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내용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가까운 동료의 실화다. 재구성하면서 기분이 매우 착잡했슴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요즘 객장이 왜이리 시끄러워? ”
칼국수를 집던 젓가락을 멈추고 유차장이 나를 빤하게 쳐다 보았다.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그럼 자네말고 누가 있는데?”
정달호 원장이 객장에 나타난 것은 2001년 초여름 무렵 이었다. 선천적으로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그는 180정도의 키에 머리와 상체의 크기가 평상인의 배는 돼 보였다. 목소리도 컸지만 두세명의 함께 다니는 사람들과 쉬지 않고 이야길 나눴다. 당연히 다른 고객들로부터 불만이 나왔고 담당자인 유차장은 정달호 원장 일행으로 인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다가 정원장이 주식으로 몇 억을 벌었으며, 투자의 귀재란 소문이 나면서 객장의 고객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불만의 소리는 많이 줄었으나 오히려 객장은 더 시끄러워졌다.
“정원장이 투자를 얼마나 해?”
“ 2억 정도하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은 2,3천 정도씩 하고. 왜, 인사시켜줄까?”
“그 사람이 그 돈 주식해서 번거래?”
“ 그렇다나 봐. 같이 다니는 사람들 돈도 사실은 정원장 돈이라던데…”
정원장의 행동거지들은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화 되어갔다. 이따금씩 객장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보였다. 그와 말다툼을 했거나 드러내놓고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한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언제부터인지 객장에서 그 모습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유차장이나 지점장도 더 이상 정원장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것 같았다.
“ 조차장님, 저녁때 우리 소주나 한잔 합시다.”
“ 글쎄요. 저녁에 좀…”
“ 아니 뭐요. 도데체. 처음두 아니구 나 같은 사람은 상종하기 싫다는 거요 뭐요?”
언젠가 처럼 그가 다시 내 앞으로 와서 갑작스럽게 술자리를 제안했다. 사실 그와의 술자리가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방적으로 혼자 떠드는 스타일에 걸핏하면 목소리가 커졌다. 그와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사람들 같았다. 비록 그가 지점의 고객이라 할 지라도 내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 뒤 따라온 유차장이 내게 눈짓을 했다. 그냥 따르라는 의미였다
“ 그럴리가 있나요. 알겠습니다. 제 약속을 미루면 되죠 뭐.”
그날 저녁, 지점장을 포함한 10여명의 술자리가 벌어졌다. 지점 인근의 제법 비싸다는 소 갈비 집 이었다. 지점장도 별로 내키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나와 비슷한 처지로 나온 듯 싶었다. 원래 정원장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 이외에 새로 합세한 듯한 손님 두셋도 함께였는데 정원장 비슷하게 목소리가 큰 신여사가 합세한 것이 특이했다. 그녀는 정원장들에게 가장 불만이 많던 고객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약소한 자림니다만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점장님도 어려운 걸음해주시고 점잖으신 조차장님도 선약을 뿌리치고 이렇게 참석해주셨습니다. 뭐 그렇게 비싼 건 아니지만 원 없이 드십시오. 우리 유차장님이 제게 돈 많이 벌어주기로 하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함 쏘겠습니다.”
정원장이 뒤뚱거리면서 인사를 했고 박수세례가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건배제의가 이어졌고 고기 굽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들 속에서 밤이 깊어갔다.
“조차장님은 가지 마시고 이따 저하고 한잔 더해야 합니다.”
술자리가 얼추 익어가고 있을 즈음, 정원장이 내게 와서 이야기 했다.
“뭐야, 우리 원장님은 왜 조차장만 좋아하는 거야?”
어느새 술이 좀 오른 유차장이 술잔을 들고 내 쪽으로 왔다.
“ 조차장이라니, 유차장은 위아래도 없는가? 내 알기루 한참 형님 일텐디?”
전혀 뜻밖의 말이 정원장의 입에서 나왔고 유차장은 갑자기 머쓱해졌다.”
“ 원장님 말씀이 맞잖아. 앞으로 형님이라고 부르라구..”
신여사와 기분좋게 대작을 하던 지점장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정원장을 거들었다.
기실 유차장이 나보다 두살 아래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직급이 같은 동료들끼리 존댓말을 쓴다면 그것이 더 어색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식사 겸 술자리가 끝나고 정원장이 술자리 계산과 함께 슬며시 수표 몇 장을 유차장에게 주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의 2차를 부탁하는 것 같았다. 정원장이 뭔가 내게 단단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됐어, 자네들은 조금 있다가 부를 테니까 좀 나가 있드라구.”
