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좋아하시나요?
11월의 아침을 거닐며 바라보는 푸른 가을 하늘의 텅빈 여운을 나는 참 좋아한답니다.
그 하늘 빛에 까닭없이 마음이 아릿해졌다면 아마도 당신은 세파에 지친 영혼을 가을 바람에 맑게 행구고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먼 시간 여행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33년전 우신 고등학교에 합격하고 나서 가난했던 우리 아버지는 잔치를 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상장을 받아오면 어김없이 그 상장들을 액자에 담아 온 벽을 도배하셨던 분이셨으니 우신고등학교의 합격 소식은 못내 참을 수 없는 기쁨이셨나 봅니다.
입학 시험은 수학 시험을 잘 본 탓인지 전교 석차 100등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후 반에서 성적이 10등 , 20등, 30등, 40등 정확히 등차 수열을 이루며 행진하자 참으로 인자하셨던 담임 선생님이 마대 자루로 힘차게 제 엉덩이를 내리 치셨습니다.
아팠습니다. 아픈 것만큼 제 마음도 쓸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안 한 것도 아니었지만 성적은 뚝뚝 떨어졌고 친구들에게 제법 웃음을 던져 주는 언행을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어울려 제대로 논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무위의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학년 때는 친구들 여럿이서 만리포에 놀러 갔다가 살구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계집아이들을 만나 제 마음도 파스텔 톤으로 물들기 시작했답니다.
당신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더러는 담배도 피고 더러는 가끔 술도 마시고 또 때로는 펜트 하우스를 돌려 보며 낄낄 거리기도 했나요?
그러나 그렇게 방황하고 무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막연하나마 내 자신의 꿈을 보듬으며 시린 별빛을 바라보기도 했지요.
고3이 되며 뒤 늦게 철들은(?) 우리들은 밤 늦도록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었고 그 때는 궁동에 떠오른 달도 환하게 제 빛을 온전히 비쳐주었고 교정의 야트막한 뒷 동산의 솔 숲 소리도 다 숨을 죽였습니다..
아, 문득 어느 국어 선생님의 수업 중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마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을 설명하셨을 때입니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자며 임산부 배의 끔틀거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학창 시절, 우리들은 우신 교정에서 얼마만큼 방황하기도 하고 또 그 만큼 꿈틀거리며 성숙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교정을 떠나왔던 그 길을 한 동안 당신과 나, 우리들은 잊고 지냈습니다.
등불처럼 켜지는 꽃처럼 20대의 당신의 삶에 사랑이 찾아 왔고 새로운 친구들이 술잔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우신의 영재처럼 당신은 서있는 자리에서 우뚝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도 고등학교 때 고요히 지내다가 대학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차게 지냈는지요...
당신의 몸에 싱싱한 비늘이 은빛으로 돋아나며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유영했는지요.
우리들은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하기 시작했고 회사에서 과장 부장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당신 형형한 눈빛 속에 가끔 습기가 차기도 했었습니다.
학창시절 온수동 홍콩 반점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던 당신,중년의 나이가 되어 신선한 회에 소주 한잔하고 단란한 곳에서 양주를 마시며 폼나게 노래를 부르고 사는데도 어쩐지 쓸쓸하다며 밤 늦은 시간 전화를 했었지요.
산다는 것이 이처럼 와락 대책없이 슬픔으로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하루의 노동을 하고.... 주말엔 아내와 영화를 보거나 축구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들 진로 문제로 고심하기도 하고...이 모든 풍경들이 때로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아, 물론 웃으며 살기, 긍정적으로 살기, 감사하며 살기, 단순하게 살기 등등의 행동 실천 강령을 되내이며 애써 웃으며 살려고 폼도 잡지만 내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쓸쓸함의 코드는 이렇게 투명한 가을 햇살에 무방비로 드러나고 맙니다.
불혹의 나이 마흔을 넘기며 나는 ‘세상 누구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다’ 고 너스레를 떨면서 나이 먹어가는 것을 자조했지만 당신은 인생 이모작 이야기를 하며 불모의 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천명의 나이 오십이 되며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내 욕망의 거처도 운신하지 못하는 내게 당신은 또 여행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숱한 당신의 여행 여정을 읽어 가며 난 감히 당신을 내 인생의 ‘싸부’로 모십니다.
당신을 인생의 ‘싸부’로 모시며 술 한잔 대접하지 못했지만 내 인생의 무늬를 감동으로 수 놓아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당신도 철 지난 바닷가의 노을을 좋아하나요
그대 이마위로 쏟아지는 황혼의 세례을 받으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주단으로 펼쳐지는 마지막 빛의 향연을 가슴으로 이어 받으며 난 당신과 함께 할 또 다른 30년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바닷가의 노을은 금새 소멸해 가지만 당신과 내가 펼쳐 놓을 주황의 주단은 아주 오래도록 은은히 빛날 것입니다.
그 주단위로 30년 추억의 힘으로 빚어진 따뜻한 시간들이 흐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