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추 때가 되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제 그녀가 나타날 것이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녀는 빨래를 하고 있던지, 혹은 발을 씻고 있을 것이고 한 줄로 징검다리를 건너던 아이들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미친년아’를 합창하며 득달같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면서 혓바닥을 내밀고 용용대거나, 개울의 조약돌을 집어 던지기도 하고 혹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길 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장난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댓가지가 삐죽이 솟아난 소쿠리에 몇 개 안되는 빨래를 담아 군산 댁의 과수원이 있는 야산 쪽으로 텀벙거리며 개울을 건너 갈 것이다.
마을 뒷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이 풍경은 이제 마을의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한동안은 그런 아이들을 야단치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짐짓 모른 체하고 지나쳤다.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개울가 바위 뒤에 쪼그리고 앉아 이 광경을 훔쳐보는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어린 탓에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소년은 아이들이 그녀를 희롱하는 것에 함께 어울려 보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앞섬을 더욱 느끼곤 했다.
소년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군산 댁의 과수원 쪽을 놓치지 않고 있음에도 그녀의 흰 저고리가 도무지 나타나질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구경거리는 어제로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것은 며칠 전에 소년의 집 사랑에서 마을 아낙들이 모여 나누던 이야기를 그가 엿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년이 애를 가졌다고요? 서방도 없는 것이 무슨 애를......“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요. 그년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쫒아 내야 한다구 안합디까.”
“애 가졌다는 건 확실한 거야?”
“맞겠지요 뭐. 망측해라. 이러다 누구 시앗볼 일 생기는 거 아냐?”
“그년이 마을 남정네들을 죄 홀리구 다닌다면서요?”
“그만해두 다행이게. 어린 사내애들을 데려다가 고추를 떼간데나 어쩐데나.”
“이러구 있을게 아니라 내일이라두 당장 그년을 마을에서 쫒아내지요.”
“그래요. 더 이상 놔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네요.”
개울 저편으로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곱, 여덟 명쯤 되는 그들은 항시 그렇게 뭉쳐 다녔다. 대장 격인 길수 라는 아이는 학교에서 무슨 운동 선수라고 했고 초등학생이면서도 어른과 엇비슷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은 일단 징검다리 앞에 모여 섰다. 이쪽을 쳐다보며 웅성거리는 낌새가 그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반복되던 일과중의 한가지가 사라진데 대한 서운함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소년은 여지껏 초조하던 마음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했음인지 아이들은 한사람씩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장 마을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개울에는 다시 따가운 햇살만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소년은 바위 그늘로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왠지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허전한 마음에 소년은 방금 아이들이 건너 온 징검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아직까지 징검다리를 혼자 건너본 기억을 갖고있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정해준 것도 아니건만 소년의 활동영역은 늘 징검다리 안쪽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사이 징검다리의 첫 번째 돌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군산 댁의 과수원까지는 의외로 먼 거리였다. 지난해 가을, 소년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갈 때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지금 빤히 보이는 과수원은 계속 가고있음에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듯 싶었다. 따갑던 햇살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느끼면서 소년은 과수원께에 다다랐다. 산 아랫녁에서 시작되는 과수원은 산을 타고 철망이 계속 이어졌으며 지난 가을 소년의 두 주먹을 합한 것보다도 더 큰 국광을 주렁주렁 늘어뜨렸던 사과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철망을 따라 오르면서 소년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곳 까지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소년을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등성이까지 오른 소년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군산 댁의 과수원은 저 아래에 있었고 그가 건너온 징검다리는 아주 까마득히 보였다. 이제 계곡까진 내리막이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소년을 계속 붙잡았다. 계곡까지 못 미쳐서 펑퍼짐하고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소년은 그 곳까지만 갔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던 까닭에 소년은 금방 바위까지 갈 수 있었다. 그는 단숨에 바위위로 올라섰다. 자신이 홀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돌아가면 반드시 어머니에게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였다. 소년의 눈에 희끗한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계곡에서 였다. 흰 빛의 치마저고리, 흐트러진 머리칼, 그녀였다. 반가움에 자랑스러움이 겹치는 순간 소년은 그녀가 어린이들의 고추를 떼가는 미친년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말았다.
“미친년아.”
등을 보인 채 나물이라도 캐고 있었던 듯 싶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이 왈칵 소년의 덜미를 잡았다. 자신이 그녀를 불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쪽이 옳은 건지도 몰랐다. 구르듯이 바위에서 내려온 소년은 숲속으로 내달렸다. 길을 따라 도망가면 그녀에게 잡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추를 떼일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곁들여진 채였다. 무슨 가시에 볼이 긁히기도 했고 등줄기에 서늘한 물방울이 내리 긋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감지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좀 전의 자랑스러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경솔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 감만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년은 마침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오래된 낙엽들이 소년의 종아리까지 덮어 버리는 곳이었다.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졌고 생소한 숲의 한가운데 놓여진 소년에게는 또 다른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여느 때 같으면 울음이라도 나오련만 소년은 우는 법마저도 잊고 있는 듯 했다. 낙엽을 헤쳐가면서 주위를 돌아다녔지만 과수원도 개울물도 나타나주질 않았다.
사방은 오직 나무들과 낙엽 뿐 이였다. 돌아다닐 기력마저 모조리 상실한 소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끝이 싸해오는 참이었다. 문득 나무들 사이로 하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였다. 소년은 전신에서 힘이 주루룩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무도 낙엽도 그리고 그녀도 몽롱하게 멀어져 갔다.
“그 미친 것이 경수를 여기까지 업고 왔다고요?”
“그렇다니까 그러네. 경수도 그년도 온통 피땀으로 범벅이드래요.”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래요?”
“낸들 알겠수, 경수 엄마가 그년을 만나기는 했다던데......”
소년이 깨어난 곳은 그의 집 방안이었다. 넓은 방의 한 가운데 홀로 그가 누워있었고 머리맡에는 대야와 물수건이 놓여있었다. 옆방에서 마을 아낙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소년이 누워있는 방의 정적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집 종손 고추나 안 떼었는지 모르겠네.”
“경수엄마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손가락하나 까닥거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소년이었으나 더없이 편안하기만 한 마음이 이상스러웠다. 그는 지금 꿈의 편린과도 같은 아스라한 기억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포근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등에 업혀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묻어 나오는 아늑한 냄새에 취한 채 까마득하던 숲을 헤쳐 나오던.....
“늦었는데 그만들 돌아가잖구, 내 보기에는 이쁘구 똑똑하기만 하던데. 말을 좀 더듬어서 그렇지......”
평상시 답지 않게 언성을 높인 소년의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