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은 하루종일 술로 보낸 하루였다.
점심때는 대학 선배가 불러
참으로 오랜만에 신촌을 다시 찾았다.
점심식사인 회정식에 걸맞는 반주를 찾다 보니 정종이 생각났고
추운 계절인 탓인지 그 따끈함이 좋아
반주치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여유있는 점심식사를 하곤
동서울터미널에 나갔다.
내가 대장으로 있는 '백두대간'의 대원 신수철, 이제환이가
설악산 등반 떠난다기에
배웅겸 쏘주 한잔 하자는 생각이었지.
배낭 잔뜩 짊어지고 나온 넘들과
터미널 3층 기사식당에서 쏘주 한잔하고
원통가는 버스 태워 보냈다.
다음은 후배들과의 저녁약속이 남았다.
잠실로 이동, 신천역 새마을시장 고기집에서 후배들과 한잔 하는데
대학 친구넘한테 전화가 온다.
종로에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택시 타고 다시 종로로 나갔다.
그렇게 종로에서 한잔 하곤, 다시 차수 바꿔 광화문에서 마무리했다.
흠...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닌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는데
정작 남은건 보람이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와 백수의 우울한 무력감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집은 가야 하는데
택시 타고 수원까지 갈 기력도 없고 아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그냥 가까운 여관 찾아 들어갔다.
사실...그 택시비면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들어가는게 보다 실용적일게다.
마누라야 평소 내 할 나름이고...
그렇게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먹은 술의 量치고는 비교적 컨디션이 좋다.
얼른 나가 광화문 거리를 거닐고 싶을 정도다.
광화문은 국민학교(덕수), 중학교(중동)시절의 추억이 어린 곳이다.
돌이켜 보니 서울의 변화도 계단식인지라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아득한 옛 기억들이 우리세대엔 남아있는 것 같다.
에덴의 동쪽, 십계, 타워링의 국제극장,
시민회관 불구경,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는 우리들이 야구하던 공터였지.
그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며 광화문 지하도에 들어서다
경복궁을 바라보니
주산 북악산과 진산 북한산의 풍수를 배경으로 우뚝한 광화문의 모습에
王都의 권도가 물씬 느껴진다.
중앙청이 사라진 세종로의 모습에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것 같고
잔잔하지만 묵직하게 전해지는 역사의 숨결 때문인지...
나는 이 곳을 좋아 한다.
결국...청진동에서 해장국 한 술 뜨고
집에 돌아왔다.
오늘 신문을 보니...'광화문현판' 문제가 이슈가 되나 보다.
독재자 박통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개혁군주 정조의 글씨로 새롭게 짜집기된다고 한다.
하긴...드디어 올 것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권력자의 만용스런 붓놀림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는 뭔가 찝찝함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꼴통신문들의 유치한 연상법에 동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무엇보다, 내게 뭔가를 알아야 느낄 수 있음을 깊이 깨우쳐 준 유홍준선생은
곡학아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이제는 학자가 아닌 정책담당자로서
오히려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뜩이나 대립과 증오로 얼룩진 시대에
또 하나의 시비거리가 되지는 않았는지...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