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부슬 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여자가 있다.
대학교 4학년 때이다.
그 때는 비 오는 날 우산 갖고 나오면 10번이면 12번 잃어버리던 시절이었다. 그 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지만 난 우산도 없이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9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을 꺼다. 내 옆자리의 여학생이 공부가 끝났는지 가방을 주섬 주섬 챙겨 나간다. 의자 밑에 있는 우산을 두고서 말이다.
난 말끄러미 남겨진 우산과 멀어지는 여학생의 뒷 모습을 번갈아 보다 우산을 내 가방 뒤로 숨긴다. 도서관 문 밖을 나서다 그녀는.... 그래, 비 오는 날 떠 오른 여자이니깐 편의상 R이라고 해두자, R은 빗줄기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우산을 찾는다. 그 자리에 우산이 있을 리 없다. 당황한 R은 내게 우산을 못 봤느냐고 묻는다. 나는 못 봤다고 한다.
R은 우연히 내 가방 뒤에서 삐죽 삐져 나온 우산 손잡이를 발견한다. 자기 것 같다고 볼 수 있냐고 물어 온다. 나는 무슨 말이냐며 짐짓 화를 낸다. R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계속 ‘우산 주세요’만 반복한다. 나는 우산의 상표와 특징을 말해 보라고 한다. R은 그런걸 어떻게 아냐고 말도 안된다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R에게 협상을 한다. 지하철역까지 씌워 주면 돌려 주겠다고 인심쓰듯이 이야기 한다. 이 정도에서 위기를 모면하려 R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한다.
우리는 비 내리는 풍경속으로 우산을 쓰고 걸어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의 짖굳은 외피를 벗고 난 낭만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건넨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온 종일 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냐고 물어 보았던가, 그것은 확실치 않다.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치는 소리로 우산 속 세상은 안개 속 하나의 섬이 된다. 나는 R에게 이 작은 인연을 예쁘게 그리기 위해 맥주 한잔을 하자고 한다. R은 순순히 동의한다. 한양 호프에서 맥주잔을 들고 힘차게 건배한다. 난 예기치 않았던 작업이 너무도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비는 참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잠시 R은 느닷없이 주르륵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까 제가 장난이 지나쳤다면 사과드린다고 예의 바른 소년 같은 표정을 짓는다. R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연방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다.
나는 당황하며 급기야 손수건을 꺼내 건네준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R은 눈물을 거두며 미안하단다. 젠장 만난 지 30분도 안 된 사람 앞에서 실컷 울어 놓고는 이제 와서 미안하다니... 나는 슬며시 이유를 묻는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단다. 시골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며 고생하시는 엄마 생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단다. 나는 작금의 사태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R의 빈 글라스에 맥주를 채우며 어머니를 몹시 사랑하시나 봐요 라며 상투적인 위로의 말을 던진다.
R은 그동안 취업을 위해 연예는 고사하고 여자 친구도 제대로 만나지 않은 채 오로지 공부만 하며 지내 왔단다. 그러다 오늘 맥주 한잔을 마시자 복 받쳤던 감정들이 분출된 것 같다고 그런다.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기는 꼭 취직을 해야 한다고 했다.
R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바람에 나는 오늘의 작업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그렇게 그날 R의 술주정을 들어주며 열심히 술을 따라 준다. 결국 그 날 난 R을 그녀의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다.
다음 날 나는 도서관에 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제 그 자리로 간다.
R은 없다. 오후 늦게까지 R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저녁을 먹고 한가롭게 커피한잔을 한다. 그 때 난 우연히 R을 발견한다.
R은 식당 입구 창가쪽에서 웬 남자와 정담을 나누고 있다.
나는 순간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내가 딱히 배신감을 느껴야 할 정당한 이유는 없지만 R은 그저 다소곳이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고 있어야만 될 것 같다. 어머니만 그리워 하면서 말이다. 나는 망설인다. 인사를 건넬까.... 속은 괜찮냐고 물어볼까.... 나는 R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다가간다. R은 나를 발견하고는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한다. 앞의 남자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나서 내게 다가선다.
어제 참 고마웠다, 자기가 실수 한 건 없냐며 먼저 말을 술술 풀어 놓는다. 실수? R이 정말 실수라도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해본다. 난 R에게 실수할 기회를 다시 주기 위해 오늘 저녁 볼 수 있냐고 물어 본다. R은 오늘은 좀 곤란하다며 내일 후문에서 6시에서 만나자고 한다.
다음 날 비가 장대비처럼 내려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쓰고 R을 기다린다. R은 물안개처럼 유유히 빗속에서 나타난다. 빗방울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가 밀려와 나는 아득해진다. 80주점에서 오늘의 실수를 위해, 방어기제를 만들어 놓으려 열심히 술을 마신다.
몇 번의 천둥이 쳤던가, 어느 새 우린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를 기대고 있었다. 그 날 R은 울지 않는다. 아니,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난 어제 같이 있던 남자가 궁금했으나 그런 것 따위는 대범하게 묻지 않는다.
드디어 R은 술잔을 앞에 놓고 잠들어 버린다.
자, 이제 실수 없이 실수를 하자.
나는 그녀를 억지로 깨워 모텔 사근장으로 데리고 간다.
아직 그치지 않은 거센 빗줄기 속에서 흔들리는 R의 은청색 마스카라가 미소를 머금은 듯 하다.
사근장의 백열등 불빛이 우릴 수줍게 맞이한다.
함께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R은 나보고 먼저 하란다. 나는 다소 달뜬 마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R은 침대에 스러져 있다.
자세히 보니 R의 가녀린 어깨가 소리없이 흔들리고 있다.
난 그녀를 위무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R은 혼자 있고 싶단다. 아니, 그럼 나보고 나가란 말인가...
나는 무슨 일이냐며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으나, R은 완강하다.
R은 갑자기 레인 코트를 걸치더니 밖으로 뛰쳐 나간다.
R은 우산도 없이 빗속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난 R의 뒤를 우산을 쓰고 그녀를 부르지 못하며 쫒아간다.
가로등불 아래 사나운 빗물만이 어지럽게 제 빛을 점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