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樂山(요산)에 대하여
퇴계는 실제로 거의 매일 도산, 청계산등을 산책하였다. 각 산들의 봉우리며, 기암절벽들, 나무들, 폭포수 등을 완미하며 즐기다 움막으로 돌아와서 책을 들여다보았다고 하였다. 산을 완미하면서 퇴계는 그 기쁨과 희열을 자주 토로한 적이 있다. 스스로 충만한 원기를 듬뿍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불안에 직면함으로 해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퇴계의 樂山(요산)은 불안과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판단된다. 순수한 즐거움이 충만함. 이것은 본래적 자기가 약동함이다.
산과 계곡, 폭포와 각종 나무들... 이것들과 하나 되는 것. 거기에서 인간사에 대한 여러 잡다한 편견과 오해들, 선입견들이 모두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산행 내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산과 계곡, 폭포와 각종 나무들은 자연과학적 지식으로서의 그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거기에 나와 함께 있음으로서 나를 반기고 있는 것들이다. 나 역시 그것들을 찾아 헤메고 있었던 바로 그자이다. 만남! 서로 찾아 헤메이던 자들의 뜨거운 만남이 말없이 가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 불편함과 거추장스러운 것 투성이인 이 자연! 이 자연이 나를 따뜻이 품어주고 있었고 알 수 없는 원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원기는 무엇인가? 나의 순수한 살고자함의 기운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도시 속에서 아둥대며 살고자 노력 할수록 그 원기(순수한 살고자 함)가 소진됨을 느끼는 것일까?
주역의 팔괘는 하늘, 땅, 산, 연못, 바람, 불, 물, 벼락이다. 이 영향력있고 대표적인 자연물들은 음과 양의 조합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주역이 자연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어떤 기운이라는 점에 있다.
하늘은 세 개의 양으로, 땅은 세 개의 음으로 표현된다. 하늘은 양 기운 만이 모인 것으로, 땅은 음 기운 만이 모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중간의 산, 연못, 바람, 불, 물, 벼락은 하늘의 양 기운과 땅의 음기운의 결합과 변화로 생성된 기운들이다.
天地간에 음과 양의 기운들이 결합하고 변하여 여러 다른 형태의 기운들을 생성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연이 여러 형태의 기운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기운들은 음과 양의 기운으로 통합되어 있고 음과 양은 서로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자연을 여러 형태의 기운들이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관점은 하잘것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야만 할까? 아니면 자연과학적 자연물이 진리이고 주역적 자연물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인 쓸모없는 지식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어느 쪽이 진리인지 알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일까?
우리는 도시 속에서 아둥대며 그 자연의 기운들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우리는 도시 속에서 무엇을 향하여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 보다 잘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하여 직장의 일에, 사업에 몰두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몰두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을 위하여이다. 이 모든 --을 위하여는 나의 살아가기 위함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살아가기 위함을 위하여 우리가 몰두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러나 왜 우리를 그렇게 허전하게 만들고 허덕이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자연과학적 지식들이 진리라고 믿고 있으며, 우리가 몰두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 자연과학적 진리들에 근거하여 진행되고 처리된다. 그러는 사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자연과학적 진리 이외의 것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믿고 생활하는 그 자연과학적 진리들이 비진리라면 어쩌겠는가? 사실은 주역적 자연물들의 기운에 휩싸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면 어쩌겠는가? 사실은 자연과학적 진리가 주역적 자연물의 기운의 여러 양태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어쩌겠는가?
우리의 도시 생활이 자연과학적 비진리에 휩싸여 있고, 그 비진리가 우리들을 다른 곳은 절대 보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시간만 나면 우리도 모르게 산과 들, 바다의 자연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것은 산과 들, 바다로 달려간 우리들이 그저 헐떡이며 그 자연 속에 있다가 서둘러 도시로 기어들어 온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기운을 자각 할 겨를도 없이, 여전히 자연과학적 진리교의 맹신도인 채로 일상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느 산, 어느 절, 어느 해변을 갔다 왔다는 사실만을 움켜쥐고 도시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