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동창회의 뒷자리에서 좀 일찍 일어나는데, 누군가 글을 올려보란다. 여기에 많은 글들이 올라오더니 요새는 영 없다. 습관이 되어 들락거리는데 새것이 없으니 좀 심심하다. 친구의 부탁을 용기삼아 그저 칸 하나 늘려본다는 생각으로 끄적거렸던 것 하나를 울립니다. 재미도 없고, 주제도 없고, 양만 좀 됩니다. 심심풀이로 여겨주시고, 뭐 욕도 꺼리가 있어야 하는 법 아닙니까?>
제법 세찬 비가 쏟아진 뒤의 공기가 너무 좋다. 싱그러운 잎사귀의 향기까지 어우러져 새로 지은 듯이 깨끗하다. 한껏 숨을 들이키는 것으로도 만족스럽다. 어둠이 깔리면서 그 정취는 더 말할 나위없다. 간간이 보이는 별빛은 맑은 하늘의 보석이다. 이 풍치에 짓눌려서인지 세상이 조용하다.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해맑다. 느끼지 못할 정도의 바람은 참으로 제격이다.
10여 일의 중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소주에서 5일을 머물렀다. 소주는 언제나 고향과 진배없다. 익숙한 친구들이 있어서도 그러거니와 소주 그 도시가 갖는 문화적 전통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엔 오나라의 도읍지였다. 아래 항주는 월의 도읍지였고, 남송의 중심지였다. 남방문화라고 하면 항주와 소주를 가리킨다. 그 사이 커다란 호수인 태호는 바다만큼이나 넓다. 어디를 가나 전통적인 문화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중국에 가보기 전부터 우리는 이곳을 배워왔다. 관념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어 그리 이국적이지 않다.
문화적 사치가 극에 달하여 손가락으로 건들면 그 기름기가 끈적하게 묻어날 것 같다. 도시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많은 정원들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오나라 시대의 여러 유적들이 남아 있어 머릿속의 상과 맞춰보며 들여다보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름을 떨친 명망가들의 작품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재미의 내용을 더한다. 벌써 스무 번에 가깝게 찾았다.
중국의 여자로서는 항주와 소주 출신이 좋다고들 한다. 4대 미인 중의 하나가 항주에서 나서 소주에서 지냈다. 오나라의 서시를 가리킨다. 전국시대의 일이다. 그 후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과, 양귀비, 왕소군 등이 그들이다. 항주의 아가씨는 모택동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 미모의 비결은 여기의 지형적 특징에서 비롯되었다고 들먹거려진다. 수향이라고 이르듯이 물이 많은 지역이라서 피부가 다른 지역의 아가씨들에 비해 보드랍단다. 그렇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피부보다도 자그마한 체구에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한 허리를 보면 언제나 춘심이 돋는다. 치파오를 입고 이호와 고쟁의 간들어지는 음률에 맞춰 가녀린 허리를 살살 흔드는 모습을 보면 정말 미친다. 문향이 문들어져서 흘러내리듯 여기 아가씨들의 자태는 그 문화에 걸맞다. 모든 문화에 등급과 수준이 있듯이, 관능에도 등급이 있다. 최고에 이른 소주의 관능에 접해서는 누구나 삶에 강한 애착을 드러내고야 만다.
며칠 동안 정원과, 성곽, 음식, 시와 그림, 여인네의 향기에 젖어 있다가 아침 일찍 남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남경을 거쳐 안휘성 합비가 목적지다. 도시를 벗어나자 수평선으로만 이루어진 벌판이 확 터져 들어왔다. 간혹 호수들이 나타난다. 어김없이 이곳의 특산물인 게를 기른다. 가을의 별미로 일컬어지는 상하이 게가 바로 여기에서 난다. 양징호에서 나는 것을 이른다.
우리의 참게보다는 크고, 꽃게보다는 좀 작은 통통한 모양의 그 맛이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음력 9월에는 암컷을, 10월에는 수컷이 제맛이란다. 그 명성이 자자해져 소비가 늘어나, 이곳 사람들의 주요 생활원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양징호, 또는 상하이 게 축제가 전국 전역의 유명 호텔 식당에서 벌어지곤 한다.
하염없이 너르기만 한 벌판엔 황금의 색이 완연하다. 밀이 노랗게 익었다. 연약한 밀대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의식적으로 심은 포풀러가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이젠 가도 가도 그 모양이다. 흰 벽에 회색의 기와, 밀밭, 호수, 썰렁한 고속도로. 희뿌연 안개가 그리 짙지 않게 드리워져 막막한 광야의 한계를 막는다.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공간의 범위는 분에 넘친다.
