의 대결로 치달아 패자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양보하는 자의 아쉬움과 그로 말미암아 가져야 하는 자의 찝찝함이 내 마음에도 전해져 편하지 않다. 당사자도 아닌데 말이다.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다른 짓을 해도 영 개운치가 않다. 이미 내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 대한 갈증이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작은 사람의 큰 기대가 부끄럽기는 하지만, 제발 크게 바라는 작은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정말 좋겠다.
양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관중들을 위해서 넓은 마음으로 내던질 수도 있으나, 그건 말이다. 조화가 낫다. 조화는 양보보다 더 힘들다. 서로의 때깔을 최대한 살려 그 순수성을 유지한 채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얼마나 보기 좋을까. 조화는 맞서서 되는 일이지, 어느 하나가 자기의 색을 포기하면서 지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맞서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제 색깔을 가진 물감이 있어야 한다. 빨강은 빨강으로 파랑은 파랑으로 있어야 그것을 조화로 그림을 그린다. 일곱 가지 색이 제 빛을 유지하면서 무지개이지, 다 버물여버리면 죽도 밥도 아닌 검은 색이다. 최악보다는 다소 위안이 되는 결과이지만 최선의 조화가 아쉽다.
비통한 심정으로 백의종군을 선언하는 안철수의 표정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느낀다.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삶에는 많은 일들이 있다. 견디기도 해야 하고, 얻어맞기도 해야 하고, 나락에 떨어져 허우적거리기도 해야 한다. 때론 희열이 왜 없겠는가. 끝과 끝을 오가는 감정을 잘 처리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삶의 재미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비가 내리려는지 날이 어두워진다. 마음도 그렇다. 자꾸 안철수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냥 사진으로만 봤다. 영상이 있긴 하지만 멈춘 그림으로도 그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쉬운 일이 없다. 더구나 한 나라의 운명을 걸머질 대통령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일이다. 충분히 그렇게 지내왔겠지만 마음이 보다 넓어지고 촉촉해지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산뜻하고 말끔한 과정이 더없이 좋기는 하지만, 한 발 물러서는 비통함과 고통이 헛된 것은 절대 아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에너지원이다.
우리나라는 순탄한 운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상처투성이고, 온갖 굴욕을 겪으며 유지되어 왔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감당할 나라가 아니다. 쉽게 맡으려는 사람은 굴종의 자세를 취해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영달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만 된다면 큰 세력에 엎드리는 비겁함을 부끄러움으로 느끼지 못해야 한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에 견주어 자신만이 우뚝 서서 모든 것을 누리고, 단지 밖의 힘에만 굴종하면 된다. 이런 역사가 대부분이 아닌가. (물론 이런 사람들의 역할 때문에 유지된 면도 있다.)
그래 왔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지만 떳떳하게 제 색깔을 드러내면서 지구촌의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나름의 역할을 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미래를 지어내기 위해서는 쉬운 사람이 운명을 맡아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맛을 본 인물이어야 한다. 쓰고 달고 시고 짜고 매운 맛들이다. 가을 국화의 모습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풍상을 겪으며 익은 사람이 맡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익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익는 것이 어디 말로 되는 일인가. 그러나 익어야 한다. 그 안에 철학이 있고, 원칙이 있고, 도덕이 있고, 또 포용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다. 사람이 살며 제 스스로 지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마음에 가득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내려앉아 자리를 잡고, 기쁘면 손뼉을 치면서 웃어재끼고, 슬프면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수 있는 감정이 깨끗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는 좋고 나쁜 감정의 끝과 끝의 폭만큼 할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이 기쁨이고, 기쁨이 슬픔이다. 또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 있다. 만족과 보람은 다른 사람의 환호에서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안에서 느껴야 제 맛이다. 제 맛은 공식처럼 기쁨에서 기쁨을, 슬픔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맑아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헤아릴 수 없는 넓고 깊은 마음속에서 소리없이 일어나는 전율의 맛이어야 한다. 웃지만 웃는 것이 아니고, 울지만 웃고 있는 마음을 연기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다. 지독한 외로움을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오직 하늘과 홀로 맞서 있는 외로움의 고통의 맛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의 빛을 누구나 보고 느끼듯이,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우리의 지도자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윽하게 외로움을 곱씹는 표정에서 한량없는 사랑과 너그러움을 느낄 수 있고, 우레와 같은 환호성에 지긋하게 미소를 짓고, 죽일 듯이 내뻗는 무리의 손가락질에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지도자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만 풍상을 겪어야 한다. 양보에는 자격이 필요하다. 있어야 양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의 자신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요사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쉽게 정리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옹졸한 것이든. 그것들이 오롯이 살아서, 싱싱한 배추가 묵은 김치가 되듯이 그렇게 곰삭아 묵은 맛으로 익었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을 겪은 사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깨끗한 감정을 맘껏 펼칠 수만 있으면 된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둥실 떠 있는 맑은 구월의 하늘처럼 마음이 대체로 유지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온갖 병마와 세월이 주는 어려움 때문에 생물로 살아가기도 벅찬데, 사람이 지어낸 불편함과 피곤함을 왜 뒤집어써야 하는가. 우리를 옭아매는 이 무리의 틀이 옹졸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옆에 있는 사람이 기를 쓰고 견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세상 말이다.
몇 년 아니면 환갑이다. 아직 청춘이지만 나이는 그렇게 되어 간다. 세상에 숨어 있는 여러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혀를 감동시키는 맛을 보고, 부드러움에 손이 닿으면 저절로 춘심이 샘솟는 감정을 유지하면서, 대체로 촉촉하게 젖은 마음을 지닌 채 남은 시간을 살고 싶다. 사람이 아닌, 오직 세월만이 맞설 상대가 되는 세상 말이다. (지나치게 헛된 꿈을 꾸면서)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줄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