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일 전 우연히 티브이를 보다가 문성근이 진행하는 인물 현대사를 시청하게 되었다. 그 날의 인물은 '차지철' 이었다.
1979년 우리가 고 3 때지? 부마 사태가 일어나자,
김재규가 말했다. : 각하, 정국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가 뭔가 다른 유화책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차지철이 이어서 말했다. : 각하, 심려 놓으십시오. 캄보디아처럼 한 20 - 30 만 전차로 깔아버리면 조용해집니다.
* 차지철의 거침없는 말을 듣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의 근무실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크게 걸려 있었다.
"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이 시대 착오적 코메디가
그 당시 많은 공무원들에게 먹혔다는 사실이 참 생경하다.)
# 정회준이 가장 좋아하는 문귀
'피천득' 님의 수필에 나온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몇몇 사람을 끔찍히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말이다. 박정희는 내가 미워하지 않기에는 역사에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10. 26 은 박정희가 김재규보다 차지철의 말에 더 귀기울였
기 때문에 일어 났을 개연성이 크다.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의
롭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
친다. 죽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절대 권력을 내놓았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기에.
그 프로(인물 현대사)를 보고,내가 약 2 년 전에 써 두었던 원고가 생각나서
여기에 싣는다. 혹시 나의 생각에 비판적인 의견 있으면 리필 부탁한다.
- 다카키 마사오 비판 -
- 정회준 -
비방과 비판은 다르다. 비방은 무책임하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것이고, 비판
은 애정을 가지고, 때로는 자기자신도 책임을 통감하며,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내 판단이 맞다면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비판’이 아니
라 비방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정희의 삶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에 대한 ‘비판’이라는 말조차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
러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비판이라고 글 제목을 순화시켰다.
왜냐하면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주권을 잃어버린 조국을 마구 짓밟던 다카키
마사오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행여나 이 글의 제목만 보고도 읽지 않을 것이 마
음 쓰였기 때문이다. 한가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닌 만큼 많은 사람이 이 글
을 읽고 공감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의 이 글이 우리 국민
전체 중에서 소수의 의견 - 다카키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가슴아
픈 현실 때문 - 에 속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 땅
에 사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다카키를 존경한다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나
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밝히겠다.
나는 다카키를 꼭 한 번 직접 본적이 있다. 그것은 중곡동 어린이 대공원 개원
식에 참석한 다카키와 그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약 50미터쯤 떨어져서 본 것이
다. 당시 청파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나는 영광스럽게도 학교 대표로 초청되어
그 장소에 설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므로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대통
령 아저씨가 예상보다 키가 작고, 좀 무뚝뚝해 보인다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와 나는 꽤 인연이 깊다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의 외동아들을 작고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가 중학교 2, 3 학년 때 담임을 했
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특별한 제자였던 그가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
지 않은 것을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인간적인 동정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냐하면 다카키인 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의 불행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
게만 있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그 책임을 떠 안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글을 통해서 여러 사람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사실을 말하겠다. 학
교측에서 권유했는지 그의 부모가 요구해서 그랬는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내
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실은 그 외아들이 중 3, 일 년 동안 나의 공부방을 이
용해 그를 학교에서 가르치시던 선생님들께서 방과 후에 전과목 과외 지도를
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과외수업을 받는 동안 우리집 앞에는 그를 보호
하는 경호원이 늘 경계근무를 했었다. 박지만 씨는 제법 공부를 잘했던 것으
로 알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한 학생을 위해 학교측에서 신경써서
편성한 특별반 - 가정 환경이 괜찮고 신원이 확실한 학생만 모인 학급 - 에서
70명 중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따라서 나는 박지만 씨가 고등학교 진학한 바로
그 해에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작된 것이 순수하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다카키는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한 동안 초등학
교 교사 생활을 했고, 그 어려운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도 당당히 합격했다.
