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선샤인!
저는 오늘도 캄캄한 새벽 샛별 하나 외로이 떠 있는 하늘 아래 매동 운동장을 뜁니다.
아침 운동 선샤인 단장으로서 나는 무한 책임감을 가지고 아무도 나오지 않은 운동장을
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달립니다.
운동장은 온통 희부윰한 하나의 커다란 풍경으로만 비쳐집니다.
운동장을 뛰며 아직껏 혼곤히 잠들어 있을 회원들을 떠올리며 하얀 잔설에
까닭없이 제 마음 재릿재릿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소처럼 순박한 눈빛을 꿈벅이며 인생 뭐 있냐며 GO를 외치던 건호에게 ‘안녕~’ 인사를 건넵니다.
암을 잘 이겨내고 이제는 완치단계에서 몸의 안녕을 위하여 열심히 애쓰고 있는 건호 화이링~
생각해보면 인왕은 마을 공동체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임입니다.
유년 시절 형이 아직도 형님으로 곁에 있어 술 한잔 아무 때나 부딪칠 수 있는 그런 곳이지요^^
저는 오늘도 스무 바퀴를 도는 중입니다.
무려 스무 바퀴씩이나 도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얼마전 막내 딸 예랑이가 느닷없이 공부가 하기 싫다며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혼자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태업을 선언했을 때, 이 세상엔 힘들어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아빠도 운동장을 뛰다 보면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뛴다고...
앞으로는 예랑이를 떠 올리며 10바퀴에 10바퀴를 보태 스무 바퀴씩 뛰겠다고
의연하게 선언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얼어붙은 운동장엔 누군가의 발자국과 막대로 아무렇게나 그은 곡선들,
눈을 치우다 긁힌 삽자국들이 울퉁불퉁 제멋대로 단단한 형상으로 수 놓아져 있습니다.
하여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운동장을 스쳐 지나간 온갖 사연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사의 어둠인 셈입니다.
인생 또한 저마다의 단단한 주름에 서려 있는 사연들로 하여 뭉클한 것이겠지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제법 쌓여있는 눈을 밟을 때 촉감이 농염한 여인의 풍만한
가슴을 터치할 때의 그것과 비슷해 살며시 즈려 밟고 갑니다.
몇바퀴를 돌았을까요...
세상은 서서히 제 빛깔을 드러내며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했던 각각의 사물들이 온전히 제 모습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빛으로 나아가는 길은 단독자로서 개별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서히 밝아오는 빛을 따라 소리도 따라옵니다.
어둠속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발자국 소리도 이제는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어둠속에서는 상념에 빠져 있어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환한 햇살 속에서
세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소리가 저 여기 있었어요 라며 속삭이고 있네요^^
무심했던 소리에게 얼마간의 미안한 마음을 전하자 이번에는 바람이 제 옷깃을 흔듭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11월의 아침 바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선뜻 들어서기 어렵지만 무방비로 11월의 아침 바람속에 잠입하면 그대로 별천지입니다.
말갛게 영혼이 헹구어 지는 듯한 느낌으로 나는 하루를 새롭게 세상과 접속합니다.
어쩌면 그 여운이 이렇게 12월의 바람으로 제 옷깃을 흔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이렇게 하염없이 운동장을 뛰다보면 예정도 없이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것이
낭만적으로 찾아들어 괜시리 고독한 척 하늘을 스윽 쳐다보기도 하는데요...
그러면 가장 먼저 달려온 햇살 하나가 내 이마에 찰랑 부딪치며 굳 모닝 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그래 좋은 아침이야... 조금 외로운 건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뜻이야’
뭐 이런 독백을 하면서 내게 사랑의 선샤인을 날려 주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 차례 떠 올려 봅니다.
저 멀리 광화문의 하늘은 아직도 붉은 여명이 남아있는데 간 밤내 뜨거웠던 정념이 채 식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 이제 저는 마지막 한바퀴를 광화문의 뜨거운 정념으로 힘차게 전력질주해 봅니다.
달려라 선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