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불구하고 간단한 글 하나 올렸다가, 잠깐 사이에 이것도 버릇이 된 모양입니다. 마침 정상회담이 열리고 하기에 작년 봄 적었던 개성방문기를 올려봅니다. 좀 팔립니다. 그러나 불구하고.)
개성에 다녀왔습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북한 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단체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의 구체적인 협의를 위해 간 것입니다.
새벽같이 집을 나섰습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입니다. 한가한 새벽길을 내달려 임진각에 도착했습니다. 자유로를 통해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임진강 하구에서 거슬러 올라가는데, 멀리 강 건너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제법 푸른 빛이 감돕니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둥글게 연이어 있습니다. 공기는 예사롭지 않게 맑아서 멀리 송악산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임진각은 추억꺼리 중의 하나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간이 나면 여기를 찾았습니다. 아직 어린 마음이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파고다 공원 옆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던 때입니다. 가슴에 통일이 가득한 데 공부가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혼자 창가에 앉아 북으로 향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기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텅 빈 공간에 외롭게 서 있는 집에 들어가 곰탕 한 그릇을 시켜먹고, 몇 걸음 걸으면 철망의 두터운 벽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 너머의 임진강은 무심할 정도로 한가하고, 한켠에는 분단의 시간만큼 묵은 다리가 방치되어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자아냈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그 임진각을 지났습니다. 일행과의 약속시간에 1시간 빨리 이르렀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주변은 여러 변화를 겪었습니다. 부속물들이 여럿 들어섰고, 주차장은 한없이 넓어졌습니다. 여기까지 이른 통일로가 가장 큰 길이었고,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괜히 향수에 젖은 듯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담배를 한 대 피웁니다. 푸석푸석하게 말라버린 가슴에는 뭔가 감상이 일 듯 하면서도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곧 머물러버립니다. 옛 길 옆으로는 자유로의 연장선이 우람하게 뻗어 있어 옛길은 초라하게 보입니다. 따져보면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새 길을 따라 임진강을 건넙니다. 너무나 쉽게 말입니다.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냥 건너버립니다. 이른 아침의 북녘 공기는 한껏 들이켜도 막힘이 없습니다. 다리를 지나는 승용차처럼 거추장스럽지 않습니다. 이쯤에서야 묵은 가슴도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나무엔 초록빛이 선명하고, 풀잎마저 싱그럽습니다. 이렇게 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 막아놓으면 그토록 아쉽고 그립습니다.
그래도 한 민족의 한 국가라고 출입국관리소가 아니라 출입경관리소입니다. 나라 '국'자를 굳이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 뜻이 갸륵합니다. 절차나 방법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 구역을 지나면 개성으로 이어진 넓은 고속도로에 들어섭니다.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우람한 화물차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군 찦차의 안내를 받아 북으로 향합니다. 처음 들어선 길이라 눈이 아주 바빠집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는 사뭇 환경이 달라집니다. 도로를 따라 철길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는데, 숲이 그치고 맙니다. 나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넓은 구릉은 밭으로 일구어져 있고, 봄보리가 제법 큰 키로 자라 있습니다. 밭이 아닌 땅에는 흰 꽃이 가득합니다. 조팝나무입니다. 개나리와 함께 피는 조팝은 가는 줄기를 따라 흰 꽃이 무더기로 피어납니다. 향기는 이 시기에 피는 꽃 중의 최고입니다. 남에는 이미 져버렸는데, 여기는 한창입니다. 도라산이 어디더라 하고 돌아보는 사이 이내 북쪽 출입경관리소에 닿습니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북에 이릅니다. 인민군과의 대화는 정겹습니다.
안내를 받아 개성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직할시로 알려져 있어 기대를 했는데, 그저 시골길을 지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것이 개성 남대문입니다"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서야 '아! 여기가 개성이구나!' 하고 인식합니다. 언제 와본 적도 없는 곳이어서 이것이 참 모습이거늘 뭔가 헛된 상을 그렸나봅니다. 길거리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갑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상당하고, 손수레를 끄는 사람, 손을 다정히 잡고 히히덕거리는 어린 학생들, 허리굽은 할머니, 인민복을 입는 아저씨들이 눈에 많이 띱니다. 아주 정감이 가는 표정입니다. 어릴 때 보던 시골의 그 얼굴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데, 창밖의 모습은 지금에서야 대한뉴스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전체적인 도시의 색감이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리발소도 보이고, 신발수리소, 과일남새상점, 개성백화점 등등 몇 개의 간판이 눈을 스칩니다. 언뜻 중국의 모습과 비슷하게도 보입니다. 지나버린 남대문을 보고자 억지로 고개를 돌려봅니다.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보다는 작아보입니다. 이층에는 종이 달려 있습니다. 그 주위엔 예전에도 그랬을 것처럼 초라한 집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도착한 곳이 평양고려호텔 개성분점입니다. '평양고려호텔'이라는 글씨보다는 '평양랭면'이라는 글씨가 간판에 가득합니다. 주위를 돌아볼 새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언뜻 보기에 연보랏빛 라일락이 앞에 한창입니다.
