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요코이야기와 우리의 무의식
박유하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2007-02-22 오전 11:56:33 게재
‘일본=가해자, 한국=피해자’ 등식은 항상 성립되는 것인가
‘요코이야기’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저자의 답변을 듣고서도 우리는 여전히 저자가 ‘가해자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요코이야기’는 국가의 정책에 따랐다가 경험하게 된 국민들의 ‘수난’을 말하려 한 소설일 뿐이다. 대하역사소설이 아닌 한 하나의 소설이 말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소설로서의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가한 만큼의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요코이야기’에는 없다.
문제의 발단은 ‘한국인’이 ‘가해자’로 묘사되었다는 데에 있었다.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수난-피해의 주체가 ‘일본인’이기 이전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달리 말하자면 ‘요코이야기’에서의 가해자는 ‘한국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남성’이다.
당시 일본 여성들은 우리의 ‘해방군’인 소련군에게도 강간당했다. 젊은 여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들을 피해 머리를 밀고 위장해야 했다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그리고 그녀들은 일본에 돌아가자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끔찍한 중절수술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해방 후 60년이,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세월이었던 것은 꼭 위안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해자이면서도 ‘가해국의 일원’이었기에, 위안부의 고통이 알려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수난을 내놓고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가해자, 한국=피해자라는 등식에 익숙한 우리의 의식은 그들의 피해에 결코 동정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수난을 인과응보격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시의 가해자조차 자신을 ‘남성’이기보다 ‘한국인’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렇게 정리하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교묘한 구조는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해방후 60년동안, 우리의 감성은 그렇게 폭력을 용인하는 식으로 길들여졌다. 그러나 일본의 가해에 민감하다면 당연히 우리자신의 가해에도 민감해야 옳다. 우리가 한국남성이 한 일을 ‘극소수의 예외’로만 간주하거나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피해자=한국이라는 등식에 균열이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 ‘강제징용’된 노무자들이 일본 땅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면 조선 땅 어딘가에도 가해자이지만 한국인들의 방관과 가해 속에서 전염병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간 일본인들이 묻혀 있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피해나 우리의 가해를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피해를 인정하는 일에 우리가 인색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창설 되지 않은 인민군’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 왜곡’이라고 간주하거나(당시 ‘가짜 민병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저자의 아버지를 ‘전범’일 것으로 몰아 붙인 것은 모두 그런 인색함이 시킨 일이다. 당시 만주에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몇 년씩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만주에서 일하던 저자의 아버지 역시 그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만주철도국의 행정직을 담당했다고 해도 제국주의의 일익을 담당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범의 딸’이라는 손가락질은,’전범국’이라는 규탄이 언제고 어디서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피해자를 강자로 만드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어서 서글프기까지 하다.
사태의 배경에 있는 것은 늘 그렇듯 우리의 가시 돋힌 불신이다. 우리의 가해를 인정하는 일이 우리의 피해성을 희석시키거나 일본의 가해성을 무화시키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도 불신은 전국민적인 경계심을 발동시킨다. 그리고 문제는 불신자체보다도,그 불신이 일본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좀 더 아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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