늦은 봄 벌판의 주인은 역시 밀인 모양이다. 고정된 채로의 나머지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객에 의해 역할을 달리 한다. 밀에서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나는 객의 눈요기를 위한 밀이 아니다. 하기야 그럴 것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4월의 유채에 비하면 더 묵직하다는 말이다. 삶의 집착이나 애환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먹어야 살지 않겠는가.
5월이 밀밭은 예보다는 산동이 볼만하다. 동쪽 청도에서 황하 가의 제남으로 내달려보라. 옛 제나라 땅덩어리 안이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다섯 시간여 달려도 산은 보이지 않고, 오직 밀밭뿐이다. 간혹 우뚝 작은 돌출물이 혹여 산인가 싶지만 그건 산이 아니고 옛 무덤이란다. 그 시대엔 한 가락 했을 만한 인물들이 그렇게 산을 이루고 누워 있다. 오직 평평한 광야에 노랗게 익은 밀밭은 장관을 이룬다. 우리의 가을 들판의 색과는 좀 달라서 황금색이라고 하기는 힘들더라도, 나름대로 빛을 띠고 있다. 꼬질꼬질하게 땀에 쩔은 누추한 농부와 밀밭에서는 단순히 관광꺼리 이상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여기 남경을 뻗은 도로변의 광경이 유사하다. 그러나 선입관에서인지 여기 밀에서는 그래도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먹을 것이 많은 지역이라서 그 절박함이 덜하다. 그냥 눈요기로 삼아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유채를 언급할 수 있다. 여기는 역시 유채의 빛이 자리를 해야 경지에 이른다 할 것이다. 드넓은 벌판에 상당부분이 노란 꽃으로 꾸며져, 흐릿한 안개와 회색의 집과 같이 눈에 넣으면 가장 단순한 수채화가 그려진다. 안개로 원색이 가려져 마치 노련한 화가가 간색으로 솜씨 좋게 그려낸 작품과 꼭 같다. 지평의 선과 하늘의 선이 일직선으로 맞붙은 펑 뚫린 길을 130의 속도로 내달리면서 맞는 시야는 온통 그림이다. 눈길을 멈출 수 있는 데가 없어 다소 허망하지만 환각에 사로잡히기엔 제격이다. 가도 가도 그 그림이다.
가을의 단풍을 노래할 때 옛 시인을 그림 속에 있는듯하다고 노래했지만(不知畵圖中), 여기에서는 그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주위의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허나 그림 속에서 내달린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은 그저 상상이 아니다. 노란 꽃과 거칠 것 하나 없는 광야는 그야말로 표현이 어렵다.
미안스러워 하는 말이지만, 밀이 대신한 광경도 못지않다. 그럼에도 자꾸 꽃을 떠오르게 한다. 거두어져 자리에 누운 유채의 빛도 밀과 진배없다. 포풀러의 잎사귀에는 시선을 고정할 수 없다. 주위의 넓이 때문이다. 굳이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한 눈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밀어닥치는 같은 모양의 풍경에 주체를 찾기 힘들다. 오만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꾸 의식하려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다. 그냥 제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모두 맡겨버려야 살만하다. 구태여 뭐 어떻고 뭐 어떻고 나부리지 않은 게 상책이다. 소화도 하지 못할 것을 자꾸 삼키기엔 분명 생물적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같이 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안개가 되고, 꽃이 되어 바람에 한들거리듯 실려 가면 될 것을.
2시간여를 달려 수평의 선이 깨지는 지경에 이르면 거의 남경에 닿는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아트막한 구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평의 가로선이 이제야 너울거린다. 우리 호남의 풍경과 비슷하다. 여전히 평야도 넓다. 도시의 건물이 하나둘 보이면서 여태까지 2시간의 환각에서 깨어날 수 있다.
도시에 진입하지 않고 북쪽으로 내달리던 방향을 서쪽으로 바꾼다. 처음 내딛는 걸음이다. 안휘성이다. 우리에게는 이 성 남쪽에 자리한 황산으로 알려져 있다. 성도는 합비다. 합비는 우리 머리에 아주 익숙한 도시다. 삼국지에 자주 등장한 연유다.
언젠가 와 본 듯한 익숙한 광경이 이어진다. 역시 고속도로다. 높은 산은 전혀 보이지 않은데, 파도의 흐름처럼 넓은 벌판과 구릉이 반복된다. 포풀러는 여기에도 숲을 이루어 끝없이 심어져 있다. 벌판엔 모내기가 한창이다. 몇몇 농부의 움직임은 주위의 풍경에 한 점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언제 저 논을 모로 채울까 하는 걱정이 절로 든다. 그렇게 중요한 일과임에도 참 부질없는 짓거리로 여겨진다. 그냥 끝없이 같은 광경이 이어져 있다. 막힘이 전혀 없다. 구릉, 논, 나무, 밀, 베어진 유채. 4월이 아님이 유감이다. 그럼에도 안온한 정감 때문에 피로를 잊는다. 수만의 병사들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하고, 지루한 전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너른 곳에서의 전쟁이 무슨 의미였을까.
