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속에서 암세포가 번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렸을 때 뱃속에서 자라던 회충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뱃속에 생긴 암세포는 처음에는 단 한 마리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1마리가 2마리가 되고 그것이 번식해서 4마리가 되고 8마리가 되고 16마리가 되고 32마리가 되고 ---. 그 최초의 돌연변이 한 놈은 저지세력으로 작용하는 백혈구의 태만을 비웃으며 유유히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해서 단기간에 수억 마리로 번식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번식하면서 내 몸을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을 것이다.
위암 3기라는 말에 기운이 빠져 병실에 누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산에 있는 나무들과 표정 없는 새끼곰이 전부였다. 주차장 옆 공사장 소음이 조금씩 크게 들렸다. 유선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병실로 들어왔다. 손에 체크판도 들려있지 않았다. 그냥 날 보러 온 것이었다. 유선이가 내가 누운 병상에 몸을 붙이고는 날 보더니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의 위암선고에 대해 그녀는 나보다 더 슬퍼보였다. 투철한 직업 의식일까? 혹시 날 가슴에 묻어놓은 건 아닐까? 순간, 죽어가면서까지 착각에 빠져있구먼 하는 자학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울면서 내 팔을 잡았으므로 난 유선이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었다. 유선이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위암은 틀림없이 잡을 수 있어요. 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해요. 오석씨는 할 수 있어요. 틀림없어요.”
“겨우 내시경 검사만 했는데 암 진단이 되는 거야?”
“요즘은 장비가 발달해서 내시경 끝에 장치된 조직 검사용 침으로 이상 부위를 절개해 낼 수 있어요. 그걸 현미경으로 검사하는 거죠.”
“살 수 있을까?”
“그럼 요. 오석씨는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니까요.”
난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난 결코 최고가 아니었다. 언론조작으로 잠시 뜬 것뿐이었다. 내 팔을 잡은 유선이의 손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난 내 얼굴을 던져 유선이 가슴에 안겼다.
“살고 싶어. 아직은 아닌 거 같아. 이렇게 빨리 가야 될 줄은 몰랐어.”
그녀가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내 눈 앞에서 출렁거렸다. 유선이는 어쩌자고 죽어가는 유부남에게 이다지 정성을 쏟고 있을까? 영숙이도 섹스가 끝나면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었다. 그리고 비누거품처럼 속없는 말을 했다. 원수, 이런 원수를 내가 사랑해야 하니 미쳐. 귀신은 뭐하나 이런 사람 안 잡아가고. 우리의 부부관계는 틀어졌다가도 섹스로 잠시 다시 회복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고 언제나 평온을 깨는 쪽은 나였다. 영숙이의 친절도 짜증났다. 난 조그만 일에 틀어져 며칠씩 입을 다물곤 했다. 불임인 쪽은 영숙이었지만 큰 소리치는 쪽은 늘 영숙이었다. 영숙이는 언제나 당당했다. 아이를 입양하면 된다는 것이었지만 난 반대였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 키우다니 누구 좋은 일을 시키려고. 난 정말 내 씨를 보고싶었다. 유선이가 손가락으로 내 볼과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내시경 검사를 받으셨으면 이런 일이 없죠. 술 담배는 물론 식사 습관도 중요해요. 짜거나 맵게 드셔도 안되고 국이나 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고기보다는 과일이나 야채를 많이 드시고요.”
“난 농약이 묻었을까 봐 과일이나 야채를 안 먹었어. 오염됐을 거 같아서 물도 거의 안 마셨고.”
“답답하네요. 이제야 오석씨가 삐쩍 마른 이유를 알겠군요. 오염으로 인해 인체에 미치는 해보다 그런 것을 먹음으로 해서 얻는 유익이 더 커요.”
유선이가 내 얼굴을 밀어내더니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는 안을 들여다보고 콜라를 꺼내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탄산음료가 위에 안 좋은 줄은 아시죠?”
난 거의 감격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선씨가 아니었으면 암을 발견조차 못하고 죽었을 거야. 정말 고마워!”
“제 실수였어요. 전 정말 심장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어요.”
유선이의 말에 갑자기 옆구리가 뻐근하게 쑤셔왔다. 명치 끝이 체한 듯 꽉 막힌 느낌이었다. 가스명수라도 한 병 마시면 시원할 것 같았다. 유선이가 다시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오후에 일반외과 병동으로 옮겨야 해요.”
“왜?”
“여기는 흉부외과 병동이에요. 위암 수술은 그 쪽에서 해요.”
“그럼, 유선이는 ---.”
“걱정 마세요. 가끔 찾아갈게요.”
