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내가 회사 어학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영어강사 중에는 한국 여자와 결혼한 캐나다인 Trudo씨가 있었는데 눈이 크고 말이 별로 없어서 꼭 노루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그가 말이 없던 건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말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자기 집에 직원들을 초대해서 갔었는데 음식이 뷔페式으로 차려져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남편 동료를 초대하게 해준 Trudo의 마음씨 고운 아내는 예뻤는데 성격이 좀 깐깐해 보였다. Trudo가 아내 앞에서 쩔쩔 매는 모습이 맛난 음식을 먹는 중에도 언뜻 보였다. Trudo가 불쌍했지만 한국 여자의 기개 앞에 덩치 큰 서양인도 꼼짝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으쓱하기도 했다.
얼마 후 나는 박완서의 장편소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재미있게 읽고는 이걸 영문으로 번역해서 해외에 내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승낙도 받았다. 선생은 그걸 할 수 있겠냐며 걱정을 해주셨지만 난 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짧았지만 大작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아주 기뻤다. 그러나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Trudo가 옆에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더니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작업은 곧바로 시작되어 내가 영문으로 번역하면 Trudo가 그걸 집에 가져가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수정을 해왔다. 그는 소설이 아주 재미있다며 주인공 <오목>이가 너무 귀엽다고 했다. 50페이지 정도를 번역하는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주일에도 예배가 끝나면 오후에 기숙사에서나 사무실로 가서 번역을 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기가 싫어졌다.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와 함께 저 두툼한 책을 언제 다 하겠냐 싶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하기 싫은 건 정말 하기 싫었다. Trudo는 내 눈치만 보면서 왜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참, 착한 친구였다. 몇 달 뒤, Trudo는 캐나다로 떠나버렸고, 난 또 몇 년 뒤에 번역을 다시 시작할까 생각해보았으나 파일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