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작(?) ‘희비의 쌍곡선’ 이후 꾸준히 글을 써 왔으나, 최근 들어 집안에 골치가 아픈
일이 생겨 영 차분하게 앉아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글을 쓰는 것도, 문학 작품을 감
상하는 것도 모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생활의 여유가 있어서 심심할 때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물론 전업작가들을 빼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업작가는 드물다. 가장 큰 이유
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기 까닭이다.
각설하고 집안의 우환(고부갈등)이 어느 정도 일시적 마무리가 되자, 17일 일요일, 영화를
한 편 봤다. 영화의 제목은 ‘열세 살 수아’인데 그것도 온 가족이(나, 아내, 두 아들) 일요일
아침에 조조할인으로 본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현재 내게 국어수업을 받고 있는 제자이다. 실제로는 16살(3학년)인데
좀 동안이라, 중 1역을 맡은 모양이다. 일주일에 그 애가 속한 3학년 6반을 다섯 시간이나 국
어 수업을 하러 들어가는데, 그 반 담임이 이 녀석을 맨 앞자리 가운데에 앉혔기 때문에 녀
석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할 기회가 많다.
세영이는 정말 모범생이다. 농담성의 수업 내용도 메모할 정도로 수업에 적극적이고 발표도
잘 한다. 특별히 촬영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학교를 결석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오후에 인
터뷰가 있으면 오전 수업을 꼭 받고 조퇴를 할 정도이다. 청소시간에도 궂은 일에 솔선수범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우들과의 대인 관계가 원만하다는 거다.
전에도 세영이 비슷한 경우의 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실 이 부분이 쉽지 않은 것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 애의 소탈함이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세영이는,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이 좀 그렇지만, 그 나이로서는 아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탈렌트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본인이 그러는데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는 꼭 필요한 출연을 제외하고는 연기생활 대신 학업에 전념하고 싶단다. 학창시
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다른 아역배우들의 삶이 싫다나? 문득, 내가 좋아하는 ‘박신혜’와 흔
히 비교되는 것을 본 기사들이 떠오른다. 분위기는 많이 다르지만.
세영이는 ‘대장금’에도 출연했고, 영화와는 거의 담 쌓고 사는 나의 친우 '김주동' 군이 볼 정
도로 300만 관객이 관람한 '여선생, 여제자' 에서 한 총각 선생님을 사이에 두고 여선생인 ‘염
정아’와 맞장을 뜨는 당돌한 제자 역할을 잘 소화해서 더욱 유명해진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밖에도 ‘아홉살 인생’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
마의 주인공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제자가 지난 겨울 방학을 이용해 영화를 한 편 찍었다고, 학년초부터 나에게 자
랑을 했었다. 6 월쯤 개봉을 할 예정이라고 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개봉이 임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시사회에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러나 공짜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는, “직접 영화관에 가서 보고 감
상을 네게 말해 주마.” 하고 좋은 뜻으로 시사회 초대를 거절하였다.
인터넷을 뒤지니, 마침 내가 사는 평촌의 DMC 극장에서 개봉을 하는 거였다. 영화 제목은
‘열세 살 수아’이다. 폴란드에 있는 영화학교를 졸업한 한 여류감독의 생애 최초 장편 영화
란다. 따라서 블록 버스터나 예산을 많이 투자한 영화는 아니었다.
나의 영화 취향을 말하자면 소설로 치면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즉 특수 효과나 만
화와 같은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돈을 주면서 보래도 안 보는 영화가 있다.
‘주윤발’이나 ‘성룡’이 나오는 홍콩 영화는 극히 싫어한다. 자기는 절대 안 죽으면서 쌍권총
으로 상대방을 많이 죽일수록 흥행에 성공하는 황당한 이야기를 돈 주고 보는 사람들을 이
해할 수 없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의 다양성이 있음을 마음 속으로 열어두고 있지만....
예외로 홍콩 영화 중에서도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는 무척 좋아했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남들처럼, 악당을 물리치고 뭔가 슬픈 표정에 조금은 동물같은 소리를 지르는 그의 카리스마에
흠뻑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감동을 받은 영화야 수없이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니콜라스 케이지’와 ‘엘
리자베스 슈’가 나왔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영화가 시작되고 많이
지나지 않아서 시나리오 작가인 주인공 니콜라스 케이지가 아내와 이혼을 하고는 가족 사진을
태우며 하던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 내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아내가 떠난 걸까? 아니면
아내가 떠나서 내가 술을 많이 마시게 됐을까?" 결국 그는 마지막 삶의 비상구로서 '라스베가스'
로 술을 잔뜩 사 가지고 가고, 거기서 그의 죽음을 지켜 줄 여자 엘리자베스 슈를 만난다. 국산
영화로는 ‘조승우’ ‘손예진’ ‘조인성’이 주인공이었던 ‘클래식’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클래식은 명절 때 텔레비젼에서 할 때마다 반복해 보아서 세 번도 더 본 것 같다.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정말 아름다운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열세 살 수아’를 본 느낌은 기대 이상이었다. 저 예산 영화에 초보감독의 작품이라,
TV 문학관 한 편을 영화관에서 본다는 가벼운 마음, 즉, 큰 기대를 안 하고 갔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내 맘에 꼭 들었다. 과자 한 봉지를 샀는데, 덤으로 한 봉지를 더 받은 느낌이랄
까? (계속)
2006. 0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