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촐한 모임이었다.
쌍립회의 영원한 회장 수현이와 세정이, 상돈이, 15회 후배 상규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었다.
여유롭게 바둑을 두기에는 너무 덥거나,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났거나
아님 새로운 청춘사업 아니 장년 사업을 시작하고 있어서 인생이 바쁜가 보다.
나는 지난 번 수현이가 세꼬시 사준 은덕이 있어 바둑 매니아는 아니지만
순전히 그런 인정에 이끌려 나갔다.
아침에 조기축구회에서 술내기 축구를 하는 바람에 낮부터 막걸리를 6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알딸딸한 영혼으로 사랑방 기원에 들어섰다.
수현이와 상돈이가 한창 한수 두고 있었는데가만히 들여다 보니 하수인 내가 봐도 상돈이 대마가 살 길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돈이는 군인정신을 발휘하며 끝까지 수현이를 물고 늘어 졌는데... 아하 이런... 수현이가 덜컥수 한 수를 놓는게 아닌가....
결과는 상돈이의 대역전승이었다.
난 상돈이의 역전승은 바로 특전사에서 지옥 훈련을 견뎌낸 불굴의 의지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육군 중령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후의 바둑은 내가 물 5급이고 수현이가 강 3급이어서 나랑 한팀을 이루고 4급인 상돈이와 후배 상규랑 한팀을 이루어 종합 집수차로 호프내기로 두었다.
수현이는 4급 답게 침착한 승리를 거둔 반면 나는 술기운때문에 사고의 지구력이 현저히 떨어져 감각에만 의존해 두다가 2패를 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 팀이 졌다. 수현이가 준엄하게 한마디 했다.
"넌 앞으로 6급이다"
난 인정했다. 물 5급도 아니고 술 6급이라고....
뒤늦게 도착한 세정이와 상돈이의 한판 승부가 벌어졌는데, 거진 조치훈류의 장고파 바둑이었다.
수현이의 자기 가족에 얽힌 자신의 바둑 인생사를 파노라마하게 다 듣고 나서또 상규랑 수현이랑 한판 바둑을 두고 난 후였는데도 세정이와 상돈이의 한판 바둑은 겨우 중반전을 넘어 섰을 뿐이었다.
결국 상돈이의 형세 판단 미스로 세정이의 완승으로 끝나 버렸다.
아, 대한민국 육군 중령도 가끔 형세 판단 미스를 하는구나 생각하니 상돈이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바둑 모임의 하일라이트는 오히려 뒤풀이에서 이루어졌다.
대우증권 국제부 영업국장(?)답게 세정이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날카롭게 분석해 주었는데, 바이오 산업을 육성시키지 못하면 이나라는 비젼이 없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최고 강대국 미국은 국방 예산에 50%, 그리고 바이오 산업에 25%를 배분할 정도로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말도 덧 붙여 주었다. 반면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당장에 그 부가가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기업마다 외면하고 정부에서 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어 우리나라의 미래가 이대로 간다면 정말 암울하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내 비쳤다.
난 육군 중령 상돈이에게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배화여고 여고생들이 전쟁에 대한 처참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후방의 민심을 전해 주었더니 안보 전선에 이상이 없으니 차질없이 학업에 전념하라고 해서 난 크게 안심을 하였다.
우린 이날 경제와 국방, 교육문제, 한일 바둑 문화의 차이에 대한 격조있는 토론과 우리 쌍립회의 한일 바국 교류가 한일 외교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격조 있는 대화를 이어 갔는데, 대한민국 육군 중령 상돈이가 술을 전투적으로 마시는 바람에 급기야 9부 능선을 넘어 닐바나의 고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흐트러짐 없이 섹스와 욕망, 일탈 이런 류의 대화를 단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은 채 계속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격조있는 하루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