유선이가 자기 가슴쪽으로 내 얼굴을 힘껏 당겨서 난 그녀의 볼록한 젖의 뭉클한 느낌을 이젠 입술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유선이의 가슴으로 파고 들자 그녀가 가슴 단추를 한 개 풀어서 가슴을 드러냈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브래지어가 가슴의 둔덕을 가리고 있었다. 브래지어를 아래로 당기자 발간 젖꼭지가 오롯이 솟아나왔다. 유선이가 눈을 감았다. 난 입술로 젖을 빨 수 밖에 없었다. 오디처럼 탄력 있는 유두는 내 입 속에서도 꼿꼿하게 솟아 있었다. 내가 그녀의 가운 밑으로 손을 넣어 팬티를 만지자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린 놀라서 서로 떨어졌고 그녀가 단추를 채우고 나자 간호원들이 이동병상을 밀고 들어왔다. 짐을 챙겨 지금 병실을 옮겨야 된다고 했다. 병상에서 일어나서 보니 창 밖이 요란했다. 인부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공사장으로 들어왔다. 인부들이 제각기 연장과 가방을 들고 내리자 공사장은 삽시간에 인부들로 가득했다. 공사장 입구에는 안보이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엔 까만 글씨로 큼직하게 <영안실 신축 현장>이라고 씌어있었다.
이동병상에 누워 일반외과 병동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항암투병이라니 자신 없었다. 운명은 왜 내게 이런 재앙을 주는 것일까? 과거에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앞으로 유선이를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불현듯 유선이를 닮은 아이를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어 생각을 흩어버렸다.
새로 옮긴 병실은 지난 번과 반대쪽인 남향으로서 산이 보이지 않고 시내만 보였다. 회사에서는 특실입원을 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병실이었다. 두 개의 병상이 놓여있었고 다른 환자는 늙은 간암 환자였다. 그는 간암 말기라서 얼굴은 초췌하고 온몸이 썩은 나무껍질같이 시커맸다. 살이 뼈에 들어붙어서 팔다리가 불에 타다만 장작개비 같았다. 간암환자에게는 과묵한 중년부인이 붙어있었는데 환자가 신경질적으로 시키는 일마다 참을성 있게 다 받아주었다. 그는 수시로 구토를 해서 세수대야를 입에 갖다 대어야 했고 변비 때문에 화장실을 불이 나게 들락거렸다. 내가 병원식을 먹으려고 하면 냄새가 역겨운지 코를 쥐고 부인의 부축을 받고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다. 그는 간암말기가 다 되어서야 병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수술도 못해보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불쌍했으나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일반외과의 담당의사는 중년의 마른 사람이었는데 피부도 서양인처럼 희었다. 차라리 의사가운 대신 환자복을 입는 게 더 어울릴 만큼 혈색이 창백했다.
“조직검사보고서를 봤습니다. 암세포가 이미 위를 떠났더군요. 위 외부막과 임파절을 넘어 혈관과 림프관을 타고 온 몸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악성종양이 심장에까지 퍼졌기 때문에 위를 절제하더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 결국 ---.”
“원하신다면 위 절제수술을 할 순 있습니다.”
난 이런 허약한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처음 보는 간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수술을 받으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졌다.
“수술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죠?”
“주변으로 전이된 암세포를 어떻게 잡아내느냐에 달렸습니다.”
“잡을 수 있을까요?”
“확률은 반반입니다만 전적으로 환자가 항암제를 이겨내느냐에 달렸습니다.”
간호원이 애처롭다는 듯 맑은 눈으로 그윽하게 날 쳐다보았다.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죽음을 준비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의 손이 조금씩 떨렸으나 난 모른척하고 말했다.
“수술해주십시오.”
“그럼 빨리 보호자를 불러주십시오.”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병원에 다녀가라고 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새들이 도시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새들은 자유를 과시하듯 종횡무진을 내달렸다. 내게 어제와 오늘은 전혀 다른 날이었다. 어제가 자유였다면 오늘은 죽음이었다. 이제 나에겐 죽음만이 남아있었다. 집사람의 고통을 외면했던 걸 후회했다. 영숙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녀는 무척 고통스러워 했었다. 그러나 난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나의 2세를 낳아줄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그녀를 죄인 취급했었다. 난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지난 7년간의 침묵을 그녀는 어떻게 견뎠을까? 그저 이혼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을까? 잘할 수 있었는데. 그때 잘할 수 있었는데. 지나간 세월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것은 한계 상황에서의 치졸한 후회였다. 아이를 입양할 걸 하는 후회를 했다.
해가 지는지 서녘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그 위를 독수리인 듯 매인 듯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다. 그 놈의 찌르는 듯한 눈빛이 하늘에서 화살처럼 내 몸에 꽂히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쓰러져 저 놈의 밥이 될 것도 같았다. 산 중턱에 있는 새끼곰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난 놈이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언제 자기가 울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동안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나무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알겠는가?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지만 그건 한가한 이들의 잠꼬대 같은 소리다.
