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는 유목의 본거지다. 초원이 좋을 게다. 몽고 초원과 거의 같지 않을까 짐작했다. 듣기로는 여기 카자흐는 천산산맥 아래만 나무가 있고, 그 밖의 대부분은 사막에 가깝단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원을 그리며 멋진 골프를 꿈꿨다. 첫날의 골프를 잡치고, 화풀이나 아니면 본전 생각에 다시 제대로 된 골프장을 찾았다. 정의 당혹스러움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침을 먹으며 카자흐 아가씨에 대한 품평회를 열었다. 윤은 그만그만했던 것 같고, 선은 배짱이 맞아 밤새 인절미를 만들었단다. 윤은 날이 밝으며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선의 여유로운 표정에 만족스러움이 흘렀다.
밭 매는 김을 누구보다 애타게 찾았던 오는 농부의 딸을 만난 것이 아니라 상인의 딸을 만난 듯했다. 여기는 농부보다는 비단길이 지나는 곳이라 상인이 많았을 지도 모른다. 밭 매는 순수한 여인을 기대했다가 흥정과 잇속에 밝은 애를 본 것이다. 여름의 짧은 밤을 흥정하느라 새웠다고 할 수 있겠다. 아침 식탁에서의 얼굴에 피로가 역력했다.
도착하기 전부터 백마 타령을 했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곳이라 언어도 그렇지만 인종에 백인이 많다. 어쩌면 터키, 중동, 러시아, 중국 등지의 피가 뒤섞였을 것이다. 빼어난 몸매에 금발의 여인이 드물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백마에 대한 기대는 그리 허무맹랑하지 않은데, 백마 어쩌고 하면서 계속 투덜거렸다. 조랑말이었나, 아니면 당나귀였을까. 흥정하는 당나귀, 피곤할만하다.
화창한 날이었다. 더위가 느껴졌다. 여기의 그럴듯한 골프장이란다. 28년 동안 계속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도 가끔 들른다고 한다. 역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캐디 두 명이 붙었다. 골프장 같긴 한데, 거리측정이 불가능하다. 거리목도 보이지 않고, 캐디의 역량이나 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다만 페어웨이에 카트를 직접 몰고 달리는 기분은 좋았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 점심은 된장찌개와 김밥을 주문할 수 있었다. 나른하게 처마 밑에 앉아 멀리 만년설과 파란 하늘의 흰구름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힘 좀 쓰는 사람들이 오는지, 여유롭게 치는 우리를 앞지르겠다고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뒷놈들에게 몇 차례 순서를 양보하고, 긴 풀 속에 떨어진 공을 찾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일곱 시간의 라운딩이었다. 말고기가 맛있다고 먹어봐도 그 맛을 모르겠다. 그냥 쓰러지기 바빴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몇 시간 푹 자고나니 생기가 돌았다. 짐을 싸들고 도시에서 만나지 못했던 미인을 찾아 산으로 가기로 했다. 밭을 매던 김이 산나물을 뜯으러 올라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고 새로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처음 통역아가씨의 친구인 비비다. 오동통한 몸매에 카작인이란다. 다섯 살 아이 수준의 한국어를 할 때마다 귀여웠다. 산자락에서 오와 윤 셋이서 한 아가씨를 놀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시간이 괜찮았다. 오가 갑작스럽고 태연하게 '너 자*가 뭔 줄 알아?'라고 두 차례나 반복해서 물었을 때 잠시 당황했다. 비비는 못 들은 척했다. 이 아가씨의 역할은 김을 찾는 길의 안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산으로 오르는 리프트가 하얀 눈이 쌓인 곳까지 이어져 있다. 좁은 공간에서 고소공포에 몸을 사리는 선과 오를 놀리고, 비비와 장난을 치다보니 금새 닿는다. 내리자마자 겨울을 만났다. 여름에서 떠난 지 이십 여분이 되기도 전에 싸늘한 공기와 바람, 그리고 우박덩어리 속에 발을 디뎠다. 드문 장면이다. 소나기처럼 굵은 얼음덩어리가 한동안 쏟아졌다. 얼굴에 맞으면 제법 통증이 느껴졌다. 목 뒤로 떨어진 덩어리는 등으로 타고 내려가 비명을 질러야 했다.
낯선 장면에 갑자기 놓여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는지 정신을 잃었다. 계속 하늘을 보면서 음식점의 처마를 들락거렸다. 한참 뒤에 만년설의 경계가 밑으로 내려온 것을 알았다. 추위에 떨었다. 여기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것이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방을 잡고, 다소 여유를 갖은 뒤에야 목적을 깨달았다. 선과 오는 우박이 쏟아지는 산 위에 김이 있을 리 없다고 하산을 고집한다. 대단한 집념이다. 산 정상 어귀에서의 점심은 운치가 있다. 특히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우는 담배 맛이 그만이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둘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윤과 나는 혹 산을 오르기로 했다. 심심풀이 비비마저 데려가 버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삼천 미터 이상의 고지에서의 등산은 쉽지 않았다. 눈이 녹은 자리에는 풀이 났고, 이를 먹으러 몇 마리 말이 서성거린다. 녹다 남은 눈덩어리는 바위처럼 드문드문 비탈에 누워 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막힌다. 윤은 오랜 동안 등산반원이어서인지 저만치 앞서 간다.
