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이번 산행은 날씨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주말 내내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였다. 아
무리 ‘원기’ 가 비 오는 날에도 간다고 공지를 했지만, 잠에서 일어난 토요일 아침 7 시 30분
쯤에 내가 살고 있는 평촌 신도시에는 그야말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기에게 전화했
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난 번 설악산 산행 때에 장비가 철저했던 구식이에게 전화했
다.
- 나, 회준인데, 비가 엄청 온다. 갈 수 있겠냐?
- 아니, 비 온다고 산에 안 가냐?
- 너야 장비가 완벽하지만, 난 일회용 우비도 없거든(구식이는 반영구적인 우비가 있다.)
- 슈퍼에서 2000원 짜리 사면 되잖아?
- 알았어. 출발한다.
- 그래 시간 맞춰 와.
샤워를 하고 서둘러 준비를 했다. 약속 장소인 구파발 역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
문이었다. 다행히 출발당시에 비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집에 있던 귤을 챙기고 킴스
클럽에 들러 조껍데기 술을 사고 김밥을 사고.
지하철에 등산가는 사람들이 조금 있어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하긴 지난 겨울에는 그 차
가운 겨울비를 쫄딱 맞으면서 중청 산장에서 용대리까지 하루 종일 걷기도 했는데 여름비쯤
이야.
약속 장소에 나가니 나와는 처음으로 등산을 함께 가는 우종이와, 원기, 구식이가 나를 반
갑게 맞았다. 대화사 입구까지 가는 버스를 약 10분 타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등반을 시
작했다. 입산료가 1 인당 1600원 씩이나 했다. 원기 왈,
- 오랜만에 입장료 내고 산에 오르네.
- 아니 그럼 공짜로 오르는 방법이 있냐?
- 온라인 산악인들(다음 카페)과 산행할 때는 한 번도 입장료 낸 적이 없어. 찾아보면 공짜
길이 다 있거든.
우리는 의상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원기가 왜 바위산을 탈 때 필요한 릿지 등산화가
있으면 신고 오라고 했는지 공감이 되었다. 등산로는 온통 바위로 되어 있었다. 릿지화를
신은 원기와 구식이는 훨훨 나르듯이 올라가고 10 년째 신는다는 꽤 오래된 듯한 등산화
와 일반 등산화를 신은 나는 안전한 길로 올랐다. 그런데 건장한 체구에 등산을 자주하지
않은 듯한 우종이도 아주 잘 올라가는 거였다. 그래서 물어보니 옛날에는 등산을 꽤 했었다
는 거였다.
의상봉에 오르기까지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산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차례로 용출봉과 증취봉, 나월봉에 올랐다. 날씨가 점차로 개면서 시계가 확 트였다.
나월봉을 좀 지나서 식사하기에 딱 좋은 널찍한 바위가 있길래 점심을 먹었다. 하도 땀을
흘리고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별로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시원한 막걸리만 마시고 싶었
다. 내가 준비한 조껍데기 술이야 매장에 있는 걸 그냥 들고 왔으니 미지근했고 구식이가
가져온 서울(장수) 막걸리는 너무 얼어서 마실 수가 없었다. 원기가 아이디어를 냈다. 얼음
얼은 물통에다 조껍데기 술을 붓고 구식이가 준비한 등산용칼로 얼은 막걸리 통을 잘라서
막걸리 칵테일을 해 먹었다. 얼은 막걸리를 숟가락으로 퍼 담아 빙수 먹듯하다가 녹으면 시
원하게 마시는 재미가 쏠쏠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나한봉에 올랐다. 사방을 보니 경치가 참 좋았다. 비온 뒤의 맑은
경치가 전에 '가리산' 에 갔을 때의 시계를 연상하게 했다. 물론 그 때는 강원도와 경기도의
높은 산들이 신선계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한산 나한봉(688 미터) 근처
의 경치는 왼쪽으로 63 빌딩과 한강 그리고 반대편으로 도봉산 인수봉 백운대가 보였다. 물
론 은평구 일대의 그린벨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저 곳도 내년이면 개발을 시작한다고 그
쪽 방향에 살고 있는 우종이가 이야기해 주었다.
나한봉 정상에 오르니 두 시가 좀 넘고 있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넘는 동안에 어언간 쉬
는 시간까지 네 시간을 등반한 거였다. 삼천사 계곡으로 내려갔다. 삼천사까지 3.4 킬로미
터이다. 오르는 길이 다 합쳐서 2 킬로 미터가 채 안 되었으니 계곡이 완만하다는 뜻이다.
북한산은 명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개인적으로 약 2~300 미터만 더 높았으면 더욱 좋았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기가 수영복까지 준비하라고 했는데, 그 동안 날씨가 가물어서 계곡에 물이 말라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무릎까지 오는 깊이의 계곡이 있어서 간단히 물놀이를 즐기고 ‘삼천사’를
구경하고 그 밑의 계곡에서 닭백숙과 파전을 시켜 회식을 하였다. 힘든 등산 다음의 술 한
잔의 기분, 등산 하는 사람이면 모를 리 없으리라. 적당히 마시려는데 난데없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폭탄성 도우미(?) 한 사람과 피부가 고운 여인 한 명이 나타나서 술을 자꾸 시키
게 만드는 바람에 과음을 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귀가 했어야 좋았건만, 한참을 걸어 시내
에 나와서 또, 생맥주 한 잔, 그리고 택시타고 귀가해서 집근처에서 벤자민 아가씨(칵테일
바)와 맥주 세 병을 더 마시고 귀가했다.
비몽사몽간에 우리 나라 축구 선수들이 세계에서 코가 가장 긴 선수들(멕시'코')을 1:0으로
이기는 거 보고 취침, 애고애고, 난, 누구의 말대로 죽음의 '시뮬레이션'에 빠졌었다.
2004.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