그날 밤 늦게까지 기다렸으나 영숙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손님을 접대하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수술 준비가 다 되었다고 빨리 집사람을 찾아오라고 난리였으나 오리무중이었다. 차라리 영숙이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싶었다. 집사람에게 말해 봐도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죽을 것이고 그녀는 밤늦게까지 일을 할 것이다. 괜히 지지도 못할 짐을 그녀에게 지우고 싶지않았다.
그날 밤에 뻐꾸기의 다리를 붙잡고 나르는 꿈을 꾸었다. 창가에 앉은 잿빛의 뻐꾸기는 의젓했다. 그 뻐꾸기의 발을 붙잡자 뻐꾸기는 날 발에 매달고 매처럼 날렵하게 하늘을 솟구쳐 올라갔다. 빌딩 숲을 올라가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니 온 도시가 내 발 아래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기어 다니고 사람들은 개미보다도 작아 보였다. 사람들이 부러웠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들에 몰두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찮은 일에 몰두하는 하찮은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했던 나의 교만을 자책했다. 자책으로 인해 나의 의식은 죽음으로 인해 너무 산만하지 않은가 하고 자학했다. 그때 뻐꾸기의 다리에서 바늘이 돋아 내 손을 찔렀다. 난 무서워서 애원했다.
"살려줘!"
난 고함을 치며 새의 눈을 무섭게 쏘아보았지만 이미 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난 마치 납 인형처럼 아래로 추락했다. 롤러코스트를 탈 때처럼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죽을 힘을 다해 허우적거렸으나 내 팔은 날개가 아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려다 눈을 번쩍 떴다. 머리가 아팠다. 아주머니가 손바닥으로 내 뺨을 때리고 있었다.
“악몽을 꿨나 봐요. 어유 이 땀 좀 봐.”
아주머니가 머리맡 테이블에서 수건을 꺼내어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간암 환자가 벽을 보고 누워있었는지 몸을 뒤틀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움직이지 않는 허연 눈자위가 송장처럼 섬뜩했다. 창 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있었다. 갈증이 났으나 몸이 아래로 가라앉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물을 마시고 영숙이 사무실로 전화를 했으나 여직원이 없다고 했다. 난 영숙이가 오는 대로 병원에서 급히 찾는다고 알려줄 것을 부탁했다.
내게 한 마디도 안 하는 간암 환자는 자기 부인 앞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얘기들을 다 했다. 그는 혹시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그러는지 몰랐으나 누워서 눈을 감고 있어도 다 들었다. 그의 인생 역정에서 알게 된 온갖 음담패설을 다 말했다. 마치 사타구니로 하지 못하게 된 섹스를 입으로 다 하려는 듯했다. 중년 부인이 덤덤하게 들어주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난 얼굴이 화끈거려서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서 혼내주고 싶지만 그가 내 말을 듣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환자의 말끝마다 아주머니는 혼잣말처럼 그랬다.
“나무관세음보살.”
난 저속한 사람은 질색이었다. 좀 나쁜 짓 하는 건 봐줄 수 있어도 더러운 말을 뱉는 사람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난 창녀 촌에 출입하는 애들과 단절한 적도 있었다. 내가 그 병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그가 내게 이름을 물어왔을 때도 난 대꾸하지 않았다. 내 이름이 더러운 그의 입에서 발음되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미친 놈 새끼구먼. 정신병동에 가야 할 게 잘못 왔어. 아니면 지독한 결벽증이던가. 눈치는 지지리도 없는 새끼야. 그러니까 친구도 아무도 안 찾아오지.”
눈치? 그건 모르겠고. 그래, 난 친구도 없었다. 일하느라 학교 친구들도 안 만났고, 동창회에도 안 나갔다. 그들은 나의 성공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업무와 연관된 모임만 죽어라고 쫓아다녔었다. 그리고 난 결벽증이었다. 저 놈의 노인이 죽어가면서도 정확하게 나의 정신병을 짚어내고 있었다. 속으로 뜨끔했으나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이럴수록 난 더 안으로 침잠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영숙이에게도 그랬다. 생산해내지 못하는 배는 여자가 아니니까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단정했었다. 나에게 절벽을 느낀 영숙이가 기댄 곳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독서 서클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했고 총무가 되더니 아이를 기르듯 독서서클을 운영했다. 독서를 하다 보니 그녀의 관심은 점점 첨단 분야인 정보기술 즉 IT로 빠져들었다. 그 쪽 책을 회원들에게 중점적으로 소개하다 보니 나중엔 출판사에서 지사를 내주게 된 것이었다.
