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일산 모임 후기를 쓴다.
사실은 이 모임의 주도 세력인 항경이나 채식이가 쓰면 난 가볍게 댓글이나 달려고 그랬거든... 그날의 모든 이야기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쓸 능력도 안되거니와 난 변방세력에 불과하기에 그냥 내가 바라보고 듣고 느꼈던 단상들을 중심으로 쓸려고 해.
모임 장소가 웰빙 포크가 나오는 ‘대사랑’이라고 해서 난 처음에 분위기 좋은 삼겹살 집쯤으로 생각했어. 어처구니 없게도 ‘대사랑’에서 난 카페 분위기를 느꼈거든.
김훈은 대나무에서 악기와 무기의 대립된 이미지를 읽어 냈지만 놀라운 자본주의의 포식력은 대나무에서 삼겹살을 우아하게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로 끌어 올린 거야.
모임에 참석한 우리들은 그 우아한 분위기와 삼겹살을 푹 익히지 않고 스테이크처럼 살짝 익혀 먹어도 좋다는 종업원 언니의 설명에 충분히 만족하며 지난 날들의 삽화를 낭만적 그리움으로 불러 내며 소주잔에 맑게 자신을 적시어 갔던 거야
일산 본토배기 성섭이는 내가 사는 탄현 마을이 예전에는 숫고개였다며 그 당시 소중했던 숫을 문둥이들이 만들었다는,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그 마을 가기를 꺼렸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어. 성섭이는 자연스레 일산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죽 들려 주었는데 민담 만큼이나 재밌더라구. 그 때 한 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수현이가 화정이라는 마을의 뜻이 꽃 우물이라며 그게 여성의 그 곳을 상징한다며 한 때의 문학도다운 상상력을 펼쳐 주기도 했어.
소아과 의사하는 인철이라는 친구는 자기 딸이 중3인데 전주에 있는 자립형 사립고인 성산고등학교에 진학시킬지 아님 그냥 인문계로 진학시킬지 내가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지라 넌지시 의견을 물어왔어. 난 처음에 질문의 방향이 어느 쪽 길을 가야 바람직한지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한 문제인줄 알았는데 대학진학에 어디가 더욱 유리한가를 묻는 거였어.
내신 관리라는 차원에 있어서는 단연 일반고 일꺼고 양질의 수업을 듣는 차원이라면 자립고 일터인데 아마 학부모 입장되면 그게 무지하게 헷갈리게 되나봐. 난 일반고를 가는게 좋겠다고 조용하게 이야기했는데 인철이도 내심 동의하는 눈치더라고.... 다만 딸이 그동안 준비를 많이 했기에 한번 지원해 보고 싶다고 그러는 것 같았어.
문득 우신의 영재인 우리 친구들의 자식들 성적 분포도를 상상해보니... 그래서 빚어질 고민의 빛깔들을 상상해 보니 재미있더라고....
모임이 무르익어 갈 무렵 1회 선배 한 분(박우화)이 오셨는데 일산에서 예총지부장을 맡고 계셨어.
항경이가 모임 안내글에 특별한 문화 혜택이 있을 꺼라고 광고했는데 드디어 격조있는 문화의 장이 펼쳐지겠구나 내심 기대했어. 항경이의 근사한 소개가 있은 후 선배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영웅담처럼 펼쳐지는데 건설업 하는 승기가 목동에 있는 예총 건물 짓는 거 자기 작품이라며 호방하게 술잔을 돌리는 거야. 예총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갈등까지 한방 브루스로 좍 일갈하는 순간 두꺼워 보이는 늠름한 승기의 가슴팍이 영화 대부에 나오는 알파치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어. 선배는 승기랑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슬쩍 난 화제에서 빠져 버렸어. 난 승기가 방심한 틈을 타서 얼른 선배랑 지역에서의 문화활동에 대한 주제로 이아기를 나누며 한 때 종로지역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음악제, 연극제, 문예 교실을 열었던 나름대로 화려했던 나의 과거 경력을 은근히 별거 아니었다는 듯이 툭 던지기도 했는데 선배는 별로 인정을 안해주는 듯한 눈치여서 난 실망을 하고 말았어.
