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는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김일성 저격을 목적으로 특수 훈련을 받던 북파 공작원 684 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나 왜곡된 역사의 외상만을 그저 드러내고자 하는 영화는 아니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인해 연좌제로 고통받는 강인찬(설경구분)이 상대편 조폭을 습격하는 영화의 첫 장면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장면과 교차 편집하여 보여줌으로서 684부대가 국가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만들어 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실존의 양식을 어떻게 조작해 내고, 또 그 개개인들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체화시키는지를 감독은 개연성 있는 상상력을 통하여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적으로 말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주체(684 부대원)들이 조작된 정체성(김일성 암살)을 자기 삶의 진정성(명예 회복)으로 믿고, 그것의 환유인 이름‘을 얻고자 자폭까지 하게 되는 과정과 이유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훈련과정을 바라봄으로써 684 부대의 처참함을 느껴 보고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첨예한 한 단면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영화의 포인트를 놓치는 길이다.
영화 ‘실미도’의 전반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형수 혹은 무기수 31명이 실미도로 착출되어 주석궁 폭파와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훈련 받으면서 어떻게 국가에서 내린 명령이 자기 삶의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로 내면화되어 지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남성들만의 계급 사회 안에서 가능한 집단주의 혹은 마조히즘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물론 목숨을 담보로 수행한 작전이 성공했을 때 그들에게 부여될 면책과 명예가 가장 주된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훈련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더욱 뜨거운 동지애를 갖게 되고 죽어서라도 김일성의 모가지를 짤라 오겠다며 광기를 보이기도 한다.
교육 대장(안성기)와 조중사(허준호)의 냉철하고 완강한 이미지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가장 충실한 집행자로서 그려지지만 그들 안에 흐르고 있던 인간적인 뜨거운 피는 영화 후반부에드러나면서 묘한 병치를 이룬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작전 당일, 주석궁을 향해 파도를 헤치며 가는 실미도 특수대원들에게 작전 취소 명령이 떨어지면서 영화의 후반부는 시작된다.
국시가 멸공통일에서 평화통일로 바뀌면서 684부대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부대의 훈련은 먹이감을 상실한 맹수처럼 맥이 없어지는데 그들은 거세 불안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사격 훈련 도중 심장을 향해 쏘아야 할 탄환은 생식기쪽을 거덜내고 만다. 쓸데가 없는 생식기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훈련병은 항변한다.
목표를 잃어버린 그들은 정체성이 몹시 흔들리는데, 중앙정보부에서는 684부대 훈련병들을 전부 사살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엄청난 고뇌에 빠진 교육 대장은 일부러 강인찬(설경구)에게 그 사실을 엿듣게 한다. 그것만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집행하는 사람이 느껴야할 자기 부대원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었다.
대치된 국가 권력에 의하여 그들의 주체성은 이미 상실되기 시작했고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내기 위하여 그들은 실미도에서 기간병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탈출하여 청와대로 향한다.
그 와중에 그들은 무장공비로 둔갑되며 국가에 의해 자신의 이름마져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비통스럽게 알게 된다. 국가에 의해 호명된 욕망과 주체성을 이제 다시 국가에 의해, 아니 새로운 국가 권력에 의해 빼앗기며 그들은 탈취한 버스안에서 이름 석자를 피로 물들이며 - 주체성 획득을 온몸으로 절규하며 - 자폭하고 만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섬뜩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일수록 국가 체제에 항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들은 영생교의 맹신도처럼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편입해야하는가...
김일성을 죽이게 해 달라는 그들의 절규속에서 나는 당대의 삶속에 깊숙이 뿌리 박힌 레드 콤플렉스의 망령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분단상태로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약발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영화 ‘실미도’는 ‘태극기 휘날리며’에 비해 영화적 디테일이 다소 미흡하다.
조명이나 분장, 카메라 워킹에서의 허술함을 비장한 음악만으로 카바하려고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훈련과정에서 악마적 현실성이 온 몸에 전율이 돋도록 전해지질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래서 2% 부족한 영화라고 했다.
관객 천만시대의 문을 연 영화 ‘실미도’의 저력은 제작진의 작품에 들인 공과 멀티 플렉스로 대변되어지는 탄탄한 보급망 그리고 체계적인 홍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픔과 베일에 감춰져 있던 역사의 한 단면을 영화로 만든 소재주의의 승리이며 광화문 월드컵 응원이 연상되어지는 집단적 민족주의에의 동참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또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호명으로 작용하지는 않을런지....
1969년 실미도라는 역사속으로 초대 되어진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새겨지는 민족적 원형은 무엇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