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을 읽기 전에
* Danger past God forgotten.
* 악조건 속에서도 사랑의 실천에 헌신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 이 글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 저의 주관적 견해이므로 개신교 신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양해 구합니다.
*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고발하시다가 유명을 달리하신 고 탁명환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이 글은 갈등을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개인의 체험사이므로, 필요하시다면 건전한 비판은 정중히 받아들이겠습니다.
2. 들어가는 말
언젠가부터 이렇게저렇게 가까워진 사람들과의 즐거운 모임에서 화제로 금기시 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지방색을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치 이야기고 셋째는 종교 이야기이다. 그
어려운 종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여간 조심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고 실제로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이 나라이
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와 인연이 닿았다.
그리고 서양 문학은 성서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문학을 공부한 나에게 성서는
교양을 위한 책으로서도 필독도서인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기독교와 실제가 다를 수 있
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전개할까 한다.
3. 소년 시절의 기억
나는 어릴 때 비교적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행정 구역상 본동 산 9번지 였으나, 주변
동네 사람들은 우리 마을을 산동네라고 부르고, 모든 문화 공간에 '산'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냥 가게라고 안 하고 꼭 '산가게' 라고 불렀다. 이런 마을을 지금은 달동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1년쯤 전, 그러니까 7살 때였다. 동네 친구들이 자주 올라가 놀
던 언덕 위에 약 오십 평 정도의 평평한 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 천막이 설치되더니
천막의 지붕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투명하고 두꺼운 비닐로 창을 내었기에 호기심 어린 시
선으로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맨 왼쪽에 제법 큰 종이 있고, 가운데는 바닥을 약간 높게
한 다음, 연단 위에 교탁이 있었다. 전체 바닥은 가마니를 깔아 놓았다.
어린 마음에 무엇을 하는 곳인가 매우 궁금했다. 사람들은 그 곳을 천막 교회라고 불렀으
며 실제로 몇 일 뒤에 영광 교회라고 초라한 간판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교회 쪽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호기심에 찬 나는 연년생 여동
생과 그곳에 가 보았다. 사람들이 우리 오누이를 보더니 반갑게 맞았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친절한 대접을 받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조차 생겼다. 종소리를 차차 작게
울리더니 " 기도합시다. "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한 스무 명쯤 모였다. '기도라는 것이 저
런 거구나.' 눈을 감고 양손을 모으고…… 모든 게 신기했다. 이어서 " 찬송합시다. " 라고
앞에 선 분(전도사일 것 같다)이 말씀하시면서 괘도로 된 악보를 넘겼다.
주의 영원한 팔에 안기세,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영원, 영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동생을 데리고 수요일, 일요일 이렇게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나갔
다. 설교가 특히 재미있었다. 그 때 들은 설교 중에 '돌아온 탕아' 라는 설교 말씀이 지금도
어렴풋이 목사님의 얼굴과 함께 떠오른다. 참 말씀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시는 분이었다.
천막 교회 즉 영광 교회가 들어선 것이 봄이었으나, 날씨가 제법 더워지자 천막의 옆부분
을 걷어 내고 예배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복사열로 인해 천막 안이 찌는 듯이 더웠기 때문
이었다. 저녁 때는 다시 천막을 내렸다. 심심했던 나는 일요일에는 하루종일 교회 근처에서
머물면서 예배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늦은 가을날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렸다. 날카로운 가위를 가지고
와서 천막을 자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전도사님이 교회 종을 울렸고, 사람들이 달려와 그들
을 말렸다. 행패를 부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린 나로서는 잘 몰랐지만, 꽤 실갱
이가 길었고 격렬했던 기억은 난다. 아마도 교회가 무허가이거나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사
람들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일 뿐.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천막교회의 지붕도 예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아마 내가 사
십 년 넘게 보아온 교회 중에 가장 성경 말씀답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그 겨울의 그 교
회 모습이라면 나의 지나친 주관적 감상주의겠지? 색색깔의 꼬마전구가 반짝반짝, 형형색색
의 금박지와 은박지가 번쩍번쩍, 교회 안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장식해 놓았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정말 시골의 잔칫날보다 더 좋았다. 하루도 예배를 거
르지 않은 내게는 푸짐한 선물과 함께 목사님의 칭찬이 길게 이어졌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
지 어려서 잘 몰랐지만, 나는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
가겠다고 결심했다. 배고팠던 시절에 떡도 실컷 먹어서 너무도 행복했다. 유치원도 다니지
못한 내게 교회는 공부 장소이자 놀이터이자, 학교 다음의 생활 공간이었다. 전도사님과 목
사님의 사랑 속에서, 자주 해주시는 성경 말씀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나의 신앙심도 날
로 깊어졌다. 자기 전에도 " 예수님, 고맙습니다. " 라고 기도하고 잠들었었다.
