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성적은 형편없었다. 석차는 뒤에서부터 세는 게 훨씬 빨랐다. 부모님들은 성적표를 보시더니 혀를 끌끌 찼다. 기껏 하숙까지 하면서 공부하더니 더 나빠졌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난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모두 학교를 잘못 들어가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썩어먹을 학교. 학생들이라는 게 놀 줄도 모르는 공부하는 기계들이고 선생들도 가르칠 줄이나 알았지 인간적으로 껴안아주는 선생은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인간적인 감화를 준 선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있는 시간은 엄청난 무게로 날 짓눌렀다. 난 이런저런 핑계로 타락을 합리화했으며 타락하지않으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타락하지 않았다면 자살했을 것이다. 나에게 타락은 해방구였다.
경순이를 아주 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선뜻 연락하기가 미안했다. 그 동안 바람 피운 사실을 모를 것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경순이를 만나지 않은지 만 석 달이 지난 정월 초였다. 오후 늦게 경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어쩜 그럴 수가 있니? 내가 공부가 좀 중요하다고 했기로서니 전화 한 통도 안 하니?”
“미안해. 하숙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내기가 힘들어서 ---.”
“지금 나올 수 있어? 여기 ㅇㅇ 제과점이야.”
난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잃어버렸던 돈이라도 찾은 듯 반가워서 달려나갔다. 오, 나의 태양! 난 그대를 다시는 떠나지 않겠어. 뭐, 그런 마음이었다. 경순이가 가르쳐준 대로 퇴계로 대한극장 옆에 있는 제과점으로 갔다. 하루종일 온 눈이 쌓여서 자동차 바퀴는 체인으로 감겨 시끄러웠다. 제과점 입구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내 공기가 따뜻했다. 카운터에 있던 경순이가 웃으며 날 반겼다. 경순이가 눈을 살짝 흘기었는데 난 놀라서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경순이는 몸에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제과점은 꽤 넓었고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이번 겨울방학때부터 여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사실은 이번에 맛있는 빵이 나와서 널 부른 거야. 자, 앉아봐.”
난 경순이가 이끄는 대로 창가에 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경순이는 주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안에 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에게 말을 했다. 난, 안 보는 척 하면서 유리창 너머의 행인과 차들을 바라보았다. 하얀 하늘이 잿빛으로 변해가면서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움츠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추워보였다. 이윽고 경순이가 쟁반에 담은 빵을 가지고 나왔다. 사실 그건 빵이 아니었다. 빵을 예쁘게 쌓아서 그 위에 크림을 바른 것으로 조그만 케이크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에는 촛대가 꽂혀있었다. 난 오늘이 경순이의 생일인가 했다. 그러나 경순이의 생일은 5월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경순이가 말했다.
“축하해. 너의 생일이 좀 지나긴 했지만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네 생일날 너의 집에 전화했었는데 네가 하숙하고 있다더라. 얼마나 불쌍한지 네 하숙방으로 가고 싶었는데 참았어. 너 공부해야 되잖아.”
“오지 그랬어.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전화하지 않고 왜 이제 한 거야?”
“이 제과점 주인하고 좀 친해진 다음에 전화하려고 했지. 그래야 공짜로 케이크를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목이 메이어 잠시 말을 못하자 경순이가 촛불을 끄라고 했다. 실내에 흘러나오던 음악은 어느새 생일축하 곡으로 바뀌어 있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내가 촛불을 끄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집에서 생일케이크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감격을 느껴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난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왕자였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환대를 받자 경순이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핑 돌았다. 경순이도 나의 눈에서 눈물 그림자를 보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촛불을 끄자 팡파레가 울려나왔고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순이가 내미는 칼로 케이크를 자르자 경순이는 그것들을 접시에 하나씩 담아 주변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다. 경순이가 바지주머니에서 선물꾸러미를 꺼내어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선물이야. 한 달도 넘어서 녹슬었을지도 몰라. 네 방에 가서 보니까 죄다 볼펜하고 연필 뿐이더라고. 그래서 하나 샀어. 맘에 드나 모르겠다.”