삼백여 미터를 올랐을까. 윤이 소리한다. ‘이게 뭐지?’ 헉헉거리며 올랐다. 가서보니 달래다. 냉이와 함께 봄나물의 대명사다. 싱싱한 모습으로 꽃대를 달고 몇 포기 연이어 있다. 희망이 생겼다. 내려간 놈의 집념도 높이 살 수 있지만, 우리의 것도 못지않다. 혹 달래를 캐러 김태희가 오지 않았을까. 봄나물이 나면 처녀 엉덩이가 들썩이는데.
공을 들여 캐어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저 아래 몇 마리 말만 풀을 뜯고 있다. 좀 더 오르면 있을까, 힘은 한계에 이르고. 그러는 사이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억수의 소나기와 같다. 머리와 어깨에 떨어지는 감촉이 좋다. 피할 곳도 없어 그냥 맞아야 했다. 몸속으로 파고든 놈 때문에 동동거리는 윤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발길을 돌렸다.
아다모와 이숙의 ‘눈이 내리네’가 떠올랐다. 천천히 걸었다. 그 눈을 맞으며. 김태희는 이 눈을 맞으며 떠나가 버렸다. 봄인가 싶어 기대를 했더니, 날도 심술궂다.
먼저 내려간 윤이 다시 큰소리로 부른다. 경양식집 처마 밑이다. 젖은 몸으로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보기 좋은 광경이다. 커피를 마시자 했다. 밖으로 카푸치노 두 잔이 배달되었다. 만년설 아래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맛이 정말 좋다. 담배의 구수한 맛이 더 진하다. 약간 묵직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시간이 소중했다. 떠나간 여인을 그리며,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리 유창하지 않는 영어를 지어내며 들락거리는 윤의 모습에서 김의 아쉬움을 대신할 정이 느껴졌다.
젖은 탁자 위에 놓인 달래 몇 포기가 거슬렸다. 혹 자연보호 운운하며 시비에 걸릴까봐 비닐봉지 하나를 구했다. 윤이 종업원에게 영어로 뭐라 했는데, 조금 뒤에 그는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 물을 담아 왔다. 싸지 말고 꽂으라는 게다. 말하기가 서툰 것인지, 듣기가 그런 건지. 영어가 산마루에서 고생이다. 꽂으니 그런대로 모양새가 난다. 눈, 커피, 담배, 꽃 등등 정감이 넘친다.
눈이 그칠 무렵 전화가 울린다. 밑에 내려간 두 놈이 미인을 찾았다며 큰 소리로 빨리 내려오란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다. 역시 미녀는 밑에 있는 모양이다. 전화는 선의 말에는 지들 것만 구했다는 것이지, 우리의 것은 없다. 애타게 찾고 원했던 오의 바람을 충족시켰다는 의미가 크다. 홀아비 둘은 두 쌍을 구경하기 위해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 김태희 찾기 여행은 엇나가기 일쑤다. 밑 리프트 정류소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몇 대를 피웠는지 모른다.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초록의 산속에 바람이 시원했다. 곰이 사느니 마느니 싱거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도착한 정과 함께 다시 차로 올라갔다 내려와서 일러준 곳에 다다랐다. 고급 야외 식당이다. 식구가 늘었다. 비비는 어디로 가고, 밑에서 구했다는 여인 둘이 히죽거린다. 쾌활한 아가씨들이다. 백마는 아니다. 고려의 피가 반은 섞였다고 친근감을 보인다. 오의 실망하는 빛이 보인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다시 산을 오른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깊은 밤에 잠을 자기 위해 산으로 가는 모습이 이상해서 한 마디 했다. 잠자러 산꼭대기로 가는 게 좀 이상한데. 선이 되받는다. ‘**이는 *하러 가는 거야!’ 맞다. 두 놈은 뭐하러 가고, 두 놈은 자러 간다.
커다란 방에 모두 모였다. 나름대로 파티다. 몇 가지 먹거리도 있다. 시덥지 않는 얘기 끝에 이벤트를 주문했다. 새로 온 아가씨는 그리 좋은지 계속 몸을 흔들어댔다. 춤을 익힌 솜씨다. 그 춤을 보자고 했다. 몇 달러를 걸었다. 일반적인 춤이 끝나자, 스트립쇼를 주문했다. 달러에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었다. 주인이 말린다. 보다 구체적으로 가슴 하나에 오 달러, 밑에 십 달러, 총 이십 달러.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망설인다. 옆 남자의 눈매가 곱지 않다. 값을 턱없이 높여 부른다. 잘 시간이다.
삼천 미터 고지에서 잠을 자는 것이 좋았다. 밑에 여름을 두고, 겨울을 찾아왔다는 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등산이 아주 힘들었다. 헉헉거렸다. 그냥 자는 것도 일이다. 그런데 잔치를 치러야 하는 두 녀석의 밤은 온전할는지. 창으로 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