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하고 집에 오니, 못 보던 배낭이 거실에 있었다. 내가 장만하려던 45 - 50 리터 짜
리 큰 배낭이었다. 거의 새 거인 것 같은데, 한참을 살펴보니 누군가 사용하던 중고였다. 아
내에게 물어봤다.
- 아니, 왠 배낭이야, '프로스펙스', 메이커 있는 건데?
- 당신이 설악산 다녀 온 후에 큰 배낭을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했잖아요.
- 그래서, 당신이 사온 거야?
- 네
- 그런데 쓰던 거 같은데?
- '아름다운 가게'에서 샀어요.
이리저리 살펴보니, 몇 번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색상도 마음에 들었다. 배낭의 왼쪽
주머니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열어 보니 비올 때 치는 은색의 방수 비닐까지 있었
다.
- 얼마 주고 샀어?
- 알아 맞춰 보세요.
- '아름다운 가게'에서 샀고 중고면 싸게 샀겠네. 한 오 만원?
- 그럼, 그 정도 줬다고 생각하고 사용하세요.
- 더 싸게 샀단 말이야?
- 그럼, 한, 삼 만원쯤?
- 값을 따지지 말고 그냥 쓰는 게 좋겠다니까요?
- 사람, 참, 정말 궁금하게 하는구만. 대체 얼마 준 거야?
- 그럼 가르쳐 주지요. 단돈, 삼 천원.
- 엥? 정말야. 거저 줏었군. '아름다운 가게' 괜찮은데....
나중에 내가 그 배낭을 사용할 때 보면 알겠지만 정말 멀쩡하고 거의 새 것 같은 배낭이다.
나는 삼 천원이라는 가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없는 직업의 형편이어서 그런 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중고 물품
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사실 물건이라는 게 한 번만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 중고가 아닌가?
물건을 볼 줄 아는 안목만 있으면, 중고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것을 자주 경험하다
보니, 특히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중고를 찾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나도 물론 예쁘게 포장된 새 물건을 구입해서 쓰는 것이 더 좋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고를
잘못 골랐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다. 물론 중고를 사기 시작하던 초창기 때이다. 지금은 중
고를 많이 사다보니 글쎄 '노하우'라 해야할까?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생겨서 그런 실수를
많이 줄이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대표할 만한 중고를 소개하겠다.
1. 만 10 년이 넘은(93년 12월식, 2000 cc) 콩코드 자동차
언젠가 글에 쓴 적이 있는데 나는 자동차 매니아다.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처럼 나도 어릴 때
부터 바퀴 달린 것들을 좋아했다. 성인이 된 지금 자동차를 무척 좋아한다. 자동차 잡지도
매 달 구독하고 그 잡지사에 원고를 투고해 뽑혀서 그 상품으로 1 년간 무료구독도하고 그
랬다. 길에 지나가는 차는 외제, 국산 가릴 것 없이 엔진, 배기량, 그 차의 메커니즘, 계보,
경쟁차 등을 자세히 알 정도다. 물론 일부러 공부한 것도 아닌데 관심을 갖고 지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91년 3 월에 엘란트라 새 차를 사서 끌고 다니던 중, 95 년 2 월인가? 중학교 동창녀석이 사
업이 잘 안 된다며 차를 소형으로 바꿔야겠다고 했다. 녀석의 1년 조금 넘은 차를 자주 운
전해 보았던 나는 당장, 그러면 내 차와 바꾸자고 내가 제안했다. 얼마쯤 더 얹어주면 되겠
냐고 하니까? 형편이 되는 대로 한 500 만원만 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차를 잘 굴리고 있는데, 만 10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
다.
2. 96 년 10 월식, 2000 cc 티뷰론 TGX
자동차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통 스포츠 쿠페(엄밀히 말하면 스포티카)
가 나오자, 그 차를 갖고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중형차 콩코드가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도 않고 어린이의 마음처럼 무조건 티뷰론을 갖고 싶었다.
겨울 방학이 되자 장안평 중고차 시장으로 달려갔다. 연금 공단에서 1200 만원의 빚을 내어
돈을 준비했었다. 몇 군데 돌지 않고 마침 마음에 드는 차가 있었다. 첫 번째 주인이 두 달을
몰고 겨우 4천 킬로를 주행한 검정색의 최고급(TGX)형이었다. 지붕을 열고 닫을 수 있게
선루프까지 옵션으로 설치된 차였다. 티뷰론 기본형은 1210 만원이었는데 그 차가 만약
새 거라면 각종 옵션 포함 1560 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판매상은 아마 싼값으로
그 차를 원주인으로부터 구입했을 것이다. 분명히 급전이 필요하니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며
판 차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이었다. 내 추측에는 한 1000 만원 정도에 샀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세단에 비해 스포츠카는 급매의 경우 매입자를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제값을 받기 어렵다.