포장을 뜯어보니 만년필이었다. 비싼 외제였다.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이렇게 마음씨 고운 애를 두고 다른 애를 사귀었다니 몹쓸 짓이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나를 이중인격자라고 욕할 것이다. 점잔은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솔직히 나의 과오를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순이는 곧 일을 끝내고 나가자고 했다. 오늘은 나 때문에 특별히 일찍 퇴근한다고 했다.
경순이는 나를 데리고 명동으로 갔다. 선불을 받았다면서 자기가 한 턱 쓰겠다고 했다. 레스토랑에 가서 비프 스테이크를 먹었다. 포도주도 한 잔씩 마셨다. 경순이는 날 즐겁게 하려는 듯 계속 웃는 낯으로 떠들었다. 그러나 경순이가 하는 얘기는 하나도 귀담아들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자기 친구들이나 오빠나 동생들 이야기였다. 나도 화제거리가 없긴 경순이와 마찬가지였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연인들의 모습은 훨씬 의젓하고 성숙하고 멋있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형편없이 초라해 보였다. 겉으로야 분위기 있게 앉아있지만 내 속은 비참하기까지 했다. 정말 비참했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우리는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나는 경순이를 즐겁게 해줄 아무런 이야기도 갖고있지 않았다. 멋진 음악이며 고즈넉한 분위기가 오히려 나를 죄는 고문이었다.
그러다 난 문득 경순이와 자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내 생일이니까 어쩌면 경순이가 내 청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자면 사랑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내 입술에서 거의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려는 찰나 Dire Straits의 Sultans of Swing이 들렸다. 아, 하필 이 순간에 이 노래가 나오다니. 이 노래만 들으면 왜 그런지 어릴 적 친구가 생각났다. 순간 고백의 말을 입 속으로 도로 삼켰다. 어릴 적 나의 친구는 입이 무거웠다. 내가 아무리 옆에서 떠들고 웃고 짓이겨도 싱긋 웃고는 그만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언제나 무거운 중력으로 내 좁은 어깨를 눌렀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진실이었고 가슴을 아련하게 적시는 이야기였다.
전자기타의 묵직한 비트가 귀를 때릴 때마다 친구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여학생들을 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마치 돌부처처럼 의젓했다. 내가 답답한 나의 마음을 놈에게 고백하면 놈은 담담한 표정으로 다 들어주고는 아무 말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놈의 침묵에서 야릇한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아마 그건 그 놈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으니 침묵으로 일관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어설픈 대답보다 백배 나은 것이었다. 놈은 겸손했고 그래서 지혜로웠다. 난 놈의 겸손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보았지만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나의 겸손은 김빠진 맥주처럼 아무런 멋도 없었다. 내가 겸손한 것은 나약하고 힘없는 굴종처럼 보였다. 바위처럼 의젓한 놈의 겸손에 이르기엔 난 너무 가벼웠다. 금방 한 말도 뒤집기 일쑤였고 공부하겠다는 결심이 삼일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 친구의 환영이 내 입을 막자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으로 빠져들었다.대화가 겉돌고 나의 대꾸도 잦아들자 끝내 경순이의 표정도 굳어지고 말았다. 모든 게 나의 책임이었다.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경순이의 애틋한 뜻에도 불구하고 나는 깊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난 거의 울고싶은 기분이 되었고 경순이는 자꾸 시계를 보았다. 비참한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실토하고 말았다.
“사실, 그 동안 나 다른 애를 만났었어.”
“뭐? 그럼 공부하려고 날 안 만났던 게 아니란 말이야?”
“미안해. 그렇게 됐어. 내 실수였어.”
“그랬었구나. 난 네 공부에 방해될까 봐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은 거였는데.”
“미안하다. 난 그런 놈이다.”
