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태주 조회수 3434 추천수 13 다운횟수 :0
2002/02/09
고래이빨과 원주민
>정말 좋은 질문을 주셨는데 최대한 근사치의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지 섬의 주민들이 가장 귀중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이 고래이빨입니다.
땀부아라고 불리는 고래이빨로 만든 아이보리 색의 목걸이 형 장식물은 희귀재이 고 가치재이며 의례용 선물로 사용됩니다. 결혼을 하려면 신랑이 속한 친척들이 신부의 집안에 고래이빨을 2-30개는 선물하여야 합니다. 물론 수 십 마리의 돼지와 소와 산더미와 같은 분량의 타로, 카사바 등의 음식과 손으로 짠 매트와 가재 도구등을 양쪽 집안이 교환하는 대규모의 의례가 치루어 집니다.
이 고래이빨은 싸움이 나서 화해할 때도, 남의 땅을 빌려 사용코자 할때도, 도망간 마누라를 찾아 올때도, 첫 아들을 출산하였을 때도, 장례식과 성인식과 같은 모든 의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집집 마다 이 고래이빨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집단간의 공동체적 의무와 부조 행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의례에서 제사장 혹은 수장은 고래이빨을 양손에 꼭 쥐고 나타나 무릎을 꿇고 축문을 욉니다. 모든 주민들은 "고래이빨(깜랑)입니다!!!"를 외칩니다.
이러한 주민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주민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고래잡이를 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카누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에 능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주민들이 연안 해안에서 창살하나로 큰 고기를 잡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들은 원정 항해를 즐겨하였고 집단적으로 고래잡이에도 나섰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작은 카누와 원시적 도구들을 가지고 고래를 잡을 수 있었을까에 관하여는 백경과 같은 영화를 생각하며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19세기에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서양의 무역상인들과 고래잡이 어선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밀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특히 유럽인들은 해삼과 백향목, 진주조개를 가장 탐내었고 가장 큰 수익은 고래잡이로 올렸습니다. 고래잡이 어장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부터 칠레 해안 시드니와 뉴질랜드, 일본해안을 거쳐 적도 인근으로 확장되었으며 호놀룰루, 타히티 섬과 통가, 피지, 마르께스, 사모아 등에 까지 고래잡이 기지가 설치되었습니다. 1840년대에 가장 고래잡이가 성행하였는데, 한 기록에 의하면 "고래선들이 남태평양을 하얗게 덮을 정도였다"고 하고 있으며 미국 고래선만도 700여척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고래잡이는 자본과 기술과 겸험이 필요한 심해어업이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서양인들의 고래잡이 어선에 잡부로 동원되었습니다. 마오리족과 다른 섬의 원주민들은 고래잡이 어선을 타고 시드니와 하와이, 피지와 같은 큰 도시로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로 고래잡이가 이루어지면서 원주민들의 생활도 급속히 변화하였습니다. 물론 귀한 땀부아도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고래이빨도 전통을 상징하는 가치재에서 돈과 다름없는 세속적인 시장교환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고래와 원주민들의 관계에는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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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이야기할 때... 좋은 말씀입니다.
남태평양에서 원주민들이 고래잡이를 하는지, 고래와 원주민의 관계는 어떠한지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