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3 때 진학 상담차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담임 셈이셨던 최창학 선생님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시고
“혹시 대구 경북중학교............”
세월은 흘러도 얼굴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중학교 동기 동창이었던 것이다(실제 나이는 아버지가 두 살 위)
진학 상담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두 분이서 오류동 전철역 부근
중국집에서 빼갈로 거하게 한잔 하셨던 모양이다.
대구에서 올라와 오류동 촌구석에서 담임과 학부모입장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얼굴도 기억할 정도 였으니.
그 이후로 선생님은 항상 아버지 안부를 물으시고 아버지도 항상 선생님
근황을 물어 보신다.
#2. 89년 결혼식 당일까지 난 주례가 누군지 몰랐다.
지방에 근무할 당시 결혼식 바로 전날 저녁 서울로 올라와 예복만 입고 결혼식에
달랑 참석했으니 주례조차 아버지가 구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학교 동창인가 그랬는데 모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분이었다.
축하차 온 내 고등학교 친구 중 한명인 P군이 자기도 오늘 결혼식장에 와서 알았는데
주례선생님이 자기 이모부란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친구 분인 주례선생님이 내 고등학교 동창 이모부였던 것이다.
며칠 전 그 친구를 만나 저녁 식사를 했는데 주례 선생님인 자기 이모부가
강북에 사는데 평생 한번도 찾아 뵙지 않았다고 했더니만 나보러 예의도 없는 놈이라고
한마디 들었다.
#3.두 달 전인가 친구 K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아버님 이름이 누구시냐고...
비즈니스상 승용차 한 대에 K군이 운전하고 몇몇이 동승하고 지방으로
가던 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거래 상대방인 K군이 우신고등학교 나왔다는
말에 우리 아들도 그 학교 나왔다고 이야기 했던 것.
알고 보니 아들의 고등학교 친구 였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안 후 K군이 갑자기 “아버님‘으로 호칭을 바꾸어 아버지가
많이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4.이런 저런 이유로 아버지는 내 고등학교 친구 몇 명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와 별로 연락을 안하고 지내는데 아버지와 그 친구는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낸다. 인사이동 때마다 안부전화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연락을 하며 나보다 소식을 더 잘 알고 있다.
누가 누구 친구인지 모르겠다.
세대간에도 코드가 통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요즈음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면 대부분 이런 전화다.
혹시 이런 회사가 어떤 회사니?
이런 단어가 있는데 뜻이 뭐니?
컴퓨터 하다가 안되는데 어떻게 하니?
바쁜 중에도 최대한 정성껏 가르쳐 드리지만 전화를 끊고나면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저분이 도대체 나에게 누구인가?
나의 대학 진학을 위해 나의 결혼을 위해 나이든 지금 이 순간도
내 그림의 밑바탕에 항상 아버지의 스케치가 깔려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버지의 의미는
유채색에 가리워진 무채색 마냥
구름 위에서 비추는 햇빛처럼 아슴푸레 하기만 하다.
내가 자식들에게 그러하듯이 아버지도 아마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먼 훗날 나는 아들에게 무엇에 관해 전화로 물어볼까?
지금도 아들과 대화가 가끔 삑사리가 나는데
세월이 흘러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쉽게 물어 볼 수 있는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