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영화를 알아?'
번호 49744 글쓴이 초모룽마 조회 4224 누리 1612 (1637/32) 등록일 2007-8-8 15:53 대문 29 톡톡 0
“...예상외로 많은 네티즌들, 그리고 관객들이 그 애국심 마케팅에 굉장히 호응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것이 바로 기존 평가들과 좀 엇갈리는 부분입니다...”(강유정)
“...감독이 영화를 자기 것으로 사유화(私有化)시키는 것은...코미디...다...영화만을 가지고 판단하게 해야지 내셔널리즘을 동원하는 마케팅은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본다...”(원동연)
“...당신은 잘못 보았어요, <디워>는 유치해요. 관객님들, 수준을 높이세요, <디워>는 300억짜리 <우뢰매>랍니다. 300억...? 돈 낭비예요...”(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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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영화‘평론’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소위 먹물 좀 먹고 영화깨나 보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는 것 같다. ‘니들 영화 보는 눈과...우리 평론가들이 보는 눈이 같니? 니들이 영화를 알아?’
근데, 네티즌들은 평론가들의 일장 훈시에 대해 ‘놀고 있네!’라고 대꾸한다.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가 2,373명의 네티즌을 대상으로 <디워>의 최종스코어를 묻는 설문조사 결과 44%가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고, 개봉 첫 주에 총 295만3006명을 동원하여 최고기록을 깼다고도 한다. ‘애국심’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수준 낮은’ 누리꾼 관객들이 평을 쏟아 낸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사라진다. 누리꾼들은 충무로 평론가-영화인들(이하 통칭 ‘충무로들’)을 평론한다.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등진 건 스크린 쿼터 폐지도 헐리우드 영화의 공세도 아닙니다...조폭물이 하나 성공하면 재탕 삼탕해 가는 사이에 사람들은 질렸던 것입니다...몇 달 만에 너무 가볍게, 쉽게 만든 그런 코미디물(과 조폭영화)에 7천원을 쓰느니...위대한 한국영화인들 당신들이...그렇게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디워>를 보겠습니다...10년 가까이 노력으로 만든 <디워>를 보겠습니다. 아... ‘4글자 감독’님...당신만이 진정한 예술인인양 하지 마십시오...고상한 척하지 마십시오...결국 당신도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는...한 인간일 뿐입니다”
어느 네티즌의 글이다. <디워>에 대한 충무로들의 ‘비판’을 반비판한 것인데, 그만 핵심을 찌르고 말았다. <디워>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이제 형국은, 충무로들의 실체, 그들이 ‘너무 가볍게 만들어내는’ 영화들의 실체를 파헤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충무로들이 발끈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영화가 참 거시기하다는 평론가들 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악다구니를 쓰는 애국애족의 벌거숭이 꼬마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한 여름의 공포다.”(‘4글자 감독’)
사태는 이제 엉뚱하게도, 4글자 감독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충무로들이 끝내 감추고 싶었던 영역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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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이제 사람들은, 충무로들에 실망을 거듭하고 그들의 진상을 알아차린 나머지, 그들이 하시는 거룩한 말씀(평론)을 들은 척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아한 문장과 난해한 단어를 동원하여 평론 해대는 이들 주류 영화인들이 사실은 조폭과 삼류 코미디 영화가 값싸게 판치는 충무로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문가 뺨치는 네티즌 관객들에 그들의 설교가 통할 리 없다.
이것은, 충무로들에게는 당장 밥그릇 문제다. 어느 4글자 영화제작사 대표는 심형래에게 “...영화 잘 만들어서 그걸 매개로 승부하라...겸손해지기를 바란다.”고 충고했는데, 그는 ‘스크린 쿼터’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라 한다. 스크린 쿼터는 또 다른 중요한 밥그릇이다.
“애국애족의 벌거숭이들”이라고 욕하는 이들은 스크린 쿼터 자체가 극히 반시장적, 애국주의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눈 감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문제되는 것은 ‘애국적 마케팅’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들은 진짜로 “‘애국’ 때문에 ‘영화’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들은 “벌거숭이들은...한 여름의 공포” 운운했는데, 이 말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제 자신들이 하는 말을 사람들이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은 밥그릇 내지 권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순혈’ 충무로들을 위해 ‘어떻게 영화계에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이단이자 짝퉁 심형래는 실패해줘야 한다. 그대로 나뒀다간, ‘영구’는 그동안 조폭물 우려먹으며 세계 9위의 영화시장을 편안히 주물러왔던 충무로들에게 위협적인 쓰나미가 될 수 있다.
누리꾼들에게 심형래와 충무로들의 차이는 분명하다. 영화를 제대로 공부한 엘리트들과 바보역할 코미디언 전문 출신 감독은 다음과 같이 비교된다.
