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잡글을 올렸던 원죄 때문에 이 글을 올립니다. 연극이 끝났는데 그 감회를 궁금해 하는 몇몇의 독자를 위한 의무에서입니다. 시비꺼리를 주어야 한다는 분에 넘치는 생각도 작용을 했습니다. 알고보면 심심풀이입니다.>
이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정리를 해야겠다. 승부욕에 사로잡혀 그 밖을 보지 못하였다. 경기장에서 쓸쓸히 퇴장하여 관중석에 앉으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냥 습관처럼 자리를 잡는다. 명예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좀 고상하게 말해서 사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음식을 먹어 양분을 취한 뒤 똥으로 밀어내고, 공기를 들이마셔 산소를 취하고 나머지는 뱉어내듯이, 세상에서 생기는 것들을 주워 담아 제게 필요한 것을 취하고 버리는 생명작용의 하나로 치부하고자 한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경쟁과 승부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에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더 남아 있다. 이렇게 살고 있기까지는 때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그럴 것임에도, 씁쓸한 기분에 젖었을 때가 훨씬 많다. 항상 기대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울 때 그 처리의 방법도 숱한 경험을 통해 터득해서 이미 알고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검은 교복, 벙거지 등등. 주어진 상황이 필연적이라고만 알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암울한 기운에 휩싸였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아무개 신부가 근무하는 인근 성당에 가곤 했다. 거기에서 야만적인 정치의 행태를 들었다. 사회분위기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암울한 기분의 원인을 찾은 듯했다.
밖의 적을 막기 위해 키웠다고 여긴 군인의 몽둥이에 처절하게 얻어맞기도 했다. 군홧발에 밟히는 것이 무서워 무릎을 억지로 꿇고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어디에 분노를 품어야 하는지 몸서리칠 때도 있었다.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버티다 스물여섯 가을에야 끌려가서, 최루탄이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세상에 어차피 치를 바에야 진짜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집안에 힘 좀 쓰는 사람이 있어서 부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경으로 분류되었다. 상부의 청탁이 어느 놈의 게으름으로 발효되지 못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다. 참 더러운 운명이었다. 마침 86․88 하던 때라 경기장 경비대로 배속을 받아 그 더러움은 덜 맛보았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비굴해져야 했다. 이것 또한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유효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길다. 그 긴 세월에 몸을 담그고 사는 한정된 삶의 날은 많지 않다. 그래서 더욱 아쉽고 다급하다. 하고픈 것들은 너무 많은데, 자꾸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모두를 가져도 만족하지 못할 본능을 가지고 있어 항상 채우기에 급급하다. 욕망이 삶의 에너지인 것은 맞다. 욕망이 사라지면 살 의욕도 없어진다. 살아 있기 위해서라도, 살기 위해서 욕망은 끊임없이 꿈틀거려야 한다.
욕망은 가지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울며 젖을 찾고,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요구한다. 생존에 필요한 음식에서부터 시작된 세속적 욕망은 권력욕에 가서야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자연적 생존본능과 사회적 권력욕 그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욕망이 있고, 부귀도 명예도 그 사이에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면 결국 저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맨 끝에는 생존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세월을 극복하고 싶어 한다. 가장 크고 무모한 욕망이라 하겠다. 인생무상에서 느끼는 허탈감을 어떻게 하든 메우려든다.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적인 신념이 그 하나가 될 수 있고, 노화를 늦추려는 몸부림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생명체에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생명이다. 죽으면 의미가 없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전설로만 전해올 뿐 극복하기는 어렵다. 믿는 대상에게 아무리 빌고, 산에 오르고 뛰고 가려먹어도, 노화는 지름길로 달려온다.
늙어가며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잊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젊은 날에 대한 향수다. 본뜻이야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수에 젖는 것인데, 고향이 어디 마을뿐이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어 젊은 날을 회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렇게라도 해야 오늘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년에 내가 어떻고, 그때 말이야, 하면서 지난날을 떠올린다. 향수에 젖은 강도는 나이에 비례한다. 그만큼 노화를 거부하려는 의욕의 표출이다.