내가 그를 무시할수록 그의 입은 더 걸어졌고 난 제법 참을성 있게 자리에 누워있었다. 난 절대로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가 얼마나 무관심한지 보여줌으로써 나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도 제풀에 포기하고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틀째 저녁에도 영숙이는 오지 않았다.
사흘째 아침에 드디어 유선이가 찾아왔다. 난 첫사랑이라도 다시 만난 듯 흥분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으나 간암환자와 그의 부인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린 밖으로 나와 세탁실로 들어갔다. 대형 세탁기가 돌고 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우린 세탁기 뒤로 돌아가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녀는 내가 보고 싶어 어떻게 이틀을 견뎠는지 모를 정도로 바짝 내게 밀착해서 달콤한 키스를 나눴다. 그녀의 가슴에서 브래지어를 끌러 내리고 입술로 유두를 찾아 물었다. 이빨로 젖을 한 뭇 배어 물자 여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
“잠깐 병원 밖으로 나갈까? 사복으로 갈아입고 말이야.”
“하하하, 오석씨, 위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유선이를 안아보고 싶어.”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지금은 안돼요. 병 나으면 가요.”
“그게 언제지?”
“수술할래요? 누구든 동의만 하면 되요. 제가 할까요?”
“정말? 그래 주겠어?”
“물론이죠.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우선 살리고 봐야지요.”
난 너무 고마워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아주었다. 어쩌면 영숙이와는 이혼을 하고 유선이에게 프로포즈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실로 돌아오자 간암환자와 그의 부인이 하얀 시트 속에 함께 누워있었다. 난 놀라서 기침을 몇 번 하고 다시 나갔다가 한참 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가 와서 이틀 뒤에 수술이니 내일은 하루종일 금식을 하라고 했다. 의사가 불안했으나 난 오로지 유선이와의 재회를 기대하면서 모든 고통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유선이가 왔다. 간암환자는 부인의 어깨 너머로 유선이의 몸 위아래를 한참 훑었다. 난 부러 그의 성을 돋구느라 유선이의 손을 잡았다. 유선이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띄고 말했다.
“힘내세요. 싸움은 이제부터에요. 수술하고도 항암제를 투여해야 하니까요.”
“그거 견디기 힘든 가 보던데. 머리카락도 다 빠지고.”
“항암제가 독하거든요. 암세포를 죽이면서 정상세포까지도 같이 죽게 돼요. 두 달 정도면 머리카락이 다 빠져요. 의료보험 혜택을 최대한 볼 수 있도록 해볼게요.”
난 하루종일 금식했다. 간암환자는 아무래도 며칠을 넘기기 힘들 듯했다. 이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목에서 가래를 그릉거렸다.
다음날 아침 날 태우고 수술실로 갈 이동병상이 들어왔다. 간암환자는 숨쉬기조차 거북해 했다. 그는 이제 살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간호원에게 물었다.
“수술하고 의식이 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리지요?”
“회복실에서 마취가 깨려면 사나흘 걸립니다.”
만약 오늘 간암환자가 죽는다면 조의금도 전하지 못할 듯했다. 병실을 나서서 수술실로 나가고 있었다. 난 평생 한 번도 찾지 않던 하나님을 속으로 뇌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는데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집사람이 날 보고 달려왔다.
“여보, 어디 가는 거에요?”
“수술 받으러 가는데?”
“수술은 무슨 수술이에요! 당신은 신경성 위염이래요, 위염!”
“뭐? 누가 그래?”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그랬다니까요.”
“정말이야?”
“이 병원에서 받은 조직검사표를 갖다가 보여줬더니 다들 위염이라고 했어요.”
그 길로 난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고 병상에서 내려섰다. 배가 고파서 휘청거렸으나 병실로 달려갔다. 간암환자 옆에 부인이 함께 누워있었다. 난 못 본 척 옷을 갈아입고 영숙이를 따라 나섰다. 영숙이가 말하는 대학병원으로 달려갈 참이었다. 병원 정문을 나서면서 보니 주차장 옆 <영안실 신축공사>는 벌써 H빔 철골이 다 세워져 있었다. 3층 높이의 철골 뒤로 산이 반 너머 가려져 있었는데 현관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새끼곰 나무가 생각나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난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계단에서 굴러 넘어질 뻔했다. 새끼곰 나무 옆에 암컷 새끼곰이 붙어있었다. 분명 귀엽게 생긴 암컷이었다. 새끼곰은 뭐가 좋은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암컷은 또 애살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둘의 모습이 얼마나 다정한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난 싱긋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얼굴을 들여다본 영숙이가 그랬다.
“아니, 당신 웃는 거에요? 웬일이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수.”
“아니야. 내가 웃긴 뭘 웃었다고 그래? 안 웃었어!”
그러나 그러면서도 난 계속 웃지않을 수가 없었다. 새끼곰이 한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는 내게 흔들어주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