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엄청 추워진 이 아침에 아내가 시험을 보러갔다. 초등학교 교사 임용고사를 치르러
간 것이다. 교사 임용시험은 매년 수능시험이 있은 다음 첫 일요일에 치른다.
내가 오늘 지금의 직장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며 밥 먹고 살기까지 세 번의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당연히 동기들은 다 알듯이 '특수지'였던 모교를 지원한 것이다. 야구로 유명한 선
린상고와 함께 있던 선린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사실 2 학년 때까지도 ‘우신고등학교’라는 게 있는
것조차 몰랐었다.
중 3 에 진급해서 학년 초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인 ‘오용흥’(이과 졸업)이라는
친구가 말하기를 도심에서 12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학교로 -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니, 서울 도심에서 그만큼 교통이 멀다는 뜻인 듯 - 우신, 상문, 문일, 등등이 특수지역
학교로 분류되어 연합고사 성적 고득점 순으로 뽑는다는 것이었다.
추첨으로 갈 수 있는 학교 중에 별로 맘에 드는 학교가 없던 나는 학교의 위치조차 모르고
친구 따라 덜컥 지원하고 말았다. 학교측 광고지도 아주 달콤하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데 이끌림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결과는 용흥이도 나도 합격이었다. 우신고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중 3, 우리 반에서는
1 등에서 8 등까지 모두 우신고를 지원했었다. 당시 70 명이었던 반에서 1 등은 늘 ‘이승선’
이었고 2 등과 3 등을 ‘김덕원’과 내가 번갈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우리 반에서 차
례로 3 등까지만 합격했었다. 고교 시절의 방황은 ‘장편 자전 소설' <희비의 쌍곡선>에서 밝
혔으므로 생략.
동기 중 170 여명이나 서울대를 합격했는데, 어쨌든 나는 공부에 게을러서 연, 고대도 지
원할 수 없었다. 국어와 영어는 그런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문제는 예비
고사에서도 대량실점을 했었던 '수학'이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고려대의 전년도 본고사
수학문제를 훑어 보았으나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예비고사(지금의 수능) 성적만으로 들어
가는 ‘특차’가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그 점수가 연, 고대 국문과를 지원하기에는 꽤 모자랐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보라고 했으나,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본고사에서
수학 대신 '국사'를 선택할 수 있었던 중앙대에 원서를 내고 다행히 합격을 했다. 예비고사를 몇
달 앞두고 암기과목 위주로 공부했기에 ‘국사’는 고득점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를 진학하고도 공부는 뒷전,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음주가무'와 작업(?)의 연속이었다.
지금처럼 국문과 학생의 10%만 성적순으로 교사 자격증을 준다면 난, 자격증 취득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졸업만 하면 자격증이 따라오다시피 했었다.
병역을 마치고 선배들처럼 사립학교에 취업해서 무난히 교사생활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신문에 황당한 기사를 읽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은 사립학교 교사를 전
국적인 공채로 뽑는데, 고교성적을 30% 나 반영하고, 대학 성적 50%, 즉 80%를 내신으로
뽑는다는 거였다. 나머지 20%를 교육학 시험으로. 세상에 ! 졸업이 낼모레인데 이미 결정된
내신으로 뽑는다? 나는 절망했다. 고등학교는 거의 말석으로 졸업, 대학 성적도 병역을 마
치기 전인 1, 2 학년 때는 권총(?)이 있음은 물론, 주로 D 밭에 C를 뿌렸었는데.....
교사 자격증은 있었으니, 야간 여고에서 시간강사를 하며 재수를 해서 그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의 직장에 다니고 있다. 2 회 시험부터 다행히 내신을 없애고 전공 70%, 교육학 30%
로 시험 요강이 바뀌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평생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
었다. 강사로 다니던 야간 여고를 사직하고, 반 년 동안 일체의 사회활동과 차단된 채 하루
16 시간씩, 시험 공부에 매달렸던 기억에 지금도 그 때의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한
다. 만약 그 시험에 떨어졌다면 내 인생은 아주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사립학교의 서울시 공채는 3 회까지 실시되고 없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채를 통해 들
어온 교사들이 사립학교 재단측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그 제도를 없앴다는 느낌이다.
지금은, 근무하는 교사들의 후배 추천과 재단측 나름의 공채로 뽑는다. 전국적인 공채 첫
해에 내신 성적을 80%나 반영한 것도 학교재단에 순종적인 사람을 공채 합격자로 뽑기 위
함이 아니었을까? 여론에 밀려 내가 합격한 2 회 시험부터는 어쩔 수 없이 전공과 교육학만
을 반영했지만 말이다. 내신이 80% 나 들어가는 게 무슨 시험일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교사 자격증이 있음에도 한 번 시험에 떨어지면 평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쨌든,
첫해에 나를 절망으로 몰았던 그 제도 덕에 나는 지금의 교사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우신고를 지원하고, 중앙대 국문과를 선택하고, 세 번만
실시된 사립학교 교사 서울시 공채에 재수 끝에 합격한 덕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엊그제도 으레 그렇듯이 수능 시험감독을 하러 ‘세종 고등학교’에 갔었
다. 여학교에 근무해서 그런지 계속 여학생들만 시감하다가 내 기억에 처음으로 남학생들을
시감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19 살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고교를 방황 끝에 졸
업한 지 4 반세기(25 년)가 훨씬 지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성적순, 한 줄로 세우기는 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선발 제도만 복잡해진 느낌이라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않다. 내게도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그것을 피해갈 수 없는 두 아이
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경인교대(인천교대) 3 학년에 학사편입 해, 그 나이
(1968년생)에 6 주간의 교생실습도 마치고, 임용고시 시험장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마음 속
으로 화이팅을 외쳐본다. 지금쯤 아내는 떨리는 손끝으로 답안지에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2007.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