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훈은 1948 년생이다. 우리나이로 치면 이제 61 세이다. 그렇지만 그는 소설가로서는
신인에 속한다.
1995 년, 한 소방관의 치열한 삶을 소재로 한 첫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이라는 작품
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실험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왜 지금의 김훈과 차이를 두냐
하면, 첫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김훈 문체와는 많이 다르다.
지금 김훈의 문체가 현학적이고 건조한 데 비해 그 때의 문체는 역시 현학적이기는 하지
만, 만연체로 길게 늘어진 느낌이기 까닭이다. 지금의 김훈은 문장을 간결하고 짧게 쓴다.
그러나 그 때의 문장은 만연체로서 아주 길다.
따라서 본격적인 그의 작품은 2001 년에 동인 문학상을 받은 ‘칼의 노래’ 라 하겠다. 거기
서부터 김훈 특유의 허무주의적이며 비교적 간결하고 드라이한 문체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
다. 그 후로 그의 작품은 비슷한 문체로 이어지게 되는데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이것이
그를 대중적 작가로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겠다.
1948 년생이므로 신문기자였던 그는 12, 12 신군부 쿠데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글 잘 쓰기로 소문난 그를 가만 둘 리 없었다. 그에게 전두환 장군
의 ‘용비어천가’를 부탁했던 것이다. ‘한국일보’ 의 잘 나가던 기자였던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래, 내가 다 썼지, 제목은 ‘전두환 장군, 그 집념의 30 년 세월’ 이었을 거야. 부탁을 받고는 내가 다 쓴다고, 그럴 테니, 바른 말하는 내 후배들 제발 잡아가서 때리지 말라고 했어. 난 그 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아.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난 그 때 절실하게 느꼈어. 펜은 결코 칼보다 강할 수 없는 거야, 이건 실존의 문제라고. 힘이 센자들은 절대 칼이 더 약하다는 말을 안 하잖아. 그게 반증이라고 할 수 있지.”
- 한겨레 21 과의 인터뷰에서 -
그의 이 냉소적인 말은 그가 왜 허무주의적인 내용을 주로 쓰는 작가인 까닭을 잘 설
명해준다. 그는 자기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의 작품 ‘남한산성’ 에서 그
가 심정적으로 ‘주화파’ 인 최명길의 편이라는 심증을 가졌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의 특이한 문체에 대해 남한산성의 내용을 예로 들어 간단하게 말하겠다. 먼저 말한 바
와 같이 그의 최근 문체는 대체로 아주 간명하고 짧다. 거의 8~90 %의 문장이 영어로 말
하면 1, 2, 3 형식의 문장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남한산성을 통해 가장 긴 문장의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이것은 27 년 동안의 기자생활과, 역시 소설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재능인 그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보여주는 실증이 되겠다. ‘인조’ 가 청의
‘용골대’ 의 기마부대를 피해 원래 피신 목적지였던 강화도에 궁녀와 왕자들만 보내고 자신과
세자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피신하는 대목에서, 작가가 남한산성과 그 주변을
묘사하는 곳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이라고는 하나, 규국이 작아서 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 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 산봉우리에서 성 안이 손샅처럼 굽어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 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 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는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하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그 또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몇 번 반복해서 읽어 볼 것을 권한다)
- 남한산성 35~ 36 쪽 -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이 부분을 숨차게 따라가면서 눈 씻고 찾아보아도 온점(마침표)이
없어서 다소 놀랐다.
“새벽에 눈이 내렸다. 눈이 쌓여서 사공의 시체가 언 강 위에서 하얀 봉분을 이루었다. 강 건너 사공의 마을에서 말이 밤새 울부짖었다. 그날 새벽에 강은 상류부터 먼 하류까지 꽝꽝 얼어 붙었다.”
- 남한산성 47 쪽 -
소설 전체(363 쪽)가 위와 같이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가 아주 가끔씩 그 위의 문장과
같이 만연체의 문체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김훈 문장의 형식적 문체는 이렇게 마냥 늘어
지는 만연체에서 짧고 간결한 문체로 진화했다고 본다.
다시 내용으로 들어가서, 인조가 원래의 ‘파천’ 목적지였던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
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흐린 날은 일찍 저물었다. 창덕궁을 떠난 행렬이 남대문을 나와 도성을 막 벗어났을 때 눈이 또 내렸다. 홍제원 쪽에서말을 몰아 달려운 군관이 행렬 앞에 꿇어앉았다. 군관은 적의 추격이 이미 파주에 들어왔고, 기병의 선발대는 무악재 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또 한 부대는 양천, 김포 쪽을 막아서 강화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고 고했다. (중략) 그날 어가행렬은 강화를 단념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 남한산성 29 쪽 -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47일간의 남한산성 파천과 인조의 ‘삼 배 구 고두배’ 로 끝이 난
병자호란 이전 겨우 10 년 전에도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강화도로 파천한 사실이 있었
다는 거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 대목에서 정말 우리 역사에 대해 짜증이 났다. 적이
머리 위에서 공격했었고 공격할 분위기가 늘 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비하지 않
고 탁상공론의 당쟁에만 몰두했다는 말인가.
차라리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말고, 광해군의 북방정책 외교가 계속 이어졌다면? 이라는
가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역사적 가설이라는 게 늘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면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죽거나 곤경에 빠지는 것은 사대부들이 아니라 아녀자와 일반 백
성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도 국가적 위기가 오면 피해를 보는 것은 서민이듯이 말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
록이기에 광해군이 과연 지금의 기록과 같이 연산군과 더불어 왕의 칭호조차 박탈당할 만큼
잘 못했었는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전쟁이 나더라도 그닥 큰 피해가 없
을 수 있는 대신들의 권력을 위한 희생자가 광해군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계속)
2008.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