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봄은 3월부터 5월까지라고 하는데 봄에 핀다는 꽃들에 대해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꽃이라고 하면 주눅부터 들곤 한다. 그랬는데 마흔 성상을 훌쩍 넘어 살다 보니 어느덧 봄에 피는 꽃을 조금 알게 되었다. 피는 순서대로 보자면 목련, 벚꽃, 복숭아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 라일락, 아카시아, 장미 정도다. 그런데 오늘 낮에 회사에서 인터넷 여행을 하다가 3월에서 5월 사이의 봄에 피는 꽃들을 보게 되었다. 사이트에 올려진 우리나라의 봄 꽃이 자그마치 127가지나 되었다. 참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꽃들이었다. 그런 꽃들이 지금 이 봄에 지천에 피어있다는 것이었다. 벌써 5월18일이니 5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난 꽃을 보고 싶었다. 더 늦으면 꽃이 다 지고 없을 것이다. 집에 전화를 해서 집사람더러 차를 갖고 6시10분까지 회사 정문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꽃구경을 위해서 오늘은 일찍 나왔다.
집사람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살짝 화장을 하고. 꽃 구경하러 울기 등대로 가자고 했다. 집사람의 표정이 잠시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 남자가 갑자기 미쳤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등대 길로 들어가 무료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걸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그 꽃들을 빨리 보고 싶었다. 길가에 방어진어머니 회인가 하는 단체에서 화단을 꾸며놓아서 꽃들이 종류별로 쪼르륵 자라고있었다.
“저 꽃은 뭐지?”
“토끼풀도 몰라? 잎이 크로바잖아.”
“저건?”
“에이, 쑥이잖아”
“저건?”
"저건 개망초라는 거야."
"저건?"
“저건 나도 모르겠네. 한마음 회관에 있던 건데 외국 꽃이던데.”
길 건너에는 광택이 나는 조그만 잎에 하얀 꽃들이 많이 달려있었다. 얼른 길을 건넜다. 난 인터넷에서 본 기억으로 산수유가 아닌가 하고 넘겨짚었지만 그건 아니란다. 집사람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러더니 언제 뜯었는지 토끼풀 꽃으로 반지를 엮어 내 손가락에 끼워주려고 한다. 아니, 이 여편네가 미칬나 웬 청승이고? 난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속으론 좋았지만 남이 볼까봐 창피하다.
“저건 뭐지?”
“붓꽃”
“아, 오랑캐꽃이라고도 하지.”
“아니지. 오랑캐꽃은 제비꽃이지.”
길가에 죽 심어놓은 벚꽃은 오래 전에 다 져서 흔적도 없었다. 집사람이 벚나무를 가리키며 '어? 뻐찌가 열렸네'한다. 꽃이 진 자리에 콩알보다 작은 동그란 열매가 달려있었다. 가지를 하나 따서 열매를 만져보니 콩처럼 딱딱하다. 여름에 그게 익으면 먹는단다. 등나무도 보이지만 꽃은 없다. 파란 등나무 꽃은 활짝 핀 것을 지난달 중순에 초등학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집사람은 이번엔 토끼풀을 길게 엮어 화관을 만들어 내 머리에 꽂으려고 한다. 이거 완전히 꺼꾸로 됐구먼. 니가 내가 되고 내가 니가 돼야 하는디 우짤 것이냐. 내가 워낙 경상도 보리 문뎅이 출신이라 멋대가리가 없으니 맘 넓은 니가 이해혀라! 내가 손사래를 치자 집사람은 자기 머리에 화관을 꽂는다.
유료주차장을 지나 울산시교육연수원 정문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꽃밭이 나타났다. 이 연수원은 원래 방어진 중학교였고 집사람의 모교였다. 당시 남녀공학이었는데 남학생들과 한 마디도 안 했단다. 믿거나 말거나. 집사람은 어려서부터 저 넓은 바다를 보며 사색을 해서 호연지기가 넘치는가 보다. 아, 그래서 싸우면 맨 날 내가 지는구나. 집사람의 그 넓은 마음만 생각하면 기가 죽는 건지 막히는 건지 알쏭달쏭, 그래 속 좁은 내가 져야지. 섭섭하게도 꽃밭에는 벌써 꽃들이 다 져서 푸른 이파리들만 보였다. 그러나 꽃이 핀 것도 있었는데 꽃 팻말이 있어서 겨우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금낭화는 며느리주머니라고도 하는데 꽃봉오리 안에 무슨 노리개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하늘매발톱꽃은 꽃잎이 정말 매의 발톱처럼 오므려져 있다. 또 하얀 꽃이 있었으나 팻말도 없고 집사람도 이름을 몰랐다. 난 꽃잎을 하나 떼어서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쌉싸름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을 먹었다. 맛있다. 대개 꽃들은 꽃잎과 그 뿌리를 약용으로 쓰인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바닷가에 핀다는 해당화도 보인다. 꽃이 진 목련과 동백나무 아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서 하늘이 안 보일 지경이다. 길옆 꽃진 개나리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집사람이 꽃 이름을 가르쳐주는데 다 잊어버렸다. 무릎까지 올라온 죽순이 꼿꼿이 서 있었다.
