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 창공을 맴도는 고추잠자리, 가을 문턱에서 누런 빛 으로 변해가는 들판…경기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시위로 바람 잘날 없는 이곳은 가수 정태춘(50)씨의 고향이다.
정씨는 도두리에서 태어나 평택중ㆍ고를 졸업한 ‘평택 토박이’. 군대에 가기 전 3년 동안 고향 ‘황새 울’ 들판에서 경운기를 몰며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지난해 말과 연초 평화콘서트를 개최하며 기지이전 반대운동에 뛰어든 정씨는 고향 팽성 읍으로 미군기지 이전이 공식 발표되자 직접 시위에 참가했다. ]
9월 4일 (토요일),
전날 김원기의 돌연한 초대와 친구들과의 술자리의 뒤끝이 채 아물지 못한 상태로 오전 내내 고생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한강 둔치로 아침산책을 나갔다. 계절은 가도 옛날은 남는 법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강변의 웃자란 갈대숲에서 무상한 노래 말이 머리 한 켠 에서 맴돈다.
아침부터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는 사람, 속보를 하거나 가볍게 달리는 이들, 가끔씩 인라인을 타고 휘잉 달려가는 사람...
한여름의 햇살에 겨워하던 사람들의 몸짓이 되살아남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도 몸도 가벼워진다.
오후에 정신지체 발달장애 어린이 인라인스케이트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집사람이 예약 해 놓은 포크 페스티발(Back to the Campus)에 참가하기 위해 부랴부랴 택시로 연세대를 향했다. 동문으로 들어가 노천극장에 이르자 수많은 중년의 남녀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사실 대중가수들의 공연에 돈 내고 구경나온 일은 처음이다. 어색한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보니 나와 같이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집사람이 청바지를 입고 가면, 행사 티를 준다기에 십 여 년 만에 겨울 청바지를 입으며 툴툴거렸었는데 동년배의 사람들이 주체 못하는 뱃살과 허벅지를 청바지 속에 구겨 넣고 서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여섯시에 도착, 티켓을 교환하고 줄서서 기다리는데 기타 튜닝하는 소리가 어지럽고, 드럼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며 북의 둔중한 음파가 가슴을 두드린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가며 노천극장에 임시 번호표를 붙여놓은 자리들이 하나 둘씩 메워져 간다.
기다리던 공연의 시간을 지체하고, 한 시간 여 지난 뒤에 7시 반 쯤 포크 가수들(이름은 모르지만 포크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 가수들)이 나와 철지난 옛 노래들을 부르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사회자(기독교 방송 진행자인데 이름은 기억이 안남)가 마이크를 갖다 대면 목청껏 노래 부르는 모습과 함께 박수치며 좋아하는 사람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7080쇼에서 유발된 4,50대 청년들의 잊혀졌던 청춘과 낭만의 새로운 발견과 상업성의 획득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세상은 항상 새로운 것, 흥미로운 것을 찾아 과거로 돌아가는 법이다.
한대수의 실험적인 음악과 ‘물 좀 주소’, 김창완의 이날따라 터프한 연주와 노래 그리고 해바라기의 공연에 이어 정태춘 박은옥의 순서가 되었다.
“저는 김민기씨를 대단하게 평가합니다. 김민기씨 노래는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반면 내 초기 노래는 그렇지 않아요. 그분 노래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얼마간의 진보적, 저항적 부분들이 잘 정리된 좋은 노래들이었다고 보입니다. 내 옛노래에 그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최근 칠레의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 독일의 볼프 비오만 같은 외국의 진보적 가수들 노래를 들으면서 내 노래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 노래의 ‘대중성’이란 것도 실은 복잡합니다. <촛불> 같은 노래가 지금도 불려지고 있고 그래서 저도 그 노래 덕택에 작가 못지않은 수입을 갖고 살아요. 다수의 사람들은 그 노래를 사가고, 나는 ‘부끄럽다’고 안 부르고 있고, ...”
“이제까지의 내 노래가 ‘어렵다’고 얘기했었고, 그게 내 딜레마였어요. 내 노래가 과연 민중적인가 회의하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민중적인 것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틀은 민중적이지 않거든요. 가사가 단순해지면 관념적이고 추상화가 되어 버려요. 이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일단 편안하게 만들자, 가사의 비중을 좀더 높이 두어도 좋은 것 아니냐고 마음을 정했지요.”
정태춘은 이날 ‘북한강에서’와 ‘떠나가는 배’를 불렀다.
박은옥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곡중 가장 마음에 든다는 ‘봉숭아’를 애절하게 불렀다.
그리고 앵콜송으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아내와 나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음유시인으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잊었던 것을 안타까와 했고, 이렇게 만남을 기꺼워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정태춘의 음악을 회상하고 새로운 노래들을 찾아보았다.
그는 변치 않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전면 부정하겠다고 했지만 과거는 신발에 달라붙은 진흙처럼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떼어 내도 그 진흙은 그 곳에 있다. 그 걸씻어 내지 않는 한...
그는 기존의 음악성을 씻어 내듯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의 음악에는 예전의 그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변해 있었다. 그의 변신은 강한 메시지를 담은 가사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기존 음악의 주제가 한국인과 그들의 서정성이었다면, 변화한 음악의 주제에서도 한국인은 변치 않고 있으나 서정은 사라지고 경고성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 나름으로는 음악의 사회적인 역할에 착안한 듯 하지만 음악은 사회의 악과 싸우는 무기가 되기보다는 잔잔히 흐르는 물이 되어 사람들을 정화(淨化)시키는 기능을 하는 게 더 낫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고성을 짙은 메시지와 가사들은 여전히 한국적이었다. 그의 곡은 여전히 가라앉은 민요의 그 것이었다. 그는 변했으되, 변치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그 걸 가리켜 발전이라 한다. 그는 새로운 몇 곡과 함께 예전 노래들, 내가 아는 잘 알려진 노래 몇 개를 함께 불렀다. '기존 음악은 포기했다며? 후후...' 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후, 변해 버린 그를 용서하고 있었다.
나는 투사로서의 정태춘은 기억에 없다. 우리가 살던 시절에 김민기와 양희은의 노래는 살아 았었으나, 투사 김민기와 투사 양희은이 아니었듯이 오늘에 되살려 보는 정태춘도 여전히 투사라기 보다는 歌客 정태춘을 가슴에 담고 싶다. 체제와의 처절한 투쟁이나, 불에 타죽은 어린 아이들의 기억을 반추시키는 것 보다는 곱고 애잔한 끝맺음을 여전히 보듬고 있는 그런 음유시인으로서의 그를 추억하고 싶다.
나도 늙었나보다....
그리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의 무성의는 용서하련다. 청바지 입고 갔는데 티도 주지않고...
허기야 이런 공연을 다시 찾을 날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요차나~@
다음의 노래들을 연결해주렴(부탁해~!!)
1. 떠나가는 배
2. 북한강에서
3. 시인의 마을
4. 촛불
5. 봉숭아
6. 92년장마 종로에서
7.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