돈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때였지만, 과자 사먹을 돈을 모아 비록 아주 적은 액수지만 헌
금을 꼭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은혜를 받는 만큼 나도 고마움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해가 바뀌어 본동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친구들을 교회로 많이 안내했다.
- 교회에 가자. 교회에 가면 재미있는 말씀도 듣고, 노래도 부르고 참 좋다. 같이 가서 놀
자.
목사님과 전도사님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가 열심히 전도했다. 결국 몇 명의
친구들이 나의 인도에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으며, 신앙아래 우리의 우정도 두터워졌다.
그런데 교회의 신도 수가 많이 증가했다. 처음에는 예배보는 신도가 천막 안의 절반도 되지
않았었는데 1 년 반이 지난 이제는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런데 천막 교회가 들어선 지 약 2 년 반쯤 지났을 때였다. 목사님께서 감격해하시며, 다
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신도, 형제 자매 여러분 !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시어 날
씨가 추워지기 전에 우리 교회가 새로운 건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도로 옆의 작은
건물로 교회를 옮기에 된 것입니다. 모두 신도 여러분들 덕택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감
사합니다.
나도 기뻤다. 사실 가마니에 무릎꿇고 기도하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고 화장실 시설도
가건물이어서 아주 불편했었다. 날씨가 추우면 조개탄을 때기는 했지만 발이 시려울 정도였
었다. 그런데 벽돌로 지은 건물로 교회를 옮긴다는데 얼마나 기뻤겠는가.
나는 목사님, 전도사님과 손잡고 교회에 따라가 보았다. 한참을 내려가 길가의 평지
에 교회건물이 있었다. 건물이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는 컸다. 교회 이름이 걸려 있
었는데 하얀 나무 판자 위에 까만 글씨로 영광 교회라고 전의 교회에 걸었던 간판보다 크고
깨끗했다.
교회의 위치가 먼저 다니던 곳보다 우리집에서 멀었지만 쾌적한 건물로 옮긴 것이 너무
좋아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집에 어른이 없을 때는 네 살 아래였던 남동생까지 업
고 가서 예배를 보곤했다.
교회의 신도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전에는 행색이 초라한 신도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옷을 잘 차려입은 다시 말해 부유한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듯했
다.
그 때 본동 초등학교 같은 2 학년에, 태권도도 같이 다니고, 교회도 함께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가끔 교회를 빠지기도 할 정도의 신앙 생활을 하는 친구였다. 나는 물론 개
근이고. 그 친구네 집은 아버지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제법 부유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 반면에 우리 아버지는 절에 등산갈 때만 가시면서 불교신자라 교
회에 다니지 않으셨다.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처음에는 말리셨지만, 나쁜 짓 배우는 것은
아니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 때였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겪었다.
크리스마스날을 맞이하여, 출석 성적이 좋은 어린이에게 매년 선물을 주었다. 나는 매년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아왔다. 한 번도 예배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
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받을까? 전 날부터 마음이 설레며 좋은 선
물을 받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했다.
차례대로 이름을 부르는데, 전에는 아이들 수가 적었기 때문에 아무런 자료 없이 이름을
부르고 선물을 나누어주었지만, 이제는 아이들 수가 많아서 무슨 장부를 보고 아이들 이름
을 불렀다. 그런데 말이다. 이 때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한 달이면 두 번 꼴로 예배를 거
르던 내가 말한 친구는 제일 좋은 선물, 즉 2 층으로 된 자석 필통을 받았는데, 하루도 예배
를 빠지지 않은 나에게는 연필 두 자루를 주는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목사님 설교
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히 그 전도사고, 같은 목사님인데, 교회가 부자가 되
니 나같은 신도는 필요 없다는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아
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교회 문을 열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한꺼번에 두 자루의 연필을 부러뜨리려 했더니 힘이
부족해 부러지지 않았다. 한 자루씩 차례로 부러뜨려 교회 옥상에 던졌다.