등대 건물 벽 밑에 빨간 산딸기가 열려있어서 다가갔다. 집사람이 보더니 뱀딸기란다. 이파리가 발목 높이에서 낮게 깔려있어서 정말 뱀이 나올 것 같았다. 얼른 딸기 몇 개를 따먹고 나어니 별 맛도 못 느끼겠고 풋내만 입에 돈다. 꽃밭을 돌아 나오면서 보니 소나무 군락 전체가 누리끼리 한 것이 거의 죽은 모습이었다. 지난해 태풍 매미 때문에 다 말라있었다. 그런데 목련과 동백나무 옆에 있는 키 낮은 소나무는 아직 푸르렀고 가지가 길에 늘어져 있었다. 소나무에도 꽃이 핀다던데 가지 끝을 보니 꽃같이 생긴 게 있다. 이게 꽃이냐니까 아니란다.
"이건 새 순이 자란 건데 어렸을 때는 새 순을 잘라 먹었어."
"소나무 순도 먹어?"
"그럼, 맛있어. 찔레 순도 먹고 삐끼도 먹었어."
촌사람들은 별걸 다 먹는구나. 소나무 철책 안을 보니 하얀 꽃이 보였다. 집사람과 다가가서 보니 딸기 꽃이란다. 줄기에는 산딸기 같은 빨간 딸기가 송알송알 맺혀 있다. 어렸을 때 집에 많이 심었단다. 또 따먹었다. 덜 익었는지 겨우 혀에 신맛이 돌려다가 만다. 걸어오다 보니 옆구리가 허전하다. 집사람은 자꾸 풀을 바라보며 서성거린다. 그 모습이 꼭 비행소녀 같다. 순 우리말로는 날라리. 남들 눈에 우리가 바람피우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집사람이 채워주는 옆구리가 따뜻하다. 나무와 꽃들을 보고나니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고 싶다.
"아파트 팔고 집 살까? 나무 심게 말이야."
"그냥 이대로 살아. 나무 기를려면 물 주고 거름 주고 약도 줘야 되는데 ---."
"그래? 힘 들겠네. 그냥 살자."
"이게 다 우리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하나님 거니까 우리 거야. 보고 싶을 때 이렇게 나와서 보면 되고."
집사람이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한다. 그런데 어디서 듣던 소리다. 관리사무소 옆을 지나면서 보니 엉겅퀴가 있다. 이파리 끝에 가시가 있어서 만지기가 겁난다. 장미도 아닌 것이 가시가 있다니 우습다. 그래도 꽃은 부드러웠다. 나오다가 벚꽃나무를 껴안고 둘레를 재보니 정확히 한 아름이었다.
“이거 한 백년은 됐겠는데?”
“무슨, 내가 학교 다닐 때 심었는데.”
그래? 그럼 25년 정도 밖에 안됐네. 난 찔레꽃을 보고 싶었으나 안보였다. 집사람은 봉대산에서 찔레꽃을 봤다고 했다. 모두 흰색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가요에는 “찔레꽃 붉게 물든 남쪽나라 내 고향 ~”이라고 하지? 인터넷을 뒤져보니 분홍색 찔레꽃도 있단다.
오늘 5월도 저물어 가는데 봄 꽃 구경을 하고 나니 다소나마 아쉬움을 삭일 수 있었다. 내년 봄에는 좀 더 일찍 꽃 구경에 나서야겠다. 한가하게 꽃 타령이나 한다고 누가 타박할지 모르겠다. 내 고향은 지리산 아래 함양이다. 지리산 너머 남원처럼 예술적인 고향은 아니지만 어릴 때의 기억이 아스라이 남겨진 곳이다. 수구초심인가. 촌에서 나서 그런지 땅 냄새가 솔솔 그리워진다. 집사람이 오늘은 행복한 표정이다. 늦바람이 불어 가슴이 벌렁거리나 보다.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