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휴가에 4일 동안 4대강 자전거 여행 간다고 주위에 큰소리만 쳐놓고 준비도 다 한 상태에서
새벽에 급작스럽게 포기한 것은
1)35도 내외의 고온으로 인한 주위 사람들의 심각한 만류와
2)중2때 애국 조회시간에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 쓰러져 본 기억이 내 발걸음을 잡았고
3)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4대강 여행을 더위와 전쟁을 치르며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4일 동안 뭘 할까?
새벽에 눈을 떴으나 매미도 더위에 못살겠다고 울어대고, 끈적거리는 피부의 느낌,
연일 최고 기온이라는 일기 예보로 휴가계획 수정안 결정 내리기가 만만치 않다.
좋은 날씨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이런 날씨에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혼미한 정신에도 자꾸 생각의 꼬리를 연결시키니 기가 막힌 결론에 도달한다.
아!! 바로 그거다. 유~레~~카!!!!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하고, 하기도 어려웠고, 시도조차 안해 보았던 것을 해보자.
그리고 곧바로 A4용지에 다음과 같이 써서 좀 유치하지만 방문에 붙였다.
1.4일 간 집 밖에 한번도 안나가기
2. " 스마트폰 꺼 놓기
3. " T.V 안보기
4. " 최대한 말 안하기
5. " 1원도 안 쓰기
6.독서, 공부, 명상, 수면으로 보내기
7.채식만하기(과일+밥)
집에서 할 수 있는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이다.
그런데 첫 번째 시련은 집사람의 반응이었다.
상의도 없이 붙인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4일 동안 집에 있을라고? 제발 좀 아무데나 나가요....나 좀 쉬게”
계획의 적군은 바로 내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순간 영식님,일식군,두식이놈,삼식이 새끼....유머가 오버랩 되면서
아내의 속마음을 들쳐본 것 같아 마음 잠시 흔들렸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4일 동안 말을 최대한 줄이는 것도 항목에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보고 피식 웃는다....한마디로 관심없다는 반응이다.
오전 내내 책상에 앉아 장장 4시간을 버텼다.
두 번째 시련은 점심이었다.
막연히 생각한 채식.....이건 정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누라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내가 집에 있는 한, 음식 건의권은 내게 있어도
최종 선택권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채식할 생각 말고 밥 좀 덜먹고 저녁에 콜라나 먹지 말아요!!!”
이건 완전 1라운드 K.O 패이자 내가 들어봐도 백번 맞는 말이다.
인정하는 의미에서 동치미 물냉면을 아무 말없이 감사히 먹고
다시 방에 처박혔다.
채식 항목은 반나절 만에 포기하고 적게 먹는 소식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집에서는 마님이 주는대로 먹어야 된다는 가르침을 얻었고
음식이 권력이고 그 권력을 여자가 쥐고 있어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스마트폰 끄기와 T.V안 보기는
내가 평상시 지향하는 바라 그런지 의외로 쉬웠다
특히 스마트폰은 최근 내 신체의 일부분이 되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불 속에서 같이 뒹군다.
내 시간과 생각을 잡아먹는 에일리언 같은 놈이지만
뭔가 바라던 문자나 전화가 올 것 같은 그놈의 확인 습관&
오히려 골치 아픈 세상 보다 가상세계가 더 낫다는 도피의식.
스마트폰에 기웃거리지 않으니 독서의 진행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다만 조회나 검색을 할 수 없어서 일일이 메모해 두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증권회사 다니면서 항상 세상의 변화에 안테나를 세워야 하고
올림픽 금메달 소식이 시시각각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침묵도 일종의 언어이듯 세상과의 단절도 하나의 열정이라 생각하니 견딜 만 했다.
오히려 침묵하니 생각이 열리고 머리가 맑아진다.
거기다 독서를 더하니 생각의 조각들이 퍼즐이 되어
예상하지도 못했던 사색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립과 침묵......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또한 기운을 뿜어낸다.
마치 이 방이 Temple이고 내 행위가 템플스테이 같다.
등산이나 골프 등이 피부 밖의 즐거움이라면
이런 식의 느낌은 피부 속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평일 아내의 하루를 지켜 볼 수 있는 기회도 덤으로 얻었다.
아내의 몸에다 GPS를 설치한다면 재미있는 흔적이 나올 것 같다.
매일 아침 성당을 다녀오는 것을 빼놓고는
모든 행동의 궤적이 식구들의 의식주 해결과 관련이 있다.
가족 구성원의 한사람으로서 정말 감사한 일이다.
여행이란 자신의 축적된 경험과 낯선 경험이 합쳐지면서
내부에 긍정적 화학 반응이 일어나 새롭게 조립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구태여 밖에 나가지 않고 상황만 조금 변화 시켰는데
여행 이상의 신선한 반응이 몸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를 따져보니 군대간 아들 방에서 12시간 정도 책을 읽고 틈틈이 생각을 한 것 같다.
고 3때 10시간 정도가 하루 최고 였으니 올림픽적 표현으로
자신의 생애 최고 기록을 무려 2시간이나 경신한 것이다.
말은 물어보기 전에는 한마디도 안했다.
처음에는 객기로 평가했던 가족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지며
중간 중간 간식도 갖다준다.ㅋㅋㅋ
일단 시스템 안착은 성공이다.
두 번째 날도 첫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데 조금 익숙해지니 책상 앞의 내 모습이
스스로도 보기에도 마음 편안해진다.
식사도 소식을 하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15시간/日에 도전하였으나 낮에 깜빡 졸았고
방안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온 더위 때문에 냉장고 가는 횟수가 자꾸 늘어
목표 달성에 조금 못 미쳤다.
안타깝게도 3일째 되는 날 계획한 내용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영국과의 올림픽축구 4강 연장전을 새벽에 아들과 함께 T.V로 보게 되었고
(나도 휴식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일요일 아침 처갓집 식구와 성당가면서 집 밖으로의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하느님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시도와 체험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중도 실패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4일째 되는 날도 동네 동사무소에 가서 책을 네권 빌리고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잠시나마 만끽한 고립과 침묵
아들이 군대 제대하는 내년 말까지 100권의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책상 왼쪽에는 읽어야 할 책을 쌓아두고 오른 쪽에는 읽은 책을 쌓아 둔다.
내가 읽어서 쌓아 둔 책은 제대한 아들에게는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답하는 의미에서
나도 내가 읽힐 수 있도록
내 이름으로 된 책 한권 써보는 것을 내 버킷리스트에 추가하였다.
스마트폰을 켜보니 임자 잃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30여건이
나를 보며 반갑다고 아우성이다.
앞으로 또 다른 도약을 위한 고립과 침묵을
습관화 시키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하겠다.
우연한 새벽 생각 하나로 나를 이렇게 많이 뒤집어 놓은
숨막히고 지랄같은 더위에게 휴가를 마치며 감사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