그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얼마를 주면 되겠냐는 내 질문에 1290 만원을 달라고 했다.
- 아저씨 내가 잘 알아요 아저씨, 저 차 분명히 1000 만원 정도에 사셨을 거예요. 그럼 한
100 만원 정도 마진 챙기시면 되지 1290 만원은 너무 심하네요.
- 그러면 다른데 가서 알아보쇼. 저렇게 거의 새 차가 나오기도 어렵고 난 더 이상 깎아줄
수 없어요.
처음에는 판매상의 고집이 완강했다.
나는 무려 두 시간의 흥정 끝에 티뷰론 기본형 새 차 가격인 1210 만원을 주고 그 차를 구
입했다. 일 년에 한 번씩 광택을 내고 관리를 잘 해 주었기 때문에 햇수로 8 년이 된 이 차
는 지금도 거의 새 차이다. 나는 이 차를 늘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비 오는 날은 콩코드
를 사용하기에 지금도 새 차처럼 번쩍번쩍한다. 그야말로 내 보물 목록 1 호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내 처지에 차를 두 대, 그것도 2000 cc 나 되는 중형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정말 무리다.
그러나 일본에는 '페라리' 거지도 있다. 페라리 거지란 2 억이 훨씬 넘는 페라리를 소유하고,
집도 없이 사무실에서 잠자고, 식사는 햄버거나 샌드위치로 연명하는 전문직의 자동차 매니
아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에 비해 나는 결코 무리한 삶을 살지는 않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생활한다.
3. 삼성 노트북 센스 900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노트북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기동성에 수리의 용이성
까지, 단 한 번만 데스크탑을 샀을 뿐 두 번째부터 노트북을 쓰고 있다. 물론 학교에는 업무
용 PC 가 지급되어 있다.
맨 처음 노트북도 용산에서 중고를 구입했다. 110 만원 주고 500 메가의 CPU 에 6 기가 짜
리였다. 한 2 년을 잘 썼는데, 좀더 고성능이 필요해서 약 1 년 반 전에 쓰던 노트북에 100
만원을 얹어 주고 역시 중고인 현재의 노트북을 쓰고 있다. 무선 인터넷까지 가능하다.
CPU 1.0 에 20 기가, 메모리 125 짜리였는데 메모리만 250으로 업그레이드해서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이상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그 당시 그 제품을 새 것으로 구입하려면 적어도
250 만원 이상은 줘야 했을 것이다. 한 일 년쯤 지나면 이 노트북을 보상받으며 또 중고를
구입할 예정이다.
그밖에도 내가 갖고 있는 물건 중에는 중고가 제법 많다. 중고를 구입하면 경제적으로도 이
익이지만, 그 물건에 대한 지식도 많이 알게 된다. 그리고 자원 재활용 측면에서도 중고 제
품은 소비자에게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일수록 중고를 활용하는 것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음악
CD도 중고 시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 개인이 자기가 사용하던 물건을 집 앞에 가판을
차려놓고 파는 모습도 흔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중고 물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와 각종 '알뜰시장' 이 생기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
이다.
얼마 전에 아들이 롤러블레이드를 새로 사야 한다고 하길래, 녀석의 롤러블레이드를 보니
부츠가 깨져서 도저히 수리해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고
- 한글아, 롤러블레이드 사러 가자.
라고 했더니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 아빠, 아름다운 가겐가 가서 중고를 사줄 거지?
- 어떻게 알았냐?
- 아빠가 가지고 있는 건 중고가 많잖아.
- 그래? 아빠도 중고를 잘 활용해서 쓰는데, 너도 당연히 중고를 싫어하면 안 되지.
결국 '아름다운 가게'에서 10000원 주고 랜드웨이 중고 롤러블레이드를 사줬다. 남이 쓰던
롤러블레이드를 바퀴만 20000원 주고 갈아끼워서 준 것이다. 결국 30000원에 해결한 셈이다.
별로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녀석이 사랑스러웠다. 하긴 나는 3 천원 짜리 대형 배낭을 사
고 즐거워 하는데 뭘....
지금은 제법 중고(?)가 다 됐지만 마누라만큼은 새 거였다. 결혼할 때 내가 신품(?)이었냐?
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 어이, 이 글 읽는 사람 중에 결혼할 때 신품이었던 넘, 나와보라고 해!
아마 맘 켕기는 사람 많을 걸?
* 덧붙임 : 한 달에 한두 번 반드시 있는 술집에서의 카드 사고(?)만 없으면, 아마도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걸 신품으로 사고도 남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난 참 대책 없는 인간이라
는 생각도 든다.
2004.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