그렇다. 그는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 육사를 졸업한 다음, 만주에
서 독립군과 전투를 했던 사람이다. 강제로 징용을 끌려가 태평양전쟁에 참가
했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신음하고 있
을 때, 일본 천황에게 매일 충성을 맹세하며 우리의 독립투사에게 총을 쏘던 그
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의 형 박상희는 공산당원이었고, 그도 공산당에 연루
되어 처형될 위기에 있었던 것을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그의 상관이 구명해
준 것은 역사가 아는 사실이다.
프랑스 드골 정권은 독일 나찌 치하에서 나찌에 협력한 반민족주의자들에 대
해 조금의 선처도 베풀지 않았다. 대부분 사형에 처했다. 잘못된 역사에 과감하
게 철퇴를 내린 것이다. 그래야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정
통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목숨받쳐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의
후손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친일행위를 적극
적으로 하며, 자식교육에 몰두한 반민족행위자들의 후손은 이 땅의 지도자로
행세하며, 때로는 몰수당한 땅을 다시 달라고 법에 호소하기도 하고, 급기야 대
통령 후보로 나오는 것은 물론 얼마 전까지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각
종 여론조사결과 발표되었었다.
이 굴절된 역사를 어찌한단 말인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 하나
가 온고지신일진대, 그리고 역사는 반복하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
인데, 그런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의 식민지 역사가 반복된다
면, 자기자신과 가족을 희생시켜가며 누가 다시 저 추운 고원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며, 누가 그 어두운 서대문 감옥에서 그 추운 계절에 혹독한 고문을 당
하며 신음하다가 목숨을 버릴 것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이 모든 책임을 물론 다카키 한 사람으로 돌릴 수 없겠지만, 역사가 굴절된 이
유의 상당부분이 그의 책임이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친일 협력을 한 정도
가 아니라, 애국 지사를 붙잡아들이는 앞잡이 일본군 장교이자 한 때는 공산당
당원이었던 그가 18년간이나 대통령을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확신
한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여가 시간에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즐겨 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아산 현충사를
성지처럼 가꾸어 놓고는 그 주변에 일본의 국화인 사꾸라를 심은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 주변도 봄이면 벚꽃이 화려하게 핀다. 이
것도 그의 뜻일 개연성이 크다. 김 구 선생은 효창공원에 쓸쓸히 누워계시고,
다카키는 국립묘지에 호화롭게 누워 있는 현실이 잘못된 우리의 역사를 보여준
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그의 이중성을 적나라하
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고교시절 우리나라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하는 책자를
본적이 있는데, 첫 장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밀짚모자를 쓴 채 모내기
하며 웃는 그의 사진을 보았다. 그 다음 사진은 함께 모내기를 하던 농민과 막
걸리를 마시는 서민적인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너무도 대조적이
다. 그가 마지막으로 마신 양주는 그 때의 유명세로 아직도 이 땅의 애주가들에
게 사랑받고 있다. 더구나 유명한 가수가, 모델이 그가 그의 심복에게 총맞아
죽는 모습을 보게 하지 않았던가. 정보부 직원이 채홍사 역할을 수 없이 했다
는 사실은 그 끔찍한 사건 후에 사실로 드러났다. 물론 북한의 지령으로 사랑하
는 부인을 잃은 그의 불운에 동정이 가는 것은 같은 남자로서 어쩔 수 없는 일
이지만, 그의 이중적 생활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우리가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사실이
다. 그리고 그것이 다카키가 지금도 보수적 인사들, 그리고 절대 권력에 대한
향수에 젖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 가장 확실한 이유이다. 물론 나
도, 그 부분에 있어서 그의 치적을 인정한다. 역사는 가정법을 사용해 봤자 답
을 구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군림한 18년 동안 다른 사람이 이 나라의 최고 지도
자였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경제 발전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추측으로 가능할
뿐, 어쨌든 그가 대통령으로 통치했을 때 우리가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
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국민들에게 저력이 없었다면 그가 아무리 경제정책을 잘 펼쳤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근면한 국민성, 세계에서 가장 낮
은 문맹률, 베트남 전쟁 참전의 결과로 5000여명의 젊은 목숨에 대한 금전적 보
상, 굴욕적 협상을 통한 일본으로부터의 경제 원조(그 당시 6억불은 큰 돈이었
다.) 등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풍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재임 중에 행한 그 무지막지한 탄압은 차마 여기에 어떻게 열거할 방법
이 없다. 책으로 써도 부족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고 똑똑한 목숨들이 그의
장기집권의 희생양이 되었던가.
