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를 보셨나요?
극중 주인공들의 열연에 힘입어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고 때깔 좋은 그림들이 넘쳐 나는 아주 잼나는 영화이지요...
영화를 보셨다면 당신은 무엇에 필이 팍 꽂혔나요...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준 고니(조승우)의 페르조나였나요...
표정 연기와 목소리 연기까지 달인의 경지에 오른 평경장(백윤석)의 연기였나요
치명적이지 않으면서 고혹적인 펨프 파탈 정마담(김혜수)의 화끈한 노출 신이었나요...
아니면, 최동훈 감독 특유의 톡톡 튀면서도 아포리즘적인 대사들과 화면 분할등의 경쾌한 미장센이 좋았나요...
‘범죄의 재구성’에 이어 ‘타짜’를 보노라면 최동훈식 영화라는 영역이, 그만이 스타일리쉬한 방식이 있는 것 같네요...
타짜들이 있는 도박판에는 냉혹한 승부가 있고 화려한 블러핑(속임수)의 기술이 있답니다. 물론 주인공 고니의 싸부 맹경장의 입을 빌리자면 눈보다 빠른 손의 기술은 아트라 할 수 있다고 하네요...
거기서 내공이 더욱 깊어지면 화투가 내가 되고 내가 화투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다시 말해 득도의 상태로 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목숨을 걸고 치는 도박판에서는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 한복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득도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손가락이 짤리고 귀가 떨어져 나가는 그런 무시무시한 게임에 나가는 사람들의 욕망에는 타나토스(죽음을 향한 본능적 욕구)가 있는가 봅니다.
자기 파멸을 예감하고 있으면서도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수렁처럼 깊이 빠져 드는 죽음을 향한 본능...
카지노 무비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지존 무상’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목숨 걸고 치는 한 판 승부가 있는데, 그 배경에는 친구간의 진한 우정이 깔려 있는데, 최동훈 감독의 영화 ‘타짜’에는 그 처절한 내기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 걸까요?
영화의 이야기를 단선적으로 간략히 풀어 보면 누나의 이혼 위자료를 짜고 치는 섯다 판에서 몽땅 올인 당한 고니가 그 주동 인물 박무석을 만나 복수하려는 집념으로부터 시작되지요. 전국의 도박판을 찾아 헤매던 중 현존하는 전설의 타짜 평경장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답니다. 이쯤 되면 무협지의 관습 -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극적으로 무림의 숨겨진 최고수를 싸부로 만나다 -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고니는 박무석에게 복수하고 잃은 돈의 다섯 배를 따면 도박판을 떠나겠다고 했지만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운명적인 여인 정마담과 사랑에 빠지면서 영화는 변주를 시작하네요... 싸부 평경장이 또 한명의 전설의 타짜 아귀에게 살해 당했다고 믿는 고니가 아귀와 운명의 한판 승부를 하기 위해 치 닫는 과정에서 영화는 새로운 ‘설계’를 하게 된답니다....
그 와중에 섰다판에서 만나 정마담과 함께 도박판을 설계하는데 함께 일하는 고광렬(유해진)이 아귀와 한판 승부를 하다가 손기술이 발각되어 손등에 해머가 찍히고 배 안에 갖히는 신세가 되지요.
그렇다면 고니와 정마담과 아귀가 벌이는 마지막 운명의 한판 승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수일까요...우정일까요... 아니면 타짜로써 최고가 되려는 욕망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도박판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최동훈 감독은 말하려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 무엇도 볼 수 없었답니다.
그저 고니와 아귀의 연기가 너무나 멋졌고, 블러핑을 멋지게 연출하는 카메라 워킹에 탄사를 보낼 뿐이었답니다.
(감독은 자기 복제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조승우는 캐릭터 변신을 너무나 훌륭하게 해 내고 있었습니다)
만화보다 더욱 만화적 상상력으로 멋지고 재미있게 만들어진 영화 ‘타짜’에는 그래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의 의미있는 결합보다는 무의미한 어긋남만 있더군요.
도박판에는 의리도 없고 친구도 없다는 비정한 대사는 고광렬을 구출해내는 장면에서, 블러핑이 예술일 수 있다는 대사는 사기치다 걸려서 손목이 찍히는 장면에서, 축축한 꽃이라는 정마담의 이미지가 질펀한 욕망의 과잉으로 그려지다 결국엔 파멸로 그려지는 모습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는 미끄러지고 있었답니다.
아, 그것이 바로 영화적 반전이라구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타짜’라는 영화에는 향이 강한 소스가 너무나 많이 뿌려져 있어 영화의 맛은 물씬 묻어나지만 감동은 일렁이지 않더군요. ‘지존무상’에서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에 재미를 느꼈고 남자들 사이에 진한 우정에 뭉클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
‘타짜’에서 그나마 잔잔한 감동을 느낀 부분은 원작 만화에는 없는 화란과의 풋풋한 사랑부분이었습니다. 현실적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한탕주의를 노리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순수한 사랑의 몫은 엄연히 존재해서 화란을 지켜주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이 정마담과의 농염한 관계 보다 더욱 예쁘게 와 닿았답니다.
최동훈 감독의 스타일리쉬한 영화에 페이소스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부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