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트레킹에서 만난분이신데 가리봉동과의 인연이 깊으신 분이 보내준 글..
가리봉 연가
영등포 한 자락이었던 가리봉은
70년대, 소위 고도성장의 시기
그 한 동력이자, 눈물과 한숨이 어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87년, 뒤늦게 개원하기로 마음을 정하면서
전 가리봉으로 그냥 정했습니다.
이유는 이참저참 따져 볼 수도 있겠지만
바로 내가, 추운 겨울 연탄불 꺼진 방에서 엄청 떨던 그 자취방 근처였고
호떡으로 저녁을 때우던 포장마차 앞이었으며
촌스럽지만 정감이 가는 다방이 근처에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공단거리를 작업복 입은 채 급하게 달려오는 노동자들을 치료했습니다.
열입곱,열여덟 된 나이어린 소위 '여공'들을 치료하면서, 위로했습니다.
가끔, 집생각 난다며, 일이 힘들다며, 외출도 못하게 한다며
울기도 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수요일은 잔업이 없는 날이니 늦게까지 기다렸다 진료하고
작업 중 나올 수 없으니 점심시간에 맞추어 진료를 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87년 격변의 시기, 전 그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뿌듯함으로
가리봉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경찰과 구사대에 맞아 앞니가 부러져서 오는 노동자들
며칠 밤잠도 못찬 채 잔뜩 잇몸이 부어 심한 통증으로 오던 현장 활동가들
오랜 파업과 출근투쟁으로 지쳐가는 사람들
주변에 서성이는 잠복중인 형사들이며 치안본부 직원들이며 심지어 안기부까지 가세하기도 했습니다.
혼란과 투쟁과 구속과 승리와 때로는 체념이 어린 곳이었지만
그 또한 우리가 겪어야 할 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해고노동자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고
대학교 앞 서점 못지 않게 많은 책들을 구비한 책방이 있었으며
근사한 음악테이프도 구할 수 있었고
가난한 지원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제 병원은
사람들 만남 장소가 되기도 했고
물건을 맡기거나 연락처 역할을 하기도 했고
회의를 하거나 술 한잔 걸치는 쉼터였습니다.
한번은 시장 안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며칠 후 아침, 치안본부에서 나왔다며,어떤 이가 정말로 여기서 치료를 했느냐고 묻더군요,
침착하게 이름을 다시 묻고는(아는 후배였는데 본명을 몰랐던데다가 알리바이가 필요한 시간대까지 확인하고) 챠트를 찾는 척 하면서 잽싸게 새로 만들어서는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유치장에 갇힌 후배는 구속을 면하게 되었고, 전 치료했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치과의사인 것이 기뻤습니다.
해방 후 최초의 연대파업이라는 구로동맹파업은
당시 정권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고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서울에 이런 둥지가 있다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무엇보다 이곳이 근거지가 되면서 모든 이들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어
정말 싫었나봅니다.
(당시 서노련사건으로 구속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김문수씨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어 딱했는데, 지난 선거에 당시 파업의 중심인물이었던 심상정씨가 등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공단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안산 시화공단으로 갔고, 일부는 위장폐업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닭장집은 남아있고
이제 그 부분을 일용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새벽이면 인력시장이 서고
전 비오는 날 환자가 더 많기도 했습니다.
다음 약속 날짜는 다음 비오는 날이었지요.
대부분은 서울근교나 지방까지 원정가는 베테랑 노가다들이었습니다.
도시가 재개발되고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갈곳 없는 사람들은 가리봉으로 찾아왔고
가출 청소년들에게 근거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정말 싸가지 없고 대책없고 기막힌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 책임의 대부분은 어른들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배가 불러 오는 십대의 임산부
멍이 든 채 진단서 때러 오는 매맞는 아내
부모가 버린 갈곳 없는 아이들
자식한테 의지할 수 없는 노인네들
배곪고 학대받는 아이들.......