정원장과 내가 간 곳은 갈비 집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조그만 단란주점의 룸이었다. 아가씨들을 내보내고 정원장은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 조 수 현 ”
뜻 밖에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 나왔다.
“ 잘 봐라. 니 나 모르겄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목포 중앙국민학교 4학년 5반, 담임이 박진훈이었던가?”
잠시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정원장이 나하고 동창이라도 되었던가!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서울로 전학을 왔던 사실을 순간적으로 되새김한 것 이외에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너야 뭐 생각날 것이 있겠냐. 30년도 훨씬 전의 일인데…”
“ 그때 한 반이었던가?”
“ 한 반이었지. 자네가 반장을 했고 내가 미화부장인가를 했었지.”
정원장은 담배를 빼어 물면서 눈을 가늘게 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치 엉킨 실타레에서 매듭을 찾아내는 것처럼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찾아낸 미화부장은 정지환이라는 작은 체구에 성격이 차분하면서 손재주가 좋은, 그러나 다리가 좀 불편해서 이따금씩 어머니의 등에 업혀 등교를 했었던 그런 소년이었다.
“지환이는 내 어릴 적 이름이고, 2학기 때 갑자기 서울로 전학 간 자네를 우린 무척 부러워 했었지. 한번은 우리 반 전체가 자네에게 모두 편지를 쓴 적도 있었어.”
맞다. 그랬었다. 70여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온 적이 있었다.
“네가 기억할 런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 아버지가 월남에 있었지. 그 해 전역해서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집에서 레이션을 먹던 생각이 났다. 한 달에 한 두번 그의 집으로 집채만한 나무 상자가 배달되었고 그 안에는 TV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국방색 깡통, 비닐종이들로 포장된 레이션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무 상자가 오는 날, 그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우리는 그의 집에서 나올 때, 한 두개 이상씩의 깡통이나 종이 포장을 그의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곤 했다. 영어 단어를 몇 개 알고 있던 덕에 귀한 소고기 통조림을 고르고 자랑스러워하던 기억도 났다.
“네가 올라간 이듬해 나도 서울로 올라갔지. 그러나 아버지는 우릴 만나주지 않았어.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빠서 그렇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우릴 버린 거였지.”
그때 남자 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뒤이어 키가 작고 나이기 들어뵈는 마담이 정원장의 옆으로 들어와 앉았다.
“ 두 양반이 무슨 역적모의 하시나 봐. 술도 안 시키구 이쁜 우리 언니들도 안 부르고…”
내가 뭐라 할려 하자 정원장이 손을 내저었다.
“ 어차피 술 먹으러 왔는데 술이나 마시자구. 새털 같은 날들인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아야지 안 그래 친구?”
그의 어머니는 결국 남편으로부터 합의금을 받고 이혼을 했다. 그리고 정릉쪽에서 집을 얻어 아들과 둘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중3이 되었을 때, 화장품 행상을 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버리고 재취를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빗나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술, 담배를 시작하고 동네 양아치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지만 그의 명의로 된 집이 있었기에 소아마비를 앓는 약한 소년임에도 양아치들이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몸을 만들기 위해 그들처럼 돼지 비계를 많이 먹었는데 그때 몸이 지금처럼 비대해졌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그도 우연히 어떤 친척의 영향을 받아 검정고시를 공부했고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은 혹독하기만 했다. 대학 졸업장이 있음에도 그는 소아마비와 비대해진 외모 탓으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포장마차도 했고 장애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려해주는 시내버스 토큰 판매대에서 토큰 장사도 했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자살도 몇 차례 시도 해 보았다고 했다.
그의 삶에 볕이 들기 시작한 건 몇 년 전 우연히 교회에 다니게 된 이후였다. 교회의 목사가 소개를 시켜주어 우연히 고3학생 과외를 하게 되었는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합격을 했고 그의 부모가 감사의 뜻으로 준 오천만원을 가지고 보습학원을 차리게 되었다고 했다. 교회를 통해 수강생이 늘어났고 그의 학원은 번창했다. 십일조와 관련해서 목사와 다툼이 있었고 교회를 옮겼다. 그러다 그 교회마저 나가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학원도 거의 접은 상태라고 했다.
“조차장,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다음 날, 전일의 과음 탓인지 점심시간을 넘겨 지점에 나온 정원장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전일 그와 내가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임을 확인했어도 스스럼 없이 대하기는 왠지 어려웠다.