경순이는 울면서 뛰어나갔다. 난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어서 경순이를 잡고 싶었으나 경순이가 너무 빨리 나가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다. 난 남은 포도주를 마저 마셨다. 어림짐작으로 계산해도 만원은 나올 것 같았는데 난 오천원밖에 없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다 웨이터가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에 잽싸게 뛰어나왔다. 계단을 내려 밖으로 나왔을 때 웨이터가 날 불렀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웨이터가 뒤쫓아 왔으나 날 잡을 수 없었다. 난 우리학교에서 100미터 달리기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다행히 잡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경순이에게 했던 고백을 후회했다. 거리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에 비친 눈은 그림 같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경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레스토랑에서 돈도 안내고 갔니? 내가 다시 갔었는데 웨이터가 그러더라. 네가 돈도 안내고 도망갔다고. 애가 왜 그러니? 창피하게. 돈이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
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담배를 피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그럴까? 난 왜 그럴까? 왜 내 주위의 사람들과 모두 원수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건 꼭 나의 책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겨우 고2짜리 학생이 감당해야 할 운명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정말 어딘가에 절대자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절대자는 지구보다도 더 크며 지구 주위를 날아다니며 현미경 같은 눈으로 모든 지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초월적 능력으로 지구인들 하나하나의 앞날을 세밀하게 조직해서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별히 나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아서 나의 운명은 불행하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는 아무리 해도 그 절대자의 의지를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난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난 절대자가 유기한 하찮은 놈이다.
나의 친구들은 나를 비웃지않았다. 선생이 때리고 급우들이 비웃어도 나의 친구들은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내가 칠판 앞에 나가서 더듬거리며 수학문제를 풀고 들어와도 내친구들은 잘했다고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고, 국어시간에 글을 읽을 때도 떨려서 떠듬거렸으나 내친구들은 잘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해 겨울방학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당구장에서 술집에서 다방에서 친구 집에서 우리는 담배를 피우며 몰려다녔다. 놈들하고 있으면 여학생을 만날 기회도 가끔 있었다. 미팅도 더러 하고 다방에 오는 여자들을 꼬시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맘에 드는 여학생에게 붙어서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놀아도 경순이를 아주 잊을 수는 없었다. 경순이는 이미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가슴을 도려내지 않는 이상 경순이를 잊을 수는 없었다.
난 나의 문제를 어릴 적부터의 친구 놈에게 상담했다. 하긴 놈은 시인이었기 때문에 내 문제 정도는 충분히 상담할 수 있었다. 그건 선생님들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 놈에게 경순이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경순이 자신도 창피해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다 얘기했다. 놈은 역시 시인답게 놀라지 않고 끝까지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사랑을 고백하려던 순간 놈의 수염이 생각나서 고백을 못했다는 것까지 다 말했다. 역시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처 같은 미소만 띨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말만 무슨 도사처럼 지껄였다.
“아직 정렬이 부족한 거야. 뜨거움은 쇠도 녹일 수 있어.”
“난 그 애 생각을 하면서 딸딸이도 친다. 여기서 얼마나 더 뜨거워야 하는 거냐?”
“그 정도면 됐다. 그런데 뜨거운 것을 담고 있으면 그릇이 타지.”
“그건 무슨 귀신 염불하는 소리냐?”
“그걸 모르면 아직 덜 뜨거운 거야. 더 기다려 봐!”
난 놈의 말대로 차분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때는 때대로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안 되는걸 억지로 하려다가 피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법고시 본다고 장가도 못 가고 총각귀신으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 수고, 우리 고향 사람 하나는 육사 생도 시절 5.16에 괜히 반대하다가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 우리 아버지는 노름 바둑을 하다가 세간 살림깨나 날렸다. 모두가 다 박정희 대통령의 하면 된다는 새마을 정신 탓이다. 해도해도 안 되는 것을 옆에서 된다고 바람 넣으면 얼치기 백성이 따라 하다가 신세 망치는 것이다.