옛날을 그리워하며 오늘의 나이를 거부하는 자는 젊은이를 무시한다. 스스로 아직 젊다고 여기기 때문에 진짜 젊은이는 아이로 보인다. 알지도 못한다고 타박하기도 하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욕한다. 이 시대, 이 상황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꽉 차있어서 절대 주도권을 양보할 의사가 없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모든 것을 움켜쥐려고만 하는 것이다.
늙은이에게 어찌 좋은 면이 없을까. 경륜이라고 하지 않는가. 늙은 말의 지혜로 살아날 수도 있다. 한 인생을 돌면서 얻은 지혜도 많을 것이다. 숱한 경험이 생각이나 이후의 행동에 거름이 되는 경우이다. 좋은 경륜은 젊은이를 가르친다. 그리고 기회를 준다.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권고이고, 권고를 할 뿐 결정의 역할은 양보하겠다는 미덕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상하게 안 좋다 하는 것이 힘이 더 세다. 음양으로 보아 악이 양이고 선이 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항시 악이 거세고 앞에 나선다. 선은 주저하며 숨어 있다. 경륜을 가진 늙은이보다 깡짜를 부리는 늙은이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잘 익은 홍시와 곯아버린 감과 같다. 곯은 것이 더 행세를 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늙은이는 무시당한다 싶으면 깡짜를 부린다.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걸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버럭 화를 낸다. 일부러 반대편에 서서 오기를 부린다.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내가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아우성이다.
이 나라 안에는 향수에 젖어 당연히 오는 노화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오기를 부리는 늙은이가 참 많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능의 하나로 여기면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향수에 짙게 젖어 있다. 옛날이 그리운 것이다. 지난 세월을 떠올려야 오늘의 노화를 잊을 수 있고,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머물러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옛것을 붙잡고 존재를 과시하며, 아랫것들은 아직 철없는 것으로 깔본다. 끝까지 이 세상의 주인공이고 싶으니 못 할 일이 없다. 세월은 밖으로만 흐르고 마음은 항시 청춘이니 그 깡짜를 어떤 말로도 달랠 수 없다. 오는 것들에게 좀 넘겨주자는 말은 곧 죽으라는 소리로 들리니 용납이 되겠는가. 영원히 살아야 되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 오십이 넘었으니 젊었다고 해야 하는지, 늙었다고 해야 하는지 애매하다. 일단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은 접어두고, 젊은이의 패기가 늙은이의 오기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냥 그 세상이다. 어차피 생명체의 무리는 물리적인 힘으로 굴러간다. 물리력에는 쪽수가 제일이다. 군홧발이 무섭고 몽둥이가 두려우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억울함은 안으로 삭혀야만 한다.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당할 수 없는 것이 물리력이다. 폭력이라고 한다.
나는 늙은이일까, 젊은이일까. 늙은이라면 홍시일까 곯은 감일까. 자주 향수에 젖는 것을 보면 늙은이 축에 속한다. 초가지붕에 눌려 낮게 앉은 집이 그립고, 어머니의 젖무덤과 해주는 음식이 또 몹시 그립다. 붉은 감이 이 가지 저 가지에 성글게 열려 있듯이, 그 가지를 따라 누런 초가집이 열려 있고, 구불구불 넓은 데서 좁은 데로 뻗어난 시골 동네의 길이 정말 그립다. 동지섣달 검은 밤에 짖어대던 개소리나, 아직 깜깜한 밤인데도 우렁차게 울어대던 닭소리를 떠올리면 마음이 촉촉해진다. 커다란 콧구멍으로 김을 내뿜으며 여물을 씹는 누런 소도 보고 싶다. 허상이더라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어 한가할 때마다 일어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회시간의 교장선생 훈화, 얼룩무늬 교련복, 군홧발과 몽둥이, 최루탄 냄새를 떠올리면 마음의 안정을 잃는다. 아직도 분노가 치민다. 스무살 오월에 지하방에 갇혀 조그만 창으로 흩날리는 버드나무 솜털을 바라보며 돌아버렸던 그 시간과 공간도 정말 떠올리기 싫다.