“괜찮아. 또 술 마시게?”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후에 그와 함께 나간 곳은 인근의 호텔 커피 숖 이었다. 미모의 젊은 여인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을 할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결혼식 때 꼭 와야 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떠있는 듯한 정원장과 왠지 차가운 느낌이 드는 여자,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미녀와 야수의 그것을 연상시켰지만 왠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 정원장이 옵션매매를 시작했다구?”
“ 음, 한 일주일 됐어. 처음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손절매도 잘 하던데 뭘.”
다음 날, 점심 시간이었다. 유차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나는 왠지 불안감이 들었다. 물론 전문적으로 옵션매매만을 잘 하는 투자가들도 있었지만 정원장의 투자패턴은 옵션 매매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주식투자는 상하한가라는 것이 있어서 손실,혹은 이익률이 제한적이지만 옵션이나 선물은 주식과 비교할 때 그 폭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전문가들도 투자금액의 일부분만을 헷지 형태로 투자하는 것은 그 리스크가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전적으로 감에만 의존해서 속된 말로 몰빵을 해대는 정원장의 투자 행태가 옵션매매에 적합할 이유가 없었다.
“ 얼마나 하는데?”
“ 주식 하던 거 다 옮겼어. 한 2억 될 거야.”
유차장과 지점장이 최근 정원장에게 더 고분고분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옵션매매 수수료 탓이었다. 그가 하루 지점 수익의 절반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에 대신에서 장기철이 하고 같이 했던 고향 선배가 코치 해주고 있어. 주식보다 훨씬 낫던데 뭘.”
의외로 그는 담담했다.
“돈이 좀 되는 것 같아서 나 말고도 몇 사람 더하지.”
그는 일행들에게도 옵션을 권유한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옵션에 올인 한 사람치고 결과가 좋은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투자였다. 내가 간섭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선배의 조언 탓이었는지 그들의 옵션투자는 비교적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후로도 한두 차례 그와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여객기가 무역 쎈타의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고, 연이어 110층짜리 건물이 주저 않던 악몽 같은 9.11테러가 터진 것은 그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주말에 9.11이 터졌고 월요일 객장은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지수가 50포인트 이상 하락했고 콜을 보유한 선물옵션 투자자는 그야말로 깡통을 찼다. 풋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500배의 수익도 냈다는데 지점에 그런 고객은 없었다.
정원장은 아침에 잠시 보이더니 자취를 감췄다. 내가 본 정원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후들어 정원장을 찾는 고객들이 유차장 앞에 모여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썰렁해진 객장, 시끄럽던 고객들은 자취를 감추고 그 후로도 한동안 객장은 그렇게 비어 있었다.
내가 정원장의 소식을 들은 것은 이듬해, 내가 일산으로 오고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기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유차장도 그 무렵 신설 증권사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오랜만에 유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정원장 소식 알어?”
뜬금 없이 유차장이 정원장 이야길 꺼냈다. 그래도 유차장과는 연락이 있었던 것 같아 내심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퍼득 스치고 지나갔다.
“그 친구 장가가는 모양이군. 전에 아가씨를 본 적이 있지.”
“무슨 소리야. 그 친구 죽었어.”
“죽었다구?”
“작년 9.11때 옵션 하던 거 깡통 나고, 사채업자 돈을 썼대나 봐. 어디서 옵션을 계속했던 모양이더군. 돈 갚을 길이 막연해져서 자살한 것 같아. 자네한텐 돈 꾼 거 없었어? 난 천만원이나 빌려줬는데….”
“……”
“ 옵션으로 이억 날린 게 내 탓인가! 작년 말에 나한테 와서 아주 협박을 하더구먼. 자기 때문에 인센티브 받은 게 얼만데 가만있느냐는 거지. 그 인간 완전히 깡패야. 식구들 보고 있는데 자해까지 하더라니까. 안 주고는 배겨날 수가 없더군. 이봐, 듣고 있는 거야? ”
나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원망스러운 세상에서 그가 찾은 출구는 증권시장이었다. 돈도 벌고, 친구도 찾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9.11과 함께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9.11이 없었다면 그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무모한 투자가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설령 일시적으로 돈을 벌더라도 이어지는 투자에서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 시장의 생리다. 9.11이 그의 투자기간을 단축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까지 바꾼 것은 아니었다. 증권시장이라는 출구가 그의 과도한 기대와 무모한 투자행위로 인해 영원히 그를 세상과 격리시키는 폐쇄된 문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