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병원을 집 드나들 듯 하였고
중이염 수술, 편도선 수술, 생명이 위험했던 순간까지 갔던 장중첩 증세
뼈가 약해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쉽게 뿌러져 쇠핀을 박으면서 기브스를 여러번 했던 나의 둘째 아들
자기옷의 단추조차도 잘 채우지 못하였고 달리기에서 항상 꼴찌였던 나의 둘째 아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를 초등학교를 일년 늦게 보내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었고
자카르타로 학교을 옮긴 초등학교 3 학년 성적표에 25/25 가 기재된 것을 보고 한달 개근한줄 알았더니 25명중 꼴찌였었고
선생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 숙제를 못해가서 아빠인 내가 학교에 불려가기도 하였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밤이 무서워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자려고 했던 철없던 나의 둘째 아들
약간의 자폐증세가 있어 정신과 상담을 받으려고 하였다가 이상한 약으로 애를 잘못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 상담 직전에 포기하기도 했었고
소아 녹내장 증세로 초등학교 2 학년때부터 지금까지 12년 동안 하루에 3번씩 안약을 넣는 나의 둘째 아들
시력을 완전히 잃을수도 있다는 의사의 무시무시한 말에 나홀로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점점 커가면서 병원가는 횟수도 줄기 시작했고 학교에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안압도 조금씩 좋아져 최근에는 안약을 하루에 한번씩만 넣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꼴찌에서 벗어나 어느덧 중간을 향해 달리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고
초등학교때 받아쓰기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중학교에 들어서서는 모범생축에 낄수도 있다는 소리도 듣기 시작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들의 요청으로 학교를 찾아가 왜 선생님이 수업을 열심히 안가르치냐고 항의까지 해야 하는 그런 이상한 상황으로 바뀌었고
고등학교의 느슨한 과학 수업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혼자서 Amazon을 통해 책을 구입해 인터넷 Youtube로 대학 강의를 듣곤 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초에 본 PSAT에서 240점 만점에 230점에 가까운 점수로 많은 학교선생님을 놀라게 하기도 했었고
고등학교 졸업때에는 학교내에서 최우수 줄업생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었다.
학교 시험이 어려워 모두가 시험을 잘 못 본 날에는 괜히 즐거워 하였고 시험이 쉬워 모두가 잘 본 날에는 집에 와서 왜 학교에서 시험을 너무 쉽게 내느냐고 엄마에게 괜히 불평을 하는 그런 이상한 학생으로 어느덧 변해 있었고
학교에서 배운적도 없는 생물과목에서 혼자 공부해서 AP에서 만점을 받는 등 수학, 물리, 화학 과목에서 SAT I, SAT II, AP, IB 시험에서 항상 만점을 받았었다
그러나 국제 경시대회 참여 실적이 없었고 우물안 개구리라 미국 Caltech 조기 지원에서 낙방을 하기도 했었지만
아들의 잠재성을 인정한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Likely Letter와 함께 전체 12명 정도 선발하는 과학부문 최우수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영예도 안았었다.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장 어렵다고 소문난 물리학 최고난도의 Class에서도 항상 A학점을 놓치지 않는 학생으로 성장한 나의 아들이 대견스러웠고 자랑스러웠다.
돈과 사회적인 출세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물리학이 좋아 계속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아들이 나중에 물리학 분야에 큰 학문적인 업적을 남겼으면 하는 솔직한 욕심도 없지는 않다.
" 아들아 ! 그저 네가 좋아하는 학문을 마음껏 해보거라...아빠가 뒤에서 열심히 밀어줄께..... "
" 그래서 한국사람들도 스포츠와 IT 분야뿐만 아니라 순수 과학분야에서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해보자꾸나...... "
팔불출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오늘은 왠지 나의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