가장 대표적 사건 하나만 예를 들겠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카키가 살아 있
을 때 그 자신조차 심복들에게 입버릇처럼 후회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사건
은 바로 지금도 확실하게 끝을 맺지 못한 인혁당 사건이다. 아니 인혁당 날조
사건이다. 인혁당이라는 집단은 실재하지 않고 그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날조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 지식인 등 반정부인사 8명을 긴급조치위반으로 잡
아들인 뒤 각종 고문을 통해 그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 사람들을 배
후 조종했다고 사건을 날조한 것이다.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채 20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된다. 세계 법조계에서는 이 사건을 세계 사
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자기와 가치관
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의 독재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 . 정말 끔찍한 일이
다.
그가 결정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 죄를 지은 것 중의 또 하나가 남북 분단
현실을 자기의 장기 집권의 연장수단으로 악용했다는 것이다. 남북 적십자 회
담을 하면서 땅굴을 팠다고 북한을 비난했던 그이지만, 남북 대화를 한다면서
유신 헌법을 통하여 영구집권을 획책한 그가 아닌가.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
다 각종 간첩단 사건을 날조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매장시키고 자기의 정치 생
명을 연장해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장기집권을 위해 동서분열을 조장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
이다. 71년도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영남과 호남의 갈등은 훨씬 덜했다는 것
은 각 지역에서의 득표율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대중 후보에게 위
협을 느낀 그는 그 때부터 노골적으로 지역 차별을 일삼아 지금과 같은 동서분
열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남북으로, 동서로, 그는 장기집권의 희생양으로 통한
의 민족분열을 더욱더 고착화시킨 것이다.
내 생각에 그가 18년간 이 나라를 통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단
히 불행한 일이다. 그 불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의 뒤를 이은 두 대통령은 지금도 천문학적 돈을 국민으로부터 횡령하고도 아
직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은 채 오히려 정치인들을 한 수 지도하고 있다. 그의
18년 독재가 잉태한 대표적 비극의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생각만 하면 정
말 속이 메스껍다.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패와
권위주위적 사회상이 그의 독재 후유증이라고 진단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다카키 마사오 기념관을 만들고 있다. 여론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공개적인 기공식도 하지 않은 채, 지난 2002년 1월부터 비밀리에 공
사가 진행되고 있다. 정치적 이유가 가장큰 목적이겠지만 온 국민이 축복하지
않는 기념관을 몰래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일까? 독립운동에 피를 뿌린 선열들께
서 이 모양, 이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설마 기
념관 앞에 다카키 마사오가 말을 타고 일본군 장교 복장으로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형상화 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박정희는 내가 열거한 위의 사실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기성세대 국민 중의 80%가 그를 존경한다는 어느
신문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며, 이 땅에서 지식인이라고 대접받는 조선일보의
조갑제, 이화여대 교수이자 표절작가이면서도 학연 - 이인화는 이어령의 대학
후배이며, 이인화를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채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
도 그였고 이어령은 또한 이상 문학상 심사위원이었음. - 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인화 등의 박정희 예찬론을 읽으며,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
다. 하긴 그들은 박정희를 미화해야만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입지가 유리할 것
이다. 마치 공화국을 끊임없이 바꿔가면서 영원한 2인자가 되어 평생 권력을
누리는 김종필처럼 말이다.
내가 공부가 부족한 탓일까?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내가 생각하기에 다카키
마사오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없어야 좋았을 인물이라는 확신에 변함이 없다.
따라서 평범한 국민들이 박정희 아니, 그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이름 다카키 마
사오에 대한 존경심을 그만 접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훌륭한 위인들이 계시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