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신예 3인방의 등단 이래
본인이 등산반 공식행사의 후기를 쓰리라곤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참석율이 저조했다는 반증이라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객관적으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회장 박인호,
홍보담당 부총무 정회준,
전임총무 김원기,
이들 3인의 불참사실을 史草에 남김으로써 후대의 경계를 삼고자 한다.
전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예정대로 강행하자는 몇몇의 결의에는 비장감 마저 감돌았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그런 祈晴의 염원이 통한 듯,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다.
다만, 붉게 물든 아침노을은
하루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 주고 있었고...
어찌 되었거나 약속된 시각, 약속된 장소에 모인 면면을 보면
2회 진태훈 형, 3회 김영훈 형,
4회로는 총무 이제환, 남구식, 한득민, 김주동,
7회 한용섭, 14회 위세욱, 이상 8인이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광주로 이동, 마중 나온 강근식의 봉고차로 갈아타고
목적지인 천진암에 도착했다.
근식이의 봉고는 이스타나 15인승으로
온 가족이 여행하며 먹고 잘 수 있도록 개조한 전문 레져용 차량이었다.
그날 산행은
천진암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을 우에서 좌로 크게 돌아 종주하는 것으로서
광주, 여주, 양평 등 경기 동남부의 3개 군을 엮는 대장정이었다.
산행의 기점은 천진암 聖地 훨씬(도보로 1시간 거리) 못 미친 지점으로
녹차가든 앞 주차장 한 구석에 등산로 안내간판이 서 있었다.
(찾기가 용이하지 않은 관계로 향후 등산하실 분은 한남정맥에 문의 바람)
일차 목적지는 능선 종주의 시작점이 될 안부, 冠山(556m)이었으나
그날 내내 어느 봉우리가 정확히 관산인가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기라성 같은 설악의 봉우리들도
근래에 들어서야 그 이름이 작명 되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앞 동산, 뒷 동산까지 반드시 정확하고 그럴 듯한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산꾼들의 다분히 편의주의적인 발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산행초반, 안부까지의 2km는 기복없는 오르막이라
음주와 흡연 등, 건강치 못한 생활습관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는 충분했는데
가장 먼저 징후를 보인 사람은 정작 막내인 14회 후배였다.
젊은 넘이...
출발부터 안부까지는 물론, 이후의 능선길 모두가 울창한 굴참나무 숲길로
천주교의 聖地로서 많은 사람들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은 듯했으나
수 많은 지릉으로 인하여 곳곳에 함정이 많은 코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강근식의 나침반까지 동원한 전문적인 가이드 덕에
나머지 일행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한 산행이 되었지만
지도자의 방향감각은 역시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안부를 지나자 역시 걱정한대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엄청난 바람을 동반한 폭우로 변했다.
그러나, 일행은 그저 시원해서 좋다는 정도로 산행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도 잠시 막걸리 잔 돌려가며 넉넉한 마음으로 껄껄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이 옛날 화적떼의 그것에 다름 아니겠지만…
4시간 가깝게 마치 인터벌 트레이닝하는 기분으로 종주를 즐기고 나니
마지막 깔딱고개 후, 드디어 정상인 앵자봉(鶯子峰, 667m)이다.
그 모습이 마치 꾀꼬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앵(鶯)자가 앵무새 앵(鸚)자라고 아는 척을 하니,
옆에 있던 근식이가 꾀꼬리 앵(鶯)자라고 바로 면박을 준다.
(이 넘이 학교 다닐 때 껄렁거리기나 했지, 언제 공부를 하긴 했나…jotto…)
그날의 산행구간 중에
앵자봉만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개활지였으나
아쉽게도 운무에 갇힌 바람에 비석 앞에서 간단히 기념촬영한 후
하산을 서둘렀다.
이미, 나대용 선배로부터는 왜 이리 늦냐는 독촉전화가 수 차례 있던 후였고...
앵자봉으로부터 1시간 정도만 가파르게 떨어지면 천진암 성지에 도착하는
비교적 짧고 수월한 하산길이었으나
한득민이가 갑작스러운 무릎 고장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친구들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아리다.
작은 규모의 산 치고는 제법 깊은 골짜기를 빠져 나오자
이벽(李檗)을 비롯한 다섯 성인의 무덤이 보였고
태훈이 형이 우리나라 천주교의 자생적 발상지로서의 천진암의 의미에 대해
일러 주셨다.
100년의 계획으로 건립 예정인 대성당 터에 서서 되돌아 보니
앵자봉 등 운무에 싸인 산세가 무척 아늑해 보인다.
서둘러 비와 땀에 젖은 옷들 갈아 입고
오매불망 눈이 빠지게 기다리실 대용이 형 댁으로 출발하였다.
대용이 형과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근식이에게 그 사연을 물어 보니
지연, 학연적으로 밀접했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답변이다.
하여간…이제 서이천 톨게이트 나와 좌측은 근식이네요,
우측은 대용이 형네라는 이웃사촌으로까지 발전했으니 심상치 않긴 하지만...
대용이 형 댁은 멋진 정원을 가진 아담한 전원주택이었다.
도착해 보니 2회 김대우 형도 미리 기다리고 계셨지.
분주히 숯불 다시 지펴 고기 굽고
솔방울과 앵두 넣어 담근 과실주를 권커니, 잣커니 하다 보니
그 살가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날…2회 선배 3분은 고기 굽고, 서빙하고, 술 따라주며
후배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온 몸으로 보여 주셨지.
대용이 형이 이천에 정착하신 것이 1월의 일이라
벌써부터 고답적인 생활에 충분히 적응하셨다고 보기는 힘들겠고
사람이 그리운 걸 어찌 참으실지…
그래서인지…헤어지는 순간이 너무 아팠다.
무작정 봉고에 따라 오르려는 대용이 형을 형수님이 뜯어 말리며
일행은 그 곳을 떠났다.
여전히 추적거리는 차창 밖을 보고 있자니
冒頭에 언급한 3인방(박인호, 정회준, 김원기)이 더욱 야속하기만 하다.
썩을 넘들…
그런 와중에
개 구경이나 하고 가라는 근식이의 제안은 분위기 전환에 그만이었고
주인 닮은 롯드와일러의 재롱에 마음들이 한결 풀어졌다.
태훈이 형도 개를 무척 좋아 하시는지
마냥 즐거운 모습이다.
개 구경과 함께, 마지막 소주 한잔 이별주 삼아
근식이와 제수씨의 배웅 속에
이천 땅을 떠났다.
ps
대용이 형과 근식이…그 날 수고 많으셨고, 정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