열흘 동안 한번도 경순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쯤 경순이가 제풀에 내게 넘어올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경순이는 소 힘줄만큼이나 질겼다. 1월 중순이 가면서 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방학이 다 가도록 빈 달력만 보다가 날 샐 것 같았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일요일인데 아침부터 눈이 내리더니 오후 들어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집에 앉아서 혼자 구경하는 눈은 너무 쓸쓸했다. 그제서야 난 무릎을 쳤다. 그래 이제야 때가 찬 거다. 경순이 집에 전화를 걸까 했으나 일언지하에 퇴짜 맞을까 봐 겁났다. 그래서 한달음에 경순이 집으로 갔다. 눈길에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 세탁소 앞에 도착해서 동태를 살폈다. 세탁소 유리 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난 또 가슴이 떨려서 동네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위쪽 부자 동네로 올라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젠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다짐까지 굳게 하고 내려왔다. 경순이에게 나의 용기를 한번쯤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옥 마을로 눈을 차면서 내려오는데 아래쪽에서 눈에 익은 모습의 남자가 눈을 차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난 아는 사람에게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에 뒷골목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가 지나는 것을 훔쳐보았는데 그는 다름아니라 나의 죽마 고우였다. 난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저 놈이 여길 어떻게 왔을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녀석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뒤따라 가볼까 했으나 들킬 것 같았다. 그래서 세탁소 근처에 가서 숨어 있기로 했다. 놈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 틀림없이 세탁소 골목에서 어슬렁거릴 것이다.
걸음을 놀려 골목에 잠복하고 있으니 아니나다를까 놈이 나타나 두리번거렸다. 조금 뒤 경순이가 골목에 나와 놈을 만나는 것이었다. 둘을 따라 큰 길로 나가자 그들은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난 따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추운데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둘은 한 시간도 넘게 얘기를 나눴다. 밖에서 보니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놈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않았다.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둘은 나와서 헤어졌고 나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난 놈을 만날 수 없었다. 놈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난 놈에게 경순이를 양보할까도 생각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심장을 떼어낼 수는 있어도 내게서 경순이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느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그놈이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받아서 펴보니 시가 적혀 있었다.
친구의 모습이 쓸쓸하구나. 여기 와 손을 넣어라. 눈먼 사랑의 노래는 슬픈 법. 먼 길 뒤 돌아갈 곳은 그리운 고향이니 오늘은 잔 가득 고독을 마셔라. 잔 가득 슬픔을 따라라. 잔이 넘치는구나. 나는 가지 못할 시절을 밤새워 마시마. 꿈같은 그 시절 너무 서러워는 마라. 우린 동지였다가 한 때는 적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친구가 아닌가. 그래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밤을 마시지 않는가. 동이 트는구나. 이젠 가야 할 시간이다. 웃자. 별처럼 달처럼 우리는 또 어느 하늘에선가 만날 것이다.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난 녀석의 심보가 입맛에 썼다. 꼭 경순이를 포기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 심사가 뒤틀려 결국 따지고 말았다.
“너, 경순이 왜 만났어?”
역시 녀석은 아무 말도 못했다. 난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게 한 방 쥐어박았다. 녀석이 코를 쥐어 막았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난 그제서야 좀 분이 풀려서 손을 털었다.
“자식, 친구라고 봐 줬더니 남의 애인을 넘봐? 치사하게 그러면 못써, 알았어?”
녀석은 돌부처답게 아무 말도 않고 피식 웃으며 가버렸다. 난 놈의 웃음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뜻이거니 했다. 맞고도 가만 있을 놈은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학년 초에 소주 반 병으로 시작한 나의 주량은 1년 만에 배로 늘어나서 이젠 한 병도 거뜬히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개학이 얼마남지 않은 1월말이었다. 그날은 소주를 두 병 가까이 마셨다. 술에 취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경순이가 일하고 있는 제과점을 보았다. 10시가 넘었는데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난 문득 경순이가 보고싶어 버스에서 내렸다. 제과점 밖에서 유리창으로 보니 경순이가 앞치마를 매고 빵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웬 여자하고 카운터에서 돈을 세고 있었다.
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제과점 문을 밀고 들어갔다. 경순이가 날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 빵을 정리했다. 주인인 듯한 여자가 빵 사러 왔냐고 물었다. 난 그렇다고 말하고 빵을 골랐다. 주머니에 천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기 때문에 앙꼬 빵 두 개를 경순이에게 주었다. 그러자 경순이가 빵을 도로 진열대에 갖다 놓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난 술에 취해서도 창피한 생각이 들어 말도 못하고 밖으로 밀려나왔다. 나오면서 주머니에 있던 천원을 여자에게 던지듯 주고 나왔다. 밖으로 나온 경순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니?”
