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은 ‘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돋는 기적’을 기대할 만큼 순진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화두인 것일까?
영화 ‘사마리아 ’를 통해 김기덕 감독은 우리들에게 선(禪)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마리아’는 여고생의 원조교제와 그를 목격한 아버지의 복수를 다룬 영화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딸과 아버지의 화해가 이 영화의 테마이다.
영화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바수밀다’는 유럽 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는 재영과 여진의 이야기이다. 재영이 인터넷 채팅을 통해 상대방을 알선하면 여진은 재영이 행세를 하며 매춘을 한다. 재영은 그녀와 하룻밤만 자고 나면 남자들이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된다는 인도의 창녀 바수밀다의 이야기를 여진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을 바수밀다로 불러 달라고 한다. 재영이의 얼굴엔 부처님 같은 미소가 감도는데, 실재로 자신이 상대하는 남자에게 바수밀다처럼 사랑을 느끼려 한다. 그런 재영을 여진은 이해하지 못한다. 여진은 재영에게 화를 내면서도 재영이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시켜 준다. 둘은 가벼운 키스를 나누며 살포시 서로를 끌어안기도 한다.
2부 ‘사마리아’는 원조교제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 때문에 재영이 3층 모텔에서 몸을 던져 죽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늘빛 동성애 같은 풋풋한 우정을 나누던 재영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진은 자신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 재영이 만났던 남자들을 차례대로 만나면서 그들과 섹스를 나누고 여진이 받았던 돈을 되돌려 줌으로서 그들을 정화해 나간다.
친구가 원조교제를 통해 받은 돈을 그 남자와 다시 관계를 갖고 돈을 돌려 준다는 것은 도데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원조교제는 돈과 성을 교환하는 하나의 거래일텐데 여진이 되돌려준 돈이 환불이라면 그녀 또한 재영처럼, 바수밀다 처럼 정성껏 사랑을 나눈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남자들은 여진의 행동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행복한 표정들을 짓게 되지만 인도에서처럼 불교 신자가 되지는 않는다.
3부 ‘소나타’는 여진의 아버지와 딸과의 화해의 과정이다.
여진의 아버지 영기는 상처하고 나서 딸아이를 지극 정성으로 키운다.
아침이면 여진이 좋아하는 CD음악을 이어폰으로 꽂아주면서 깨우고 자신이 손수 마련한 식사를 나누고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영기는 여진이를 사랑한다.
영기는 여진을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면서 예수의 십자가, 성모 마리아, 테레사 수녀등의 기적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것은 영화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사건 현장 건너편 모텔에서 우연히 딸아이의 비행을 목격한 형사 아버지 영기는 여진을 불러 다그치고 원조교제를 못하게 막지 않는다. 분노에 떨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는 영기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그는 상대방 남자들을 쫒아가 복수해 나간다. 복수는 린치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극악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한편, 아버지 영기가 잠든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서 원조교제를 하는 이 땅의 남성들의 죄는 전도된 일렉트라 콤플렉스가 되어 버린다.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들에게 성적 욕망 - 그것이 마음속 간음이든 실재 원조교제이든 - 을 느끼는 우리들의 부조리를 감독은 까발리고 있다.
이쯤되면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도데체 누구란 말인가?
재영과 여진의 원조교제에 대하여 우린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들의 죽음과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모든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 원죄는 어떻게 속죄 받을 수 있는가?
영화는 온통 혼란스러운 질문들만 던져 놓고 있었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의 답을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영기는 딸 여진과 함께 아내의 빈소를 찾아간다.
아내의 빈소 앞에서 끄억 끄억 울던 영기의 등을 여진이 두드려 주면서 그들의 화해는 시작되어진다. 영기의 소나타차가 깊은 산속 자갈밭에 빠져 꼼짝도 못하게 되는데 여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많은 돌들을 걷어내어 아빠의 차를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마치 질곡에 빠져 있던 아빠의 앞길을 열어주듯이...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자던 중 영기는 새벽녘 창밖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는 여진을 지켜보게 되고.... (카메라의 시점은 영기에게 맞춰져 있다.)
울음을 통하여 여진은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행적을 맑게 닦아내고 싶었던 걸까....
이 영화의 모티브는 민박집 근처 산자락에 있던 나룻배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에서 나룻배의 심상적 이미지는 중생의 구제이다. 나를 더렵혀도 좋으니 나를 밟고서라도 저 피안의 세계에 다다르라는 나룻배의 숭고한 사랑은 어쩌면 재영과 여진의 바수밀다 같은 사랑(?)에서 새싹은 돋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돋는 기적’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써 놓고 나서 보니 인식의 지나친 비약 혹은 이미지의 무리한 결합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 김기덕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가....)
돌아오는 길 영기는 인적 드문 강가에 여진을 홀로 두고 떠나 버린다.
여진 혼자 운전하는 소나타 차는 삐뚤삐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영화는 롱 테이크로 빠지면서 끝난다.
영화 ‘사마리아’를 보고 나서 나는 인간의 원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죄는 누가 어떻게 정죄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오래도록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