몇 시간의 회담을 한 뒤 점심을 준비시켜 놓고, 둘러볼 곳을 청해봅니다. 다들 선죽교가 보고 싶다 합니다. 선죽교의 위치를 물으니, "바로 여깁네다" 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옵니다. 농이겠거니 했지만 이어진 분위기에서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출입문을 나서니 옛 돌다리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선죽교입니다. 사진으로나마 익히 본 모습 그대로입니다. 18세기 정몽주의 후손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모습 그 대로 남아 있습니다. 옆에는 하마비가 있고, 그 옆엔 충절을 기록한 묵은 화강암 비석을 가린 비각이 서 있습니다. 습기에 젖어 있습니다.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항시 젖어 있답니다. 마치 충절을 만고에 드러내듯이 말입니다. 안내원은 이 말을 하면서 곁들여 주위의 습기 때문이라고 과학적인 해설을 합니다. 선죽교의 남쪽 상판 돌에는 붉은 무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핏자국이라고 한답니다. 노란빛을 띤 화강암인데, 일부에 녹빛의 무늬가 선명합니다. 안내원의 말인즉 훗날 후손들이 무늬 박힌 돌로 갈아 끼운 것이라고 합니다. 화강암의 그런 무늬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 말에 믿음이 갑니다. 어쨌거나 포은의 충절을 담은 채 선죽교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리 북쪽에는 커다란 표충비 두 개가 있고, 낡은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조와 고종이 친필을 내려 세운 것입니다. 한 번도 보수를 하지 않았는지 건물은 옛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커다란 거북이 빗돌을 지고 있습니다. 안내원이 암수를 가려보라 합니다.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이 그렇듯이 암놈은 힘겨워합니다. 남자는 암거북에게, 여자는 숫거북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답니다. 다리 주위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표충비 앞에는 세운 시절에 심었을법한 늙은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다리 남쪽 공원에는 메타세콰이어가 몇 그루 서 있습니다. 그 너머엔 운동장이 있는데, 젊은이들이 한껏 뛰어놉니다.
날은 왜 그리 덥고 화창합니까? 그늘을 찾아 연신 담배를 태웁니다. 몇 시간이 지나서는 이미 익숙해져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북쪽의 상대와는 이미 친해져서 음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습니다. 그냥 서울에서 만난 후배와 같이 다가옵니다. 곳곳에 붓글씨체의 큰 글씨가 언뜻 북쪽임을 상기시킵니다. 아주 작은 돌다리를 왔다갔다 하고, 라일락에도 코를 대봅니다. 향기가 어디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예서 맡는 기분은 다릅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관광객을 염두에 두고 정원을 꾸민 듯합니다. 철쭉도 흐드러졌고, 비비추의 새싹도 돋습니다.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조그마한 개천에 선죽교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주문하라 하면 뭐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있는 척 하느라고 여기에서 제일 맛있고 비싼 것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어여쁜 여성안내원 동무는 고기순대(소시지)도 있고, 계란요리도 있고, 해장국도 있다 합니다. 그래도 자신있는 것은 쇠고리 요리랍니다. 살을 발라낸 갈비와 안심에 양념을 가하여 숯불에 구워 먹습니다. 더불어 나온 상치와 양파는 때깔이 아주 좋습니다. 대동강맥주와 함께 고기를 먹습니다. 맛을 내는 데는 약을대로 약은 한국사람을 따르기 힘듭니다. 비교가 무의미합니다. 뒤이어 양곱구이는 제법 맛이 좋습니다. 더구나 옆에서 일일이 수발을 드는 안내원 동무의 재치 있는 말솜씨와 억양이 맛을 돋웁니다. 고기 후의 랭면은 필수입니다. 이 순서는 남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여, 지역마다 요리법이 다르냐고 물었더니, "랭면은 역시 평양 옥류관 랭면입니다. 다음번에는 평양에서 만납시다"라고 합니다. 평양에도 가게 생겼습니다. 아마 6월이 될 것 같습니다.