- 심형래 : 공룡쭈주 → 용가리 → 디워
- 충무로 1 : 조폭마누라 → 조폭마누라2 → 조폭마누라3
- 충무로 2 : 가문의 영광 → 가문의 위기 → 가문의 부활
그들은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 심형래에게서 최소한 한국형 SF 영화를 개척하려는 도전정신을 봤다. 네티즌들은 그놈이 그놈이고 그 영화가 그 영화인 충무로들의 무사안일, 특히 평론가들에 분노하는 것이다. 충무로 어려운 것 이해하는 데... 그렇다면 평론이라도 제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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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를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스토리다. 맞다. 스토리는 참여정부 출범부터 지금까지 봐왔던 수구꼴통류와 새로운 정신 노무현과의 충돌 양상과 매우 비슷하게 흘러간다. 고졸대통령·개혁네티즌 대 선간위·좆중동·민노진보류의 대결 말이다.
충무로들의 ‘스크린 쿼터’ 삭발 쇼와, <디워>에 대한 ‘평론’은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배운’ 평론가들의 난해한 평론은 무시되고 ‘못 배운’ 관객들 사이에 구전되는 영화‘평’이 이제 어떤 영화를 ‘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2002년 “정몽준마저 (노무현을) 버렸으니...” 알아서 하라는 좆선의 훈계를 무시해버렸다. ‘정식 코스를 밟지 않은’ 노무현에 대한 평은 인터넷에서 구전되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소통되는 관람소감은 종이신문의 전문적 평론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충무로들의 난해한 언어는 그들 영화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한다. 여기에는 ‘내가 훌륭하게 평하는 영화만 봐라’는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 권력이 무너질 판이다. 마찬가지로 좆중동의 ‘근엄한 언어’ 뒤의 장난질들이 까발려지고 있으니 좋았던 시절은 이제 가고 없다. ‘자전거’로 쌓아올린 권력이 인터넷으로 무너지고 있다.
네티즌들은 이제 누가 섹시한 제목 뽑아 장난 잘치나?를 오랜 경험으로 알아차렸다. 가령 “정부 통제력 상실...탈레반과 끝없는 보복전”이라는 제목이 떴다 하자. 사람들은 이게 좆선이 30년 애독자 모지리들에게 “...무능한 참여정부...”를 각인시키기 위해 창작해 낸 것인 줄 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좆중동에서 왜 박근혜는 항상 웃는 얼굴로, 대통령은 5년 내내 굳은 인상이나 고개 숙인 얼굴로 나오는지 안다. 좆중동은 보통 명사로 불리고 있으며, 칼럼과 사설은 잡설로 치부된다. 일반 기사도 예외 없다. 좆선 방성수의 ‘대우 개발한 미얀마 가스전 중국에 가스 구매권 빼앗길듯’과 무놔 이미숙의 ‘정말 필요한 배일까’ 등 찌라시 창작소설은 올라오자마자 전문가 네티즌들에 의해 일일이 해부된다. 이제 조작질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권력이 삐걱거린다.
좆중동이 자랑하던 ‘의제 선점 능력’도 바닥이 드러났다. 대통령만이 유일하게 굵직한 의제들을 내놓고 있으며, 그네와 명바기에 대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이너’ 신문들에 끌려 다니고 있다. 이럴 때는, 특기인 안보장사질 하면 의제 설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데 요즘 같은 남북 화해모드에서는 이것도 영 불황이다.
이때 탈레반 인질 사건이 터졌다. 이 복잡미묘한 사건에 대해 ‘할 말을 한다.’는 좆중동은 완전히 스탠스를 잃었다. 기독교, 이슬람, 대형교회, ‘테러리즘’, 미국, 중동문제 등등이 얽히고설켜 대놓고 “특전사로 응징하자”고 주장할 수도, “참여정부 뭐하냐”고 일방적으로 깔 수도,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자”며 빨 수도 없는, 정말 엿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현지에 특파원이라도 파견하여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면 그래도 사태를 ‘주도’할 수 있으련만, 웬일인지 좆중동 기자 나으리들이 하는 일이란 ‘묻지마’ 수준의 외신 번역뿐이다. 오보가 양산된다. 가뜩이나 형편없는 신뢰도가 더 깎인다.
(그들이 특파원을 아프간에 파견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평소에는 그렇게 정부 말을 개좆같이 알더니 ‘아프간 여행금지’ 권고라는 정부의 지침에는 순한 양처럼 따르는 이유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깐? 아프간에는 편히 기자질 할 수 있는 기자실이 없어서? 우리의 ‘일등신문’ 좆선은 언제쯤 이름난 ‘종군기자’를 갖게 될까. 기자협회는 현지 ‘한국 기자’는 찾아볼 수 없는 게 ‘부끄럽다’면서 이것도 정부 때문이라고 거품 물고 있다. 오지랄. 군대 파견되고 선교단체 들락날락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못나간다고 지랄하나)
선간위도 마찬가지다. 선간위는 ‘180일전 지지 또는 반대 글 금지’ 삽질로 급기야 ‘나를 고발하라’는 네티즌의 불복종 운동까지 불러들이게 되었다. 헌법기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시대에 뒤져있는 모습을 스스로 드러냈다.