의식 속에 중국의 역사는 전쟁으로 채워져 있다. 기록 이전의 역사에서부터 춘추와 전국시대, 그리고 수많은 이름의 나라들이 부침을 거듭했다. 그럴 때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그 사이사이에 왜 다른 게 없겠는가. 시도 있고, 사랑도 있고, 술도 있다. 알고 보면 복잡할 것 없는 것을 온갖 수사로 꾸며진 글과 생각, 사람들이 있다. 터가 넓다 보니 세월도 길어 보인다. 전설로 내려오는 셀 수 없는 영웅들. 그 자리를 눈앞에 두고, 그 전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 조합하기가 쉽지는 않다.
좀 거만한 생각으로 역사를 대하면, 어떨 때는 전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위에서 아래 물흐름을 내려다보듯이 그렇게 보인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욱 많은 살다 간 사람들까지 그냥 관조의 대상으로만 여겨진다. 세월을 물흐름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지만, 이미 시공을 초월한 신이 되어 시점을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 있다는 면에서 굳이 따질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이지 어찌 신일 수 있겠는가. 제 자리를 잊은 환각의 상태는 그리 길지 않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일상의 모든 것을 긴 시간 초월하기는 어렵다. 그럴 때마다 다소 초라함을 견뎌내야 한다. 하나로 보이는 긴 세월이 버겁다. 모든 사건과 사람과,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숱한 사연들이 스스로의 모습인양 생생하게 인식된다. 살다간 그 많은 사람들의 감정인들 쉽게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것이고, 이게 그거다. 사람 사는 것이 어디 시대가 다르다고 그리 다를까.
저 허허한 공간에 그 많은 전쟁의 실제 주인들을 세워보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오로지 뒤의 명령과 앞의 죽음 사이에 놓인 비상한 촌각을 수시로 접해야 하는 삶의 군상들이 예사롭지 않다. 다른 소속의 사람들을 제압하려는 일상적인 고함소리, 버거운 발걸음,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 피냄새, 대지에 무심하게 꽂히는 햇빛 또는 으슥한 안개. 모두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객이면서도 객일 수 없는 나약한 감상은 그냥 관조하려는 오만함을 짓누른다. 삼국지의 무대에서 새삼스럽게 ‘사는 게 뭔지’를 되뇐다.
종점이 보이지 않는 무논에 한 점이 되어 모를 심는 농부의 움직임이 벌레와 다름없다. 꿈틀거리는 것이 사는 게다. 5월의 태양은 이렇게 맑고, 신록의 빛은 사랑스럽다. 그 속에 같이 꿈틀거리는 벌레 하나는 저 광경을 다 담아내기엔 벅차다. 다만 움직이는 차의 속도 때문에 매양 같지만 그래도 다른 모습으로 밀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 가지 않아 굵은 비를 만났다. 한두 방울이 툭툭 차창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이내 억수가 되어 퍼붓는다. 갑자기 번개가 내리꽂고 천둥이 천지를 뒤흔든다. 주위의 빛마저도 삼켜버렸다. 벌겋던 대낮이 사라져버렸다. 전조등을 켜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성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 이국에서 갖는 죽음의 공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눈앞에 바로 떨어지는 벼락은 보기에 이만한 장관이 없다. 고개를 파묻고 상황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기엔 아까운 별스런 광경이 계속된다. 주변은 칠흑처럼 어둡고, 번개의 빛만이 눈에 보이고, 억수 같은 소나기가 차에 떨어지며 내는 굉음은 계속 이방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내몬다.
갈 수도 없고, 아니 갈 수도 없다. 어쩌다 만나는 다른 자동차로 인해 다소 위안이 삼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낼 정도는 아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130을 넘겨 달리다가 만난 이 속도는 더욱 두려움을 증가시킨다. 그믐에 공동묘지를 지나는 기분과 흡사하다. 이 너른 공간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를 모른다. 세찬 바람까지 몰아친다. 도로 위에 나뒹구는 포풀러 이파리는 이 시간에 주저앉은 사천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몽고 초원에 꽂히는 벼락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두려움에 나오지 못하고 빠오에 몸을 숨긴 채,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초원에 내리꽂는 번개는 정말 볼만하다. 시간을 거슬러 원시의 상황으로 내몰린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예에서도 온갖 문명과 일상을 떠올릴 수 없다. 오직 하늘과 땅, 그리고 내가 있을 뿐이다. 벌거벗겨진 채로 자연 속에 내던져진 미미한 벌레일 뿐이다. 두려움에 떠는.