난 술을 마시며 나랑 대각선 방향으로 자리 잡고 앉아 넉넉한 웃음으로 술잔을 비우는 친구가 누구였더라 궁금해 하고 있는데 마침 명함을 주더라고... 일산 백병원 응급 과장 김경환... 아니, 이런.... 내가 일전에 백병원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간적이 있었는데, 경환이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니...
경환이는 보기에는 주류업체 대표 이사쯤 되어 보였으나 우리에게 씩 한번 미소를 던질 때면 영락없는 부랄친구의 천진함이 묻어 나오더라구...
느즈막히 도착한 홍익대 교수 문규는 예의 그 당당함을 겸손함에 감추고 있는거야.
이 넘은 내 짝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자긴 늘 똘팍이라고 비하하곤 해서 곁에 있는 내가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었는데... 사실은 엄청난 실력파였지.
내가 고교 등급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너무도 당당하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묻는 바람에 난 억울했어. 우리 배화여고 아이들 그거 땜시로 엄청 불이익 받았거든.
하긴 사람들은 다 자기 내부 논리로 무장하게 되어 있으니까...
어디선가 우리나라 이러다 사회주의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국 충정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주제는 서로 불편해 질 수 있으니 이런 자리서는 삼가 하자고 해서 더 이상의 쟁점 토론방은 열리지 않아 열띤 토론을 은근히 기대했던 나로서는 좀 아쉽기도 했어...
거국적으로도 정체성이 문제인 모양인데 도데체 나이 40대 중반에 있는 나는 아직도 그 문제 가지고 방황하고 있으니.... 쩝... 나의 정신 연령은 확실히 낮은가봐....
세종대 교수 성빈이는 자기 학교가 탑 10의 반열에 올랐다고 흐믓해 하면서도 비장한 표정을 드러냈는데, 성빈이의 목소리와 풍채는 중후함 때문에 정말 교수다워 보이더라구...
난 우리 학교 아이들 많이 보내주겠노라고 당치도 않은 흰소리를 화답으로 보내주었어.
요즘은 대학 선택 때 교사의 영향력은 정말로 미비하거든....그건 방송과 인터넷과 연예인이 대신하고 있잖아.
국세청에 다닌다는 윤준이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시원하게 드러낸 채 술을 마시는데, 주변의 우리들은 국세청에 다니면 접대를 얼마나 환상적으로 받을지 궁금했는데... 자신은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잘 모른다고 그러더라구.... 아마 그건 국세청 1급 비밀일지도 모르겠어.
같이 종로에서 근무하니까 언제 점심이나 한번 하자구 하니까 정말 날 한번 잡아야 겠어.
세상 돌아가는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 볼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종수라는 친구는 말을 참 맛깔스럽게 잘 하더라구....
서로가 공유한 추억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스르륵 그 세계로 빠져들곤 했으니까....종이장 처럼 얇은 추억도 그 친구가 이야기하면 한편의 드라마가 되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중아일보를 지원해주는 중차대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라고 고개가 끄덕여 졌어.
모임의 파장 무렵에 시끄러운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
창완이 이 친구는 아무튼 어디있든지 간에 바로 드러나는 친구잖아.
역시 오자마자 요란스레 악수 세례를 하고 나더니 일산 구락부의 회장 남채식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거야. 회장 알기를 정말 회장 모시듯 하더군. 채식이는 역시 조직의 보스답게 턱짓으로 아는 척을 하더라구....
항경이는 베테랑 총무답게 1회 선배 우화형님이 화정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연주회에 다 같이 모이자면서 자리를 마무리 하더군. 동시에 자신이 웃는 모습이 환하게 실린 신문한부를 정갈하게 푸루덴셜 봉투에 담아 주는 것으로 그날의 공식적인 모임이 끝난거야.
오늘로서 일산 주엽에서의 지점장 근무가 끝나는 수현이가 나를 붙잡으며 한잔 더 하자며 채식이와 함께 나를 끌고 갔어. 수현이는 먼저 당구나 한 게임 치자고 했는데 채식이는 피로나 더치로 풀자고 해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어.
나는 오늘 7부능선을 넘지 않겠다고 맹세한 아내와의 약속도 있고 내일 1시에 또 다른 약속이 있었던 터라 손을 흔들며 허청허청 그 자리를 빠져 나왔어.
난 친구들의 화려한 명함을 주머니속에서 만지작 거리다 오늘 만남의 감정을 눙치며 아내 품으로 파고 들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