선간위는 2002년의 ‘네티즌에 의한 대선’이 재연될까 우려하는 수구세력들의 두려움을 성급하게 커밍아웃했다. 그러면서, 헌법기관으로서 신뢰도가 똥 되는 것도 불사하고, 선거법을 해석할 수 있는 무소불위, 유일무이의 권력을 (자신들만) 가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렇게 되면 특히 2002년과 달리 선거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
선간위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달라는 네티즌과 대통령의 빗발치는 요구에 대해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답함으로써 그 의도를 분명히 했다. 즉, 지들 꼴리는 대로 해석하겠으니 네티즌들은 알아서 사전에 자기 검열하라는 것이다. 자기검열처럼 무서운 것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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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의 수확 중 하나는 민노류의 진면목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진보’라는 우아한 단어 뒤에 숨은 이들의 진짜 모습은 충격이었다. 예를 들어, 민노단은 진보적이라 평가되던 전효숙의 헌재소장 임명동의 표결조차도...딴당과 함께...놀랍게도 거부했다. 사사건건 참여정부 발목 잡는 데 딴당과 민노단이 따로 없었다. 민노단이 그랬던 것은, 아마도, 참여정부가 진보적 의제를 (부족하게나마) 선점하는 데 대한 두려움, 즉, 권력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진보류의 두려움은 진보의 ‘수장’이라는 최장집과 한겨레의 노무현 비판에서 확 드러난다. 최장집은 “오늘날...가장 큰 문제는 견제되지 않는 대통령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정당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며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퇴행을 거듭해왔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최장집과 동시에 외친다. “여론이 지지하지 않으니 접는 게 순리다”, “남들이 그렇다니 그런 것이다”.
이게 소위 진보들의 노무현 씹는 방식이었다. 노무현 ‘포퓰리즘’ 비판에 포퓰리즘을 동원한다. 대의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여론이 지지하지 않으면 접는 게 순리다. 남들(좆중동)이 무능한 정부라고 하니... 그런 것이다. 민노진보류의 시선은 ‘무조건 선’인 1987년에 딱 고정되어 있다. 독재와 반독재의 이분법적 세상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불안하다. 독재와 반독재를 규정하는 것은 ‘정통세력’인 자신들만이 가능하다. 자신들만이 그 독재와 싸울 권리가 있다.
그들이 보기에 그 근본이 불명확한(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고, 얼떨결에 권력을 잡은) 참여정부는 그저 ‘노동자의 피를 빨아 미국에 팔아넘기는’ 신자유주의, 회색정부일 뿐이다. 참여정부가 이렇게 규정되어야 자기들 밥그릇이 지켜진다.
자칭 ‘진보’가 이러할진대 원조 수구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에게 노무현이 한 일, 작전권 회수되었던, 사학법 개정이든, 과거사 청산이든, 국토균형발전이던... 그것들은 하나같이 밥그릇 빼앗는 것들이었고 추악상이 까발려지는 것들뿐이었다.
이에 총궐기한다. 오른쪽들은 탄핵카드를 꺼내들었고, 왼쪽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아주 오래된 익숙한 방법으로 저항한다. 오른쪽은 한기총과 좆중동이 나서고 민노단은 빨간 투쟁복이다. 그들이 잘나갔던 시대, 그때 통했던 정신, 그때의 권력유지 방법은 (노무현이 등장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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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든 어느 곳이든 구질서는 그 질서를 깨뜨릴 것이 분명한 어떤 ‘이단’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리하여 똬리를 틀고 앉아 새로운 진실과 시대정신을 무력화시키거나 은폐하려 한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고 해서 교황이 그의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종신형을 받는다. 중세의 신학적 권력질서는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겼다. 다윈의 “인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해왔다”는 주장, 포이에르바하의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 따라) 만든 신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기존 질서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구질서들이 두려워한 것은 하느님의 뒤에서 “땅에 발을 딛고 선, 기존 질서를 뒤엎을 수 있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아무 문제없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 같이 보였던 자본주의의 모순을 마르크스는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그들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철학자’를 유럽대륙에서 추방함으로써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을 감추려했다. 막스 베버는 “기독교적 소명의식”으로 이 모순을 덮었다.
2002년 이후 좆중동은 ‘경박한’ 대통령 노무현을 씹었다. 그들의 일치단결된 자못 근엄한 언어와 훈계 뒤에는 자신들의 통제밖에 선 대통령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노무현은 그들에게 이단이었고 충격이었다.
심형래도 그랬다. 그래서 충무로들은 “원래 한참 상영 중인 영화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는 상도 또는 관례를 깨고, 평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히 악담을 퍼붓는다. 심형래가 자기들 그룹에 있었더라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 많은 평론들 중 다음 것이 아마 가장 진실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타 캐스팅과...웰메이드를 내세운 여타 한국영화들보다 엉성하고 투박해도 한 우물을 파는 심형래 감독의 <디 워>가 더 의미 있는 작업으로 느껴진다. <디 워>가 극복해야 할 것은...빈약한 스토리가 아니라, 개그맨 심형래에 대한 선입견과 외부인을 타자화하는 영화판의 풍토인 것 같다...” (서정환)
*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렬렬히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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