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풀어주세요.”
“아직 조사가 다 안 끝났습니다.”
“이제 겨우 대학 1학년 학생인데 무슨 조사를 한단 말이에요?”
“삼청교육대엔 고등학교 애들도 있어요! 탁명종은 걔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실제로 의식화 교육을 한다는 첩보도 받았고요.”
“제발 명종이를 풀어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수정이는 울기 시작했고 명종이도 울상이었는데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명종이의 얼굴을 수정이가 가슴에 껴안았다. 중위가 수정이를 보고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못 가요. 전 명종이와 같이 돌아갈 거에요.”
명종이의 머리를 손으로 감싼 수정이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중위가 난감한 듯 날 쳐다보다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했다. 난 수정이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조금 뒤 체구가 건장한 사병 두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수정이의 팔을 비틀어 명종이에게서 떼어내고 수정이를 양쪽에서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수정이는 고함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명종이는 체념한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거기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수정이와 나의 가방을 챙긴 뒤 명종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명종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 놈들의 폭행 때문에 너에 대해 말했다. 네가 경찰의 프락치라는 것도 다 말했다. 용서해 줘!”
내 귀에는 수정이의 비명소리만 들렸다. 명종이가 내게 한 말은 그 비명에 묻혀 확실히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명종이에게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명종아, 그래, 괜찮아. 몸 조심해라!”
빨간 벽돌집을 나오자 수정이는 끌려가면서도 명종이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악에 바친 외침이었다. 얼마나 시끄러웠던지 사병 막사와 사무실에서 군인들이 나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달려가자 중위가 말했다.
“여자 애는 서울로 버스 태워보내고 넌 이리로 도로 와! 할 일이 있으니까,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난 이미 중위의 은밀한 거래 타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교에 돌아가 수업을 받아야겠지만 지금 상황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 일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 명분이란 것이 명종이의 희생을 전제로 한 수정이의 행복이었지만 난 은밀한 희열로 가늘게 몸이 떨렸다. 수정이를 위한 것이라면 이보다 더 한 것도 했을 것이다. 망가져가는 명종이에게 수정이를 맡길 수는 없다. 이제부턴 내가 책임질 거다. 수정이를 위해 명종이는 이제 무대에서 사라져야 한다. 수정이와 함께 멋진 한 편의 극을 연출할 것이다.
수정이는 보안대 정문 밖으로 내몰리면서도 악을 쓰다가 급기야 눈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실신한 것이었다. 군인들의 비릿한 시선이 수정이의 하체를 훑고 있었다. 스커트가 말려올라 하얀 허벅지가 다 노출되었다. 얼른 부축해서 일으키니까 하얀 눈 위에 핏자국이 보였다. 덜컥 겁이나 중위에게 도움을 청했다. 수정이를 달래며 서 있었다. 조금 뒤 짚차가 나왔다. 운전병 혼자 몰고 온 짚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혈을 했으니 유산 되는 것은 아닌가. 뱃속의 아기가 걱정되었다. 문득 유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건 원 위치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응급실로 들어가 의사와 간호사에게 수정이를 맡겼다. 그다지 크지 않은 병원이었지만 다행히 산부인과도 있었다. 그들은 칸막이를 치고 검진을 시작했다. 운전병을 돌려보내고 병원 복도에 앉아 기다렸다. 30여분 뒤 의사가 나오더니 말했다.
“절대로 안정이 필요합니다. 하마터면 유산될 뻔했어요. 임산부가 건강하니까 다행이지.”
기분이 묘했다. 나의 표정을 보고 의사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차라리 유산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의사에게 유산시켜 달라고 할뻔했다. 병실로 들어가니 수정이는 링거를 팔뚝에 꽂은 채 자고 있었다. 자는 모습이 평화스러워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했던 생각이 부끄러웠다. 그래, 자라. 넌 너무 먼 길을 나왔다. 어린 네가 고생이구나. 이젠 내가 지켜줄게. 걱정말고 푹 쉬어라. 그렇게 속으로 말했다. 수정이는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깨어나지 않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수정아, 아무 걱정 말고 여기 좀 있어. 나 명종이한테 갔다 올게.”
“나도 갈 거야.”
“안돼. 넌 쉬어야 돼. 애기도 생각해야지.”
수정이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이때는 꼭 수정이가 나의 여자 같았고 뱃속에 든 아기도 내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수정이를 안심시킨 뒤 난 보안대로 돌아왔다. 정문 위병에게 내 이름을 대고 아까 그 중위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난 벌써 중위와 한 편이 된 듯 그가 낯설지 않다고 느껴졌다. 위병이 전화를 하더니 나보고 중위의 사무실로 가라고 했다. 연병장을 지나 그의 사무실로 갔으나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나무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아무래도 중위의 속임수에 말려든 느낌이 들었다. 명종이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자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수정이를 위한다지만 그건 무리였다. 진실은 아무리 덮으려고 해도 언젠가는 밝혀지는 것이다.
담배를 다 피우기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까말까 망설이다가 혹시나 해서 받으니 중위였다. 명종이가 있는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연병장의 눈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눈이 햇빛에 녹으며 땅이 진창이 되었다. 걸을 때마다 내 구두 바닥에 진흙이 붙었다 떨어졌다. 바지가랑이는 금새 흙탕이 튀겼다. 집으로 들어가자 중위가 작은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