그러나 여기 안휘성 벌판에서의 벼락은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맑다가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것도 그렇고, 한낮에 일순 칠흑의 밤으로 바뀌어 더욱 그렇다. 시간은 물론이고 공간까지도 가늠하기 힘들다. 천둥소리로 그 옛날부터 수없이 벌어진 전쟁으로 쓰러진 원혼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때의 처절한 전쟁에서와 같이 분노와 회한과 원한으로 사무쳐 아직까지 살아 있는 몇 인생에게 보복이라도 할 듯이, 아니면 뭔가를 하소연하려고 달려드는 것 같다.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이 두렵다.
괜히 무심하게 전쟁을 떠올렸나보다. 그들의 한을 달래줄 수 있는 아무런 권한도 능력도 없는 놈이 제 노름삼아 만지작거렸더니, 되도록 예의를 갖추려는 자세도 가졌건만 일거에 뒤흔들어놓는다. 하늘로부터 허망한 대지에까지 길다란 장대보다도 더 길게 불기둥이 쫙쫙 내리꽂히고, 이어 온 세상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반복된다. 칠흑의 어둠과 세찬 바람, 빈 도로에 나뒹구는 커다란 이파리들. 싱그러운 5월 정취에 잠들어 있던 시커먼 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각기의 사연들을 호소한다. 진즉 분에 넘치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미 오금이 쫄아들어 제 분간도 하지 못한 지경에 빠져 있는 놈에게 뭘 어찌 하란 말인가. 단순히 인생살이의 허망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사치스럽게 시구를 읊는 기분으로 장난을 친 것인데, 등짝이 싸늘하고 정신이 흩어진다.
제나라 귀신, 오나라 귀신, 노나라 귀신, 위나라, 촉나라, 송나라. 위에서 요나라 귀신, 금나라 귀신. 손꼽기 힘든 많은 나라와 그 흥망성쇠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군상들이 낯선 나그네를 참 요란스럽게 맞는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 그리 다를 바 없다는 동정의 심정으로 마음을 전해본다. 두려움도 다소 사그러든다. 그 속에서 몇몇의 얼굴들을 지어내 떠올려본다. 우락부락한 힘센 사내들, 가엾은 표정의 불쌍한 졸병들. 그 와중에도 하늘하늘한 원색의 옷을 휘감은 나긋한 여인네가 그려진다. 두려움과 동정심은 연민의 정으로 옮겨가며 안정을 찾는다.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한 군주의 사랑을 독차지한 서시의 살결과 눈빛, 잘록한 허리를 감싼 하늘거리는 얇은 천의 흔들림, 탐스럽게 피어난 모란의 정원을 살포시 거니는 모습이 아련하다. 사내 중의 사내를 가진 초선은 어떠했을까. 투명한 살에서 풍기는 향내음이 전해오는 듯하다. 무지막지한 전쟁만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 귀신들 중에서도 굳이 찾자면 이러한 여인네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름이 남아 4대 미인이니 하지만, 어여쁜 여인이 어디 이들뿐이었을라고. 역시 세월이나 인생의 무상함은 아리따운 여인네와 같이 상상해야 그 맛을 더한다.
귀신도 뭐 특별히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자신감으로 조심스럽게 수작을 걸어보기도 하고, 예의를 차리기도 하면서, 교류를 시도해본다. 마냥 부질없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또 다른 뭐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하다.
엉금엉금 얼마나 기어갔을까. 서서히 새벽이 다가서는가 싶더니 이내 빗줄기가 약해지고, 도시의 냄새가 풍긴다. 귀신들과의 수작도 끝이 난다. 다소 아쉽기도 하다. 시계를 바라보니 정오에 가깝다. 참으로 진귀한 일을 겪는다. 82년 여름. 고향에서 벼락을 맞고 쓰러졌었다. 주위의 몇 백 년 늙은 소나무도 쓰러져버리는 무서운 벼락이었다. 몇 분을 혼절해 있다가 나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났다. 어인 일인지 나는 살아났다. 그 뒤로 천둥소리만 들리면 밖에 나서지 못했다.
25년이 지나 그 두려움이 다시 떠오른다. 단순히 천둥번개에서의 공포가 아니다. 섣부르게 세상을 가지고 장난칠 일이 아니다.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숱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까. 존재는 인정받지 못하면 참으로 서글프다.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렇다. 소통이라는 단어가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소통보다는 교류나 이해가 더 낫다. 크게 보면 하나이던 것이, 들여다보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세상이다. 귀신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