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전산’ 입니다.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요? 저는 여자분에게 전화를 했는데,
남자분이 받으시네요.
- 아닙니다. 제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 ‘강미경’ 씨를 아시죠?
- 예, 잘 압니다만, 댁은 누구시죠?
-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뭐하고요, 직접 뵙고 얘기하고 싶은데요?
- 미경이와 관계 있는 말씀이겠죠?
- 네 그렇습니다. 시간을 내실 수 있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 방송국 근처로 정하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우리 집이 여의도에서 멀지 않거든요.
- 방송국 근처에 ‘곰’ 이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그 까페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
릴 테니까 적으시죠.
- 예. 그럼 오늘 저녁에 뵙겠습니다.
나는 그가 가르쳐주는 대로 전화번호를 받아적고 밤 8시에 ‘곰’ 이라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했었는데, 미경이의 전 남자친구 ‘전산’ 의 반응을 보니 전화를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헤어진 미경이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다면, 그가 불
쑥 전화를 건 나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고, 만날 필요가 없다고 했을 것이기 때
문이었다. 미경이와 전산 씨는 5년 동안이나 서로 연인 관계가 아니었는가.
난 미경이에게도 전화를 해서 퇴근 후에 만나자고 했다. 그녀의 반응을 봐서 전산 씨와의
약속 장소에 함께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서 그녀에게 전
산 씨와 약속이 되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늘 만나는 평범한 데이트처럼 약속을 했었다.
서울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되어 그녀와 만났다. 지난 주 일요일 오후에 있었던 여동생의 약혼식 장에서
만나고 처음이었다. 오늘은 수요일.
- 오빠, 다른 날보다 표정이 좀 어두워. 여동생이 약혼한 게 그렇게 섭섭해?
- 내 표정이 그러냐? 난 못 느꼈는데?
- 오빠는 아이들하고 생활해서 그런지, 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거든. 그런데 오늘은 평소
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야.
- 미경아, 사실은 지금부터 좀 심각한 얘기를 할까 해. 솔직히 대답해줘.
- 뭔데?
- 나, 사실은 ‘전산’ 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너를 만나기 전에 여동생에게 들었어. 그건 우리
가 정식으로 남녀 관계로 만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난 3개월 가까이 만난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의 아픈 기억을 건드릴 마음은 추호도 없어. 다만, 나는
지금 우리가 양가 부모 모두 인사를 나눈 상태이고, 지난 일요일 내 동생 약혼식 때 가까운
친지들에게 너를 소개한 상황에서 내 마음의 찜찜함은 털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야. 너에게
고백할게 있어. 열흘 전쯤 너와 만났을 때 네가 없는 상황에서 아주 우연히 네가 들고다니
던 책을 보다가 그 사이에 있던 사진 한 장을 보고 사실 지금까지 마음 한 켠이 몹시 불편
했어. 그 사이 여동생 약혼식도 있고 또 결과적으로 내가 니 허락도 없이 책을 보다가 사진
을 발견했기에 약간의 미안함도 있고 해서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야.
내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전산 씨와의 약속이 결정
된 이후 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탤런트가 대사 외워서 연기하듯 단숨에 말했다. 내 목
소리를 다소 떨렸을 것이다. 그녀는 동그랗게 커졌던 눈을 아래로 깔더니, 한참 후에 나를
보면서 말했다.
- 최근에 그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한 차례 왔던 건 사실이야. 반 년 이상 연락이 없다가 갑
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곧 마음을 정할 수 있었어. 만나
자고 했지만 끝난 이야기라고 단호하게 말했으니까, 오빠가 신경 안 써도 돼.
- 사람 꼴이 우습게 되는 것 같아,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책갈피에서 발
견한 사진은 어떻게 된 거지?
- 오빠, 우선 미안해. 그냥 빈손으로 다니기가 뭐하고 차에서 읽으려고 책꽂이에서 아무 책
이나 빼서 외출했다가 그 책갈피에 사진이 있는 걸 보고 나도 놀랐었어. 그 사진을 잘 처리
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찢어버리고 없는 상태야.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 함께 찍은 사진
은 모두 버렸었는데 어쩌다가 그 책 속에 한 장이 있다가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거야.
- 그래? 난 너의 말을 모두 믿겠어. 그러나 내가 너의 옛 남자 친구를 인정한다는 것과 그
남자 친구가 네게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히 다른 거야. 사실, 오늘 전산 씨에게
전화를 했어. 내가 만나자고 하니까, 기꺼이 만나겠다고 해서 만날 약속을 했지. 있다가 8시
에 그의 직장 옆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어.
-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설령 네 말이 맞는다고 해도 난 확인할 게 있어. 솔직히 말해
서 셋이 한 번 삼자대면이라도 하고픈 게 내 맘이지만, 그건 경우에 따라서 네게 너무 잔인
한 일이 될 것 같아서 혼자라도 만나야겠어. 이미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군.
- 오빠, 생각보다 고집이 세네. 정말,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오빠 마음이 변할까?