그 후로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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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년 시절의 추억
어릴 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나에게 기독교에 대한 아주 심한 편견을 갖게 했다. 글쎄 '
내가 지나치게 피해의식의 성향이라 그랬을까? ' ' 다른 소년이어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세월은 흘러 나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었다. 안정된 직장을 비로소
갖게 된 것이다. 내 나이 스물 하고도 일곱이었다. 그렇게 한 2 년을 지냈는데, 내게 아주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집의 기둥이자 나의 커다란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께서 직장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것
이었다. 조퇴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서는 삼일 동안을 의식이 전혀 없이 주무시기
만 했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는데, 의사가 어머니와 나를 부르더니, 임종을 준비
해야 하니 가까운 친척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MRI 촬영 사진을 보여 주면서 하루 이틀 안
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삼분의 이가 넘는다는 것이었다. 막혔던 뇌혈관이 터져서 뇌 안에 피
떡이 만들어져 뇌세포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이
럴 때 필요할 것이다. 나는 땅이 꺼지는 듯, 앞이 노랗더니, 화장실가서 수돗물을 틀어 놓고
꺼이꺼이 울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건강하게 출근하셨던 분의 임종을 준비하라니……. 이제
겨우 55 세인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다행히 회복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 년 동안 세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 집안은 엉망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그것도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출근하
는 날이 더 많아졌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 신체의 기능을 하나씩 잃어가셨다. 처음
퇴원하셨을 때, 방향감각, 두 번째는 왼쪽 팔과 다리의 기능, 세 번째는 언어 감각을 제외한
모든 기억, 아버지는 대책 없이 무너져갔다. 나는 거기서 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깝고 최고
로 믿었던 분의 허망한 망가짐을 지켜봐야 했다. 나이 삼십이 다 되었는데도, 나의 사소한 의사
결정까지 좌지우지하시던 아버지께서 일 년의 투병 끝에 주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
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신 것이다.
나는 신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아무 판단도 할 수 없어서 직장도
쉬고 싶었다.
당시 여의도에 살던 나는 잠 못 이루는 어느 새벽에 무조건 성당으로 갔다. 신부님을 찾
았다. 신부님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나를 좀 다시 일으켜 달라고 애원했다. 당연히 신부님
께서는 나를 믿음의 길로 이끌어 주셨다.
매주 화요일 밤, 직장인 예비 신자 반에 들어가 성경 공부와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한 교
육을 받았다. 어린 날 교회에 개근하고 다니듯 거의 빠지지 않고, 6 개월을 그렇게 교육과
미사를 병행하며 성당을 다닌 다음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대건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이 안드레아였는데, 84 년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김대건 신부님도 성인
의 반열에 올라 세례명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세례를 받은 것이 89 년 여름의 일이었다.
무엇인가에 몰두하면 최선을 다하듯이 나는 정말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원래 성경을 교
양으로 삼회독 정도 한 상태였지만, 교양을 염두에 두고 읽는 성경과 믿음의 대상으로서 읽
는 성경은 느낌이 달랐다.
아버지의 병세는 더 이상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종교의 덕이겠지만, 나는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신과 몸이 되어 고달픈 대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시는 것이었다.
나는 레지오 마리에(성당 봉사단체)부단장이 되었다. 일요일이면 일찍 미사를 보고, 봉사
활동을 가거나, 주말과 일요일을 이용해 수도원으로 피정(일종의 신앙심 재교육)을 갔다. 피
정을 갔을 때 수사들의 강의를 들을 때가 있었는데 어제 홈피에서 읽은 조수현의 글이 떠오
른다.
수사들은 하루 중 6 시간 자고, 6시간 일하고, 6시간 기도하고, 6시간 동안 묵상하는 단조
로운 생활의 연속이다. 교육받던 중에 내가 질문을 했더랬다.
- 수사님, 어떤 분들이 수사가 되는 건가요?
상당히 미안한 질문이었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 네, 형제님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런 질문을 안 하나 이상하게 생각했는
데 오늘 드디어 기다리던 질문을 받았군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수사가 될 수 있고,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녀'나 '수사'
하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오해들을 하시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
하지 못하면 이 단조롭고, 때로는 고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을 도저히 견딜 수 없
답니다. 그렇게 되면 중도하차 하게 되는 것이지요. 알 듯 말 듯한 대답이었지만, 더 이상
질문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평범해야 그 인내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 글쎄 평생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알 것도 같다.
성당을 그렇게 3 년을 열심히 다녔다. 어머님이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버거워하셨지만, 아
버지는 치매 노인 비슷한 상황으로 삶을 유지해 가셨다. 희망 없이 하루 종일 가요 비디오
를 보시거나, 주무시거나 하시면서 말이다.
그런데 92 년 봄에 교생 실습을 나온 성신여대 한문교육과 학생이 내게 배정되었다. 나는
국어교사였지 한문 교사 자격증도 없었으나 한문 수업을 들어간다고 그 학생을 내게 지도 교
사로 맡긴 것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예쁜 여자가 좋다. 이 여학생은 키
가 167 정도에 약간 마른 듯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 선이 한 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한문 교육과 학생이니 커리큘럼상, 내가 배워야할 입장이었으나, 하여간 한 달 동안 내내 서
로 수업을 보여 주고 그녀의 수업을 듣고 하면서 정이 들었다. 지도 교사라는 이유 때문인
지 그녀는 총각인 나에게 정도 이상으로 미소짓곤 했다. 노총각인 내가 졸업반인 그녀에게
배우자로서 관심이 없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리라.