안내원 동무들은 여기 본토보다 중국에 파견된 이들이 더 아름답습니다. 혹 미모를 감안해서 보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중국의 커다란 도시엔 거의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선 북경이나 심양 쪽이 아주 좋고, 상해나 할빈은 흉내를 내는 정도입니다. 청도의 가게에 있는 아가씨들도 아주 우수합니다. 정기적으로 교대를 해서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북경이 가볼만 합니다. 행동거지나 말솜씨는 거의 같습니다. 북쪽의 기관원들과 함께 한 자리라서 조심을 하는지 화기한 분위기는 덜 합니다.
밥을 먹는 중에 전등은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합니다. 발전기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반복됩니다. (체제나 경제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려 하지만 부득이 한마디 한다면) 전기가 아주 부족합니다. 처음 들어설 때 보인 민둥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GNP는 70년대 초까지 우리보다 높았습니다. 그 후 점차 역전이 됩니다. 몇 해 전의 큰 홍수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산지를 계단식으로 개발하여 농지로 삼았던 것인데, 갑자기 큰 비로 쓸려 내려가 아래의 평지까지 덮어버렸습니다. 산지의 농지뿐 아니라 아래의 농지까지 모두 못쓰게 되어버리면서 절대량의 식량이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협의 상대들은 이미 남쪽에 몇 차례 오간 모양입니다. 남한의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역할을 하는지라 유명인사는 대부분 알고 있었습니다. 방북 당시의 일화까지 곁들여 해주는 얘기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보면 남쪽의 통제가 훨씬 더 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춘천에 방문했을 때 조용필의 매니저가 적어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답니다. 주말을 맞아 지방으로 여행 중 전화를 받은 그는 곧 가겠다고 하며 발길을 돌렸나봅니다. 휴일의 교통사정 때문인지 밤 10시가 조금 지나 도착을 해서 반가움에 얼싸안았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떼놓더랍니다. 채 인사말도 하기 전에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면서, 차라리 만난 뒤에 살짝 불러 교육을 시키든 채근을 하던 하지 그게 뭐냐고 나무랍니다. 신라호텔에 묵을 때는 장충동족발이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어 나가 먹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도 하고, 남쪽의 냉면은 왜 그리 질기냐고 합니다.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식사 후에 돌아본 도시의 풍경은 아름답다고 하기 힘듭니다. 모습들이야 익숙합니다. 대부분 회색의 기와와 회칠을 한 담을 하고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구릉을 따라 지은 집들이 다소 서정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인지라 더욱 안쓰럽습니다. 오가는 아낙들의 모습은 우리 어린시절의 어머니와 진배없고, 그 곁을 따르는 아이는 바로 몇 십년 전의 우리들입니다. 봉고 차에 정장으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저들에게는 예전 시골소년의 눈에 비친 도회지의 성공한 사장님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우울합니다. 한편으로 그간 자존심을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했겠나 하고 앞으로의 할 일을 떠올려보면서 스쳐지나갑니다.
더욱 가까이 다가선 송악산은 기분 때문인지 척박하게 와 닿습니다. 저 속에 그토록 들어왔던 박연폭포가 정말 있을까 하는 의아심마저 들었습니다. 황진이의 일화도 떠오르고,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들었다는 시객도 연상됩니다. 그이의 심정이 혹 이와 같지는 않았을까 억지로 비교를 해보지만 어디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산천이 의구한지도 모르겠고, 인걸은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아쉬움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항시 그렇지만 상상이 문제입니다.
조팝의 향을 지리도록 마시며 가본 개성은 가장 늦게 싹을 내민다는 대추나무를 떠올렸습니다. 예전에 듣기에 대추나무에 잎이 나올 때가 가장 배가 고팠다고 합니다. 보리가 익기 직전이니까요. 날아 아주 따뜻해서 시기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더불어 정치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했습니다. 국제관계, 이념, 민족, 통일, 역사 등등 말입니다.
뉘엇뉘엇 해가 기우는 시점 자유로를 내달려 돌아오면서 아주 여유롭게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담배를 피우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강충형입니다. 중국으로 놀러가잡니다. 그래 새꺄! 중국으로 놀러가자! 언제든지. 가서 좆 빠지게 놀자! 서쪽엔 차라리 즐거움이라도 있지, 이게 뭡니까? 북은 아주 아주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