가리봉은 노동자지역에서 빈민지역으로 바뀌었고
힘들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더불어 이를 지원하는 기독교 단체나 지역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들도 많아졌지만
전 IMF를 거치면서 얼마나, 힘든 이들이 절망적 상황이 되어가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90년대 초반부터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이 90년 후반에 들어서며
가리봉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북이 고향이셨던 부모님 덕에
전 아닌 척 하며 들어서는 조선족 동포들의 말 한마디로도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당황하는 모습들
딱한 처지
난감한 입안 사정
보험카드까지 없으니 황당한 치료비
게다가 불법체류자 신세
초기 그들의 모습은 연민을 자아내게 하였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일하는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치료요령과 일하는 요령,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까지
때로는 아줌마 수다하면서 친해지곤 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동포는 전혀 다른 어휘사용으로 언어소통이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덩달아 한국에 온 한족들도 있었는데
이럴 때는 옆집 조선족한테 통역을 부탁해서 진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치료한 많은 이들은 대부분이 5년 이상이었는데 대부분은,
여기가 더 좋지요,
언제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 오래 살 곳은 아니지요라고 답했습니다.
2-3년 정도 된 사람들은 아직 빚이 더 남아있거나
이제 벌어야 하는데 단속한다니 걱정이라고 했고,
일하는 지역 근처에서는 치료받지 않았는데
이유는 단하나, 그들에게 가리봉은 가장 불안하지 않은 동네였으니까요.
한번은 제가 우즈베키스탄에 갔었다고 하니까
이 말이 우즈베키스탄 말을 할 줄 아는 치과가 있다고 잘못 소문이 나서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저를 신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동포들은
대개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던지
많이 아프던지
임금도 못받고 돈도 못벌던지 하다가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대개는 나이가 많거나 식자층이거나 약지 못하거나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물론 영주권신청이 받아들여져 대한민국 국민이 된 소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년째 치료받던 아주 착한 아줌마가 영주권을 받았을 때 전 정말 기뻤습니다.
물론 현실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불법체류는 당연히 그들의 의식을 건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젊은 아가씨들은 당연히 노동보다는
술집이나 노래방 등에서 일하며 쉽게 돈번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고
중국과 연계된 조선족 브로커들도 많았고
타인을 의심하고 이기적이며 무례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안좋은 것부터 배우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진료 즈음 어느 회사에서 야간 작업까지 하느라 병원에 오지 못했다던 한 동포는,
왜 건설현장에서 일하지 않느냐, 회사가 더 임금이 박하지 않느냐는 저의 질문에,
노가다가 더 돈을 많이 벌기는 하지만
사람을 베립니다.
한달에 200,300 벌면 뭐합니까,
술마시고 놀고 돈도 허투루 쓰고
그런 사람들 돈도 못모으고 빚도 지고
고향에 가지 못합니다.
우리 아들 이번에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는데
애들 공부마칠 때까지만 여기서 일할겁니다,
이 고생해도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잘 해주어서 좋습니다.
그게 제 할 일입니다.
이런 얘기 들을 때면 정말 동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리봉은 이제 조선족 마을이 되었고
안타깝게도 슬럼화되면서 동네도 험해졌고
싸움질도 많고 심지어 살인사건도 발생하였고
힘든 상황들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불법체류노동자 일제 단속이 시작되면서
활기없는 스산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저녁시간 전철역과 거리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찹니다.
대부분의 표정은 힘들고 지치고 화난 표정입니다.
가리봉이 아쉽게도 활력을 잃어가고 희망이 없으며
더욱이 그들에게 드리워진 불법의 낙인으로 해서
저역시 힘들어졌고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발짝 떨어져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 17년을 마감했습니다.
음식문화기행으로 가리봉을 간다고 했을 때 전 무척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그 생각을 하며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습니다.
불법체류의 문제는 해법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이 생기와 희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가리봉에 다시 활력이 돌고
선생님처럼, 맛집이 많아져 들릴 수 있는 동네가 되었으면 합니다.
불행스럽게도 전 밥먹으러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침부터 향신료와 양고기 냄새로 저희는 창문도 열어놓지 못했었으니까요.
p.s.
1) 몇 년전 이성규씨 다큐 촬영팀이 저희 병원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이 동네에 오래 있었다고 소개받았다며 역사를 얘기해 달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TV로 완성된 필름을 보면서 처음으로 가리봉 역사를 새삼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이 처음이네요.
2) 제 방에서도 맑은 날이면 저멀리 한강 너머로 산꼭대기가 보입니다,
제가 여기로 정한 이유입니다.
상당히 위로가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