“너 보고싶어서 왔다. 왜, 내가 오면 안되니? 여기가 너희 집이야? 그리고 외상 값도 갚아야 하잖아.”
“별일이다. 무슨 외상 값을 갚아?”
“내 생일선물 값 말이야. 만년필하고 비프 스테이크 값 말이야. 너한테 받은 거 돌려줄 거야.”
“줄려면 빨리 주고 가!”
“그런데 오늘은 안 가져왔어. 대신 돈으로 줄게. 그런데 그게 난 돈이 없단 말이야 오늘은. 대신 내일 만나자. 그럼 다 갚을게.”
내 혀는 꼬부라지고 있었다.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통제가 되지 않았다. 급기야 다리가 풀리며 난 내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도블록 위에 쓰러졌다. 경순이는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운전수들이 나를 보고는 다 그냥 지나쳤다. 두 대를 그냥 보내고 나서 세 번째 만에 택시를 잡고 나를 끌어다 태웠다. 난 경순이의 마음 씀씀이가 또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런데 날 밀어넣은 경순이는 문을 닿더니 운전수에게 돈을 쥐어주며 신당동으로 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운전수는 알겠다며 출발했다. 난 기가 막혀서 막 달리기 시작한 택시를 세우고 내렸다. 택시는 돈도 안주고 가버렸다. 내가 다시 경순이에게 다가가자 경순이는 제과점에 들어가 앞치마를 벗어놓고는 도로 나왔다. 경순이가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했으나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서 소리를 질렀다.
“야, 여자가 그러는 게 어디 있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 정말 이럴 거야? 남자의 체면을 이렇게 구겨도 되는 거야?”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경순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러나 경순이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내더니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아, 경순이와 나는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 말인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처음부터 만나지나 말 것을. 경순이는 뛰다시피 걸었으므로 나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만치에서 경순이는 택시를 탔고 그 택시는 곧 떠나고 말았다. 난 돈이 한푼도 없었다. 망연자실해서 서 있으니까 경순이가 다시 왔다. 그 애가 날 택시에 태웠다. 이대로 어디 멀리 함께 가고 싶었으나 택시는 경순이네 동네에서 섰다. 난 택시 안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물었다.
“너, 양완식 알지. 너 걔하고 사귀지. 사실대로 말해!”
“너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니?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니?”
“너 걔하고 만나는 거 봤다 너희 동네 제과점에서.”
“너, 단단히 오해하고 있구나. 넌 어쩜 네 친구를 의심하니?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너 참 좋은 애라고 했어. 네가 날 좋아하니까 나보고 널 좋아할 수 없겠냐고 했어. 그 애는 시인이더라. 마음이 알래스카처럼 시원한 시인이었어. 사실 나도 그가 좋아질까 봐 혼났어. 하지만 난 널 좋아할 수가 없어. 미안하지만 세상에는 너 말고도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럼 갈게.”
경순이가 집으로 간 뒤에도 난 거리에 서서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친구를 의심하는 놈은 이대로 얼어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경순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가는 내려놓았다. 이젠 지나가는 차도 뜸했다. 시계는 11시 3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통금에 걸릴 것 같았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뛰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 뛰는데 눈이 얼은 빙판 길에서 몇 번이나 넘어졌다. 동네 어귀에 들어오자 12시였다. 이미 술도 다 깨었고 방범 아저씨들에게 잡혔을 때 손을 싹싹 빌고 나서야 가까스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온몸이 욱신거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팔다리고 엉덩이고 성한 데가 없었다. 거울을 보니 광대뼈도 긁혀서 시커먼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꼭 누구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끝내 경순이와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번 못하고 기나긴 겨울방학이 다 가고 말았다. 남는 건 허전함이었고 곯은 건 몸뚱어리고 괴로운 건 안타까운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