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으로 나이를 잊지 못한다. 고향의 정취를 떠올리며 잠시 마음의 안정은 얻을지언정 시간을 잊지는 않는다. 스물 젊은이에게 권고해줄 경륜도 없다. 사는 날이 많아질수록 새로움에 좋기도 하거니와 흔하게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니, 난 아직 늙지 않았다. 서툴고 투박하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슴이 아직 쿵쿵거린다. 허허벌판으로 뛰쳐나가 가슴이 터지도록 외치고도 싶다.
아직 이 땅에는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그리고 세상의 주도권을 결코 아래에 넘겨주고 싶지 않은 늙은이들의 깡짜가 대세다. 그들에게 쌓인 경륜이라곤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것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뿐이다. 양이 음보다 더욱 드세니 이들만이 세상에 가득한 듯 보인다. 향기로운 경륜은 숨어버려 역할을 못한다. 앞에서 그랬으니 배운 게 그것 밖에 없다. 보고 배운 대로 할뿐.
우리의 현재다. 기대는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언제 한번이라도 정치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준 적이 있는가. 혹 있을 지라도 더러운 것이 더 가슴에 남는다. 세끼 먹고 숨쉬게 해주었다고 해도 큰 소리로 항변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다면 그렇겠다. 기대가 지나쳤는지 왜 이리 아쉬움이 많을까.
그래도 젊은이라 미래를 다시 꿈꾼다. 새로운 영웅을 기다린다. 아니면 상황이라도 좋다.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스스로 세뇌한다. 강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산골마다 흐르는 물은 선녀의 옷때깔보다 맑은데, 사람의 하는 짓이라고는 왜 이리 검고 탁하게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고사리나 캐 먹으며 살 수도 없다. 풀어버려야 한이 남지 않거늘, 본디 한스러움을 좋아해서 끊임없이 지어내기 위해 상황이 암울한 채로 머무는가. 마지못해 그렇게 여기고 자신을 다독인다.
천상 도를 닦아야 하나보다. 열악한 환경에 있어야 눈은 더 멀리 보고, 가슴은 더 깊이 느끼고, 뇌는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다. 이 세상이 선경이라면 좋으련만 그곳은 딴 데 있고, 여기는 고통스런 수도장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타고날 때부터 하늘의 아끼는 자식인 모양이다. 얼마나 크게 키우시려고 욕심을 부리시는지. 이렇게 지내고보면 모두가 도통군자가 되겠다.
사는 날까지 의미 없는 바위굴리기라도 하고 싶다. 벽에 부딪쳐 몸부림치고 싶다. 달관한 자세로 은은한 미소를 짓는 모습은 이 다음에 그 열정이 식거든 마지못해 갖추더라도, 아직은 심장의 더운 피를 콸콸 품고 싶다. 나는 꿈을 이루지 못한 한스러운 자리에, 여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힘이 넘치는 채로, 그렇게 아래에 남아 세상에 뜬 것들이 먹고 버린 찌꺼기들을 통해 더 깊은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 계속 그 날을 기다리면서.
늙지 않아야겠다. 몸부림 자체로 젊음이요, 허상의 향수를 자아내어 노화를 억지로 잊기는 싫다. 항상 젊으니까 말이다. 늙은이로 가득 찬 이 세상, 볼거리도 많다. 젊었다고 착각하는 늙은이를 젊은 눈으로 바라보면 볼만한 구경거리도 있다. 추태도 볼만하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 원한이 맺혀 부르짖는 울분이 아니다. 본디 이승은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땅에 젊은이가 많았으면 좋겠다. 대부분 새것이 좋은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