둘이서 저녁을 먹으며 어떤 남자와 결혼하고 싶으냐고 노골적으로 물었다. 대답이 참 뜻
밖이었다. 자기가 모태 신앙이라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나는 황당했다.
' 그 주님은 김일성인가? ' 나는 혼란스러웠다. 결혼과 종교라? 글쎄, 주변의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에게서 개신교 신자 중에는 자기들끼리 결혼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내가 마음에
있는 여자로부터 확신에찬 고백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계속)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결혼에 대한 숱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
고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이 물질 위주의 가치관하에서 결혼을 했
다가 파경을 맞는 일이 많다는 말은 들었어도, 결혼의 조건이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사람이
라니... 어떤 문학 작품에도 없는 답이었다.
그 주님은 육성으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분이니, 어떻게 설득을 구할 대상도 아니지 않
은가? 애초부터 이 여자와는 대화가 되지 않겠다 싶어 화제를 바꾸고 실습이 끝난 뒤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척 데이트를 신청했고, 그녀도 만남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 민숙씨, 교회에 한 번 가보면 안 될까요?
- 안돼요, 제가 성가대 대원이라, 선생님이 아는 척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요.
-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따로 만나면 되잖아요?
- 그래요 그럼.
나는 그 주 일요일에 새벽 미사를 보고, 그녀의 교회가 있는 수유리까지 갔다. 교회에서
그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이 야 기 가 너 무 늘 어 진 다.
--------- (중 략) -------
간신히 그녀를 설득해 결혼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내가 종교를 개종한다는 조건으
로 말이다. 세상을 얻은 듯 기쁘더라 !
그러나 목사님인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은 요지부동이더라. 예수교 장로회, 빌어먹
을 ! - JESUS ! -
나는 인생에서 두 번째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성당에 나가는 것도 시들해졌다. 모든 종교
가 싫어졌다.
5. 글을 마치며
나는 현재 냉담 중인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누구는 어렴풋한 유신론자라지만,(박인호)
나는 어렴풋한 무신론자다. 아버지는 만 10 년을 고생하시며, 가족을 힘들게 하다가 4년 전에
고향에 묻히셨다.
나는 큰아버지 제사에 꼬박꼬박 가는데, 우리집과 가까운 수원에 사는 작은아버지 아들
둘은 우리 아버지 제삿날 우리집에 안 온다. 물론 예수교 장로회 신자다. 제사는 귀신을 섬
기는 것이므로 안 올 가능성이 크다. 아무런 다른 갈등이 없으므로 제사에 안 오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다른 사촌과는 달리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어쩌다 친척들 결
혼식장에서 만나면 할 말도 별로 없다.
언젠가 내가 홈피에 글을 올렸듯이 (게시판 954 번 글 참조) 인간은 고독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마 종교가 그 사이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인간이 죽는 존재이고 살아있는
동안 생각해야 한다면 신은 존재할 것이다. 니이체처럼 죽었다고 용기 있게 외쳐봐야 결국
은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정신적 방황 끝에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 신을 부정했다가 편안한 종말은 맞이한 위인은 드물다. 그리고 종교
인은 오래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의 존재 또한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인간의 숙명이다.
" 인간의 모든 진리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안에 구현되어 있다. " - 김용옥 -
그렇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은 신을 거부할 수 없다. 지금은 어렴풋한 무신론자이지만
내가 병들고 어려워지면 가톨릭으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 나도 나약한 인간이기
에....
*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나의 주장과 결론
1. 어떤 경우든지, 신은 인간을 위한 신(神)이어야지 신을 위해 인간이 희생되면 안 된다.
2. 어떤 종류의 신이든지 인간과 인간을 사랑하도록 이끌어야지 반목하고 배타하도록 만드
는 신은 모두 사이비 신(神)이다.
3. 인간의 모습과 생각이 다양하듯이 신(神-인간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고 봄.)의 다양한 모
습을 각 종교의 신자들이 서로 인정해 주고 존중하라.
4. ' 사랑의 실천 ' 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는 일종의 협박 행위이며, 모두 교활한 인간
의 탈이고, 탐욕의 모습이어서, 인간이 만든 신(神) 중에 그래도 최선인 예수님을 팔아 세금
없이 장사하려는 협잡(사기)이다.
5. 그리하여, 모든 거짓 신(神)은 제발 인간의 땅을 떠나라 !
2003.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