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고 동창들에게 드리는 서신
안온함이 남아있는 한 낮의 태양에도 제 마음은 수수로워져 본관 앞 돌 계단에 앉아
삼삼오오 수런거리며 비눗방울 같은 미소를 연방 터뜨리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그 다채로운 순결의 미소들이 해맑고 올곧게 수업시간마다 펼쳐지도록 해 주는 것이
좋은 교사의 모습이겠지요.
입시지도라는 현실적 명분 때문에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내 몰기도 하지만
저에겐 참교육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아직껏 소롯이 남아있답니다.
배화여고에 부임해 왔던 90년대 초반 토요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문예교실을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놀이도 하고 토론도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전교조 참교육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그 당시 저는 학부모들에게서
가끔(?) 촌지를 받던 불량 조합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교조의 힘으로 교단에 촌지가 사라지게 되었으니 아이들 앞에 떳떳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촌지 추방을 비롯해 그 당시 전교조가 제안했던 여러 제언들이 현재 교육청에서
실시하고 있는 좋은 정책으로 학교 현장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전교조 한다고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한테 불려가고 아버지 다니시는
회사 사장님한테도 압력이 들어갔지만 주변에서 참교육 한다고 지지해 주시고
저 또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꿋꿋이 버티었습니다.
그렇게 지켜낸 전교조가 조합으로서 모든 권리를 잃게 되는 법외 노조가 되었습니다.
노동부의 규약 시정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교원 노조법에 의하면 조합원은 현직 교원만 가능하니깐 해고자 9명을 조합원으로
인정하지 말라는 권고 시정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9명의 해고자를 위해 6만 조합원을 희생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법외노조가 되어 교섭권도 잃고 수십억의 보조금도 받지 못하게 되고 전임자도
모두 학교로 복귀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하지만 전교조가 노동부의 규약시정을 거부한 이유는 오로지 전교조에 대한 정체성 때문이었습니다.
전교조는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조직입니다.
교육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된 해고된 선생님을
우리 조합이 지켜주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일 것입니다.
국가 인권위가 나서 그 노조법이 헌법 정신에도 위배되니 고치라고 시정권고 하고,
국제 기준 -유럽과 미국 일본등 선진국에서는 노조원의 자격은 노조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되어있어
해고자도 조합원으로 인정함 - 에도 맞지 않는 낡은 악법이어서 ILO에서도
수차례 우리나라 노조법을 고치라고 권고했었지요.
아이들에게 정의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로서 부당한 악법에 저항하는 것이
올곧은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동창 친구들에게 드리는 서신인데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혹여 제가 전교조에 목숨 걸고 애면글면 하는 일이 덧없어 보이지는 않으시겠지요.
사실 말하자면 저는 사민주의자도 못되고 진보적 자유주의자 정도일겁니다.
전교조가 법외 노조가 되도 우리 학교에서 내가 하는 일이 특별히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예전처럼 학교일과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즐거워 할 것이고 선생님들과 유쾌한 농담을 나눌 것입니다.
법외노조가 되도 전교조가 가뭇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엄연한 실체로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역사적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교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관심할 수도 있고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참교육은 지지하지만 정치적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이고,
전교조 활동의 방향에는 대체적으로 공감하지만 노조 활동하는 것에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장문의 서신을 보내는 이유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전교조가 더욱 건강하게 거듭나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요즘 학교 슬로건 중 대세가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인데,
그를 위해 참교육이 작은 밀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부디 이 일을 계기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존의 의미를 뒤 흔드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주체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깐요....
장문의 편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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