- 답답하군. 미경이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어쩌면 그건 미경이에
대한 내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고. 또 더불어 나 중심의 생각이기도 하고 어쨌든 심정이 좀
복잡하군. 복잡하다는 뜻은 앞으로의 사태에 따라 우리의 만남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야. 물론 상황에 부딪쳐봐야겠지만.
- 좋아. 오빠가 정 그렇다면 그리고 기왕에 그 사람과 만날 약속이 된 시점에서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함께 여의도로 가지.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
고,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날 때 근처에 있을게.
- 알았어. 함께 만나고 안 만나고는 미경이 판단에 맡기겠어. 일단 근처까지 함께 간다니
고마워. 미경이가 같이 가 준다는 말만으로도 내 맘이 한결 가벼워졌어.
- 오빠의 고집 때문에 여의도까지 함께 가기는 가겠지만, 아마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난 뒤에
괜한 일을 했다고 후회하게 될 거야.
- 그렇다고 해도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
그녀와 나는 여의도 까지 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카페 ‘곰’ 으로 갔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맨하탄답게 여의도는 양복을 입은, 혹은 바바리 코트에 정장
을 한 회사원들로 이 겨울에도 거리에 사람이 제법 많았다.
- 시간에 맞게 도착했네. 미경이는 어디 있겠어? 다소 어려운 제안인지는 알지만, 함께 만
나는 게 내 바램이야.
- 그건 마음에 내키지 않고, 저 옆의 ‘해태델리’ 에 있을 테니까 오빠가 되도록 짧게 그 사
람 만나고 와.
- 알았어. 너무 내 생각대로 일방적으로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
- 괜찮아, 오빠. 난 오빠 마음이 편한 게 좋아. 이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어.
-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 그럼, 거기서 기다려.
그녀가 ‘해태델리’ 라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카페 ‘곰’ 으로 발길을 옮겼다. 카페
벽에 걸린 시계가 정각 8시를 5분쯤 남기고 있었다. 거의 정확하게 약속시간 8시가 되자,
약간 두툼한 스웨터에 머플러를 한 사람이, 사진 속에서 본 그 사람이 테이블이 몇 개 없는
작은 카페로 들어와서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일어나서 그를 맞았다. 첫인상이
영화배우 ‘안성기’ 와 이미지가 조금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전화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 네. ‘전산’ 이라고 합니다. 무척 동안(童顔)이시군요. 실례지만 무슨 띠십니까?
- 예, 61년 소띱니다.
- 아아, 그러시군요. 제 직업은 아실 테고, 실례지만, 뭐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
까?
- 예, 중학교 국어 교삽니다.
- 네, 그러시군요. 일단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날씨 이야기와 그가 한참 연출을 맡고 있으며 요즈음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
는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일일 연속극의 연출을 맡고 있었는데, 시청자들이 관심
을 가져주는 건 고마우나 심지어 줄거리를 자기 뜻에 따라 바꿔달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 등, 오늘의 심각한 주제와는 별개의 화제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첫
인상에 참 친절하고 소탈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동안 그런 이야기를 하
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 미경 씨는 어떻게 아시게 됐습니까?
- 네, 여동생의 동창생입니다.
- 그럼, 동생과 연년생이십니까?
- 그런 걸 다 아시는군요.
- 이렇게 만나기까지 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경이와 나, 상당히 오래 만났더랬
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상당 기간 만나다가 연인 사이로서는 꽤 오래 연락이 없었고 최근에 미경
이에게 전화하신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 네, 그렇군요.
그는 한 동안 아까 의례적인 친교의 대화를 할 때와는 달리 약간 굳은 표정이 되어 손가락
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 미경이를 만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 3개월가량 됐습니다만, 사실 여동생의 절친한 친구이므로 훨씬 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
습니다.
- 그럼, 미경이와 나와의 만남도 알고 있겠군요.
- 물론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이해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죠. 중요한 건 미
경이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이 상견례를 했고, 며칠 전에 제 여동생 약혼식에도 미경이가 참
석했었다는 사실입니다.
- 네, 그랬군요. 저는 그 정도인지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나는 약간의 미소를 짓고 여유 있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마음은 좀 굳어있었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 사실 미경이가 이 근처에 와 있습니다. 본인의 뜻을 존중해야겠지만, 그 쪽에서 원한다면
잠시 만날 것을 제가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만나고 안 만나고는 미경 씨가 결정할 일이겠
죠.
-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2011. 8. 16
Amy Winehouse - Love Is A Losing Game
For you I was a flame
Love is a losing game
Five story fire as you came
Love is a losing game
Why do I wish I never played
Oh, what a mess we made
And now the final frame
Love is a losing game
Played out by the band
Love is a losing hand
More than I could stand
Love is a losing hand
Self professed, profound
Till the chips were down
Know you're a gambling man
Love is a losing hand
Though I'm rather blind
Love is a fate resigned
Memories mar my mind
Love is a fate resigned
Over futile odds
And laughed at by the gods
And now the final frame
Love is a losing g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