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 아이들이 방에서 장난하다가 CD꽂이를 쓰러뜨려서 가지런히 정리된 CD들이 와
르르 쏟아졌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집에 CD가 한 300여장쯤 된다. 심지어 옛날
대학 시절에 자주 듣던 LP판도 미련이 있어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찾아 듣는 일은
거의 없지만, 버리기 아까워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센스판보다 오히려 청계
천에서 구입한 소위 ‘빽판’ 이 세 배는 더 많다.
그런데 쏟아진 CD 중에 그 곽이 좀 독특한 게 눈에 띄었다. ‘느낌 2003’ 이라는, CD 두 장
이 들어가게끔 되어 있는 거였다. 첫 번째 CD는 ‘이기찬’의 ‘감기’, ‘보아’의 ‘늘’…… 등 발
라드 가요가 실려 있었고 두 번째 CD는 ‘케니 로긴스’의 'The More We Try' - 그랜드 백화
점 광고 음악으로 썼었고, 어쿠스틱 기타 선율이 인상적인 발라드 곡 - 를 비롯한 주로 80
년대 중반쯤의 팝 발라드 곡들이 실려있는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재작년 겨울의 어느 날, 관악산 번개 등산이 있을 때였다. 재식이와 나는
점심 때쯤 만나서 관악산을 함께 오르다가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데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
아서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왔다. 우리는 산 아래서 기다렸다가 아침부터 등산을 마치고 내
려오는 10명 가까운 팀과 합류했었다. 신림동 순대 타운에서 1차, 생맥주 2차, 나중에는 가
까이 사는 승필이 마눌님도 함께 만났었다. 알고보니 승필이 마눌님은 내가 잘 아는편인 서
문여고 불어 교사와 같은과 대학 동창이었다.
졸업하고 처음 만난 재식이와 나는 밤새도록 어울렸었고, 결국 필름이 끊어졌었다. 방학 때
라 푹 자고 배낭을 여니 그 CD가 있었는데, 그 동안 홈피에 글을 열심히 써준 원고료(?)로
승필이가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나에게, 하나는 재식이에게 줬던 모양이다. 나는 그날 필름
이 완전히 끊어져서 CD를 받은 사실조차 나중에 안 것이다. 받았을 당시 몇 번 듣고 까맣
게 잊고 보관하고 있다가 아이들이 CD꽂이 정리를 하게 만드는 바람에 다시 자동차로 가져
다가 오늘 아침에 또 듣는 기분이 이 글을 쓰게 만든다.
지난 5월 6일은 장성수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상가에서 ‘원기’를 만났다. 두 시간쯤 상가에
머물렀다가 원기가 선약이 있다며, 나도 같이 가도 되는 자리니 함께 가자는 거였다. 정우
영, 박래순, 이성민과 만나기로 했다나? 우리는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인 분당의 한 낚지볶
음집에 도착했다. 처음 가는 곳이면서 가게가 빌딩 안쪽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정우영’이는 이과 출신이라 학교 다닐 때는 몰랐었는데, 두 번 함께 등산을 하면서 알게 되
었다. 공학 박사인 그는 작년까지 숭실대 객원교수로 있다가 올해부터 대구의 DGIST(대구,
경북과학기술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단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대원
외국어고등학교' 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다니고 있다고 한다. 우리학교에서도 전교 1, 2등을
해야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거기를 수석으로 입학하다니! 김성우 외아들도 그 학교에
다니는 걸로 아는데, 동창들의 두뇌가 뛰어나니 자식들도 똑똑한가 보다. 우리는 건배 속에
축하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2차로 칵테일 바에 갔다. 습관대로 나는 바텐걸이 서 있던 스탠드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나머지 친구들은 테이블에 앉아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가 그리 재밌는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거였다. 나중에 근처에 사는 두 명의 친구들이 더 나왔다.
그 날도 결국은 3차까지 가고 말았다.
친구들은 알겠지만, 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자제력을 상실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엄청
난 숙취에 시달린다. 다른 것은 한 번 뜨거운 맛을 보면 다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지
만, 술에 관한한 시행착오가 없는 것 같다.
그날도 취기가 8부 능선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를 넘고 있었다. 그 때
‘정우영’이 내게 가만히 속삭이는 거였다.
- 오늘은 금요일, 지금 내가 살펴보니 내일 출근하는 친구는 너밖에 없는데, 너 괜찮겠니?
- 아,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는구나.
난,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짝 자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약간의
숙취로 고생이 되었지만, 정우영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각이나 결근을 하고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우영이는 참 현명한 친구라는 생각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 같이 술을 마시다보면 여러 종류의 친구들 모습을 보게 된다. 적당량
의 술을 마시고 늦지 않게 귀가하는 친구, 나와 죽이 맞아 밤새도록 마시고 아침에 편의점
에서 컵라면 같이 먹고 헤어지는 친구, 우영이처럼 술에 익사하기 직전에 구해주는 친구.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친구가 있는 한
만나야 할 거고 그 때마다 술을 마실 것이며, 이제 옛날과 달라서 과음하면 몸이 견디지 못하
고...
내가 가장 부러운 친구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 하면서도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도 잘 어울리
는 경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난 다시 태어난다 해도 술을 마실 것이다. 다시 말해
술 없는 삶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 아버지는 술 때문에 55살의 한창 나이에 교단을 떠나야 했다. 술 때문에 40대 후반에
콩팥을 하나 떼어내고도 거의 매일 술을 드시다가 결국 뇌출혈이라는 불행을 당하셨다. 쓰
러지시기 전에 의사로부터 술을 드시면 혈압이 높아 위험하다는 경고를 계속 들으시면서도
약주를 계속하신 거다. 몸의 반쪽이 마비되고 방향감각의 인지 능력을 상실하신 아버지 때
문에 우리 어머니와 식구들의 고생은 아버지가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신 10년 동안 계속 이
어졌었다.
술은 어느 정도 유전이란다. 나도 이제 조심할 나이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보다 늦게 장가
를 갔으니 아이들도 아직 어리다. 아주 입에 아니 댈 수도 없으며, 친구를 안 만날 수도 없
고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려는 본능이 있으니 이게 나의 딜레마다. 어쩌겠는가? 자제와 절
제, 그리고 ‘정우영’과 같은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할밖에...
2005.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