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드디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경기도 교육청, 안성시 서운면 산평리, '산평
초등학교' 가 첫 부임지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안성이 경기도에서 최남단인데 산평초등학
교는 거기서도 가장 남쪽이어서 충정도 진천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부산대학교 사회교육과’ 를 졸업한 아내는 나와 만났을 때, PBS (KBS, 부산방송국) 방송
리포터였다. 리포터라는 게 일종의 비정규직이므로 나와 결혼을 하면서 당연히 직장을 그만
두고 평촌(아니 그 당시는 여의도 살았었다.)으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 자라 부
산에서 교육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으므로 서울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첫째 아이가 생기고도 아내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정도로 항상 무엇인
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
이다.
결국 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자 아내가 황당한 제안을 하는 거였다.
- 한글이 아빠, 우리 서류상으로 '이혼' 을 하자. 공무원 시험은 너무 어렵고 대기업에서 뽑는
대졸 신입사원 시험을 보려는데 기혼자는 지원 자격이 없거든.
나는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따발총처럼 나오는 아내의 하소연은 내게 심각함
으로 다가왔다. 도저히 이대로는 - 부모님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 - 못 살겠다는 거였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지만, 자기와 결혼 생활을 계속하려면 가짜로 이혼을 하고 아
니면 진짜로 결혼생활을 끝내자는 얘기까지 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고함을 지르던 나는 삼일을 고민한 끝에 아내의 소원
을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 둘은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수원 법원으로 갔다. 참 다양하게 이
별하는 부부들을 목격하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 중에는 채무 관계로 위장 이혼을 하는
지 별로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는 부부도 있기는 했다. 사실, 우리도 위장 이혼이 아닌가?
‘협의 이혼’ 이라는 게 정말 너무나 간단한 절차였다. 증인 두 사람을 세워야 하는데, 그것
도 대서소에 가면 알아서 해결해 준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판사 앞에서 간단한 인적 사항을
밝히고 둘 사이의 아이를 위한 양육권에 대한 약속만 확인하면 그야말로 도장 ~ 쾅 ~ 이었
다. 그 너무도 간단함에 허탈했다.
아내는 한동안 공부에 매진하더니 교보생명에 입사했다. 보험 아줌마가 아니라 영업소장
밑에서 보험 아줌마들의 금전 출납 관계를 교통정리하는 업무였다. 월말이 되면 새벽 두 시
에 들어오기도 하는 격무였다. 그런데 연말 상여금을 받을 때는 나보다 월급이 훨씬 많은
거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진 나는 평촌 뉴코아 11 층에 있었던 헬쓰 클럽에 연회원으로 등
록하고 퇴근 후 한 시간은 운동에 나머지 한 시간은 골프 레슨을 받았다. 그렇게 4 년을 살
았으며 아이는 물론 내가 돌보기도 했지만, 주로 우리 어머니가 키우셨다.
그런데 우리도 IMF 폭풍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실적이 부진
한 영업소장을 대폭 감원하고는 아내를 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내는 것이었다. 원래 대졸 남
자는 총무 - 주무 역할을 2 년 정도 하고 영업소장으로 투입되는 게 상례였으나 여사원인
아내는 4년 동안 소장 발령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최규운’ 이는 잘 알겠지만, 영업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맥과 학맥이 있
어도 본인이 강철처럼 의지력이 없으면 자기돈 꼴아박는(?) 게 영업이다. 서울에 친구도 한
명 없고 친척도 거의 없는 아내가 소장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교보생명을 4 년 다닌 후 소장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사직을 했다.
둘째를 가진 후 아내는 또 공부를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인천교대(경인교대로 학교 명칭
을 변경) 편입 준비를 하는 거였다. 3학년에 학사편입을 하겠다는 거였다. 서울교대는 편입
생을 뽑지 않고 ‘경인 교대’는 특별 편입생 600 명을 뽑았다. 합격이었다. 그 늦은 나이에
피아노도 배우고, 단소도 배우고, 뜀틀에 앞구르기 뒷구르기.... 온몸을 파스로 도배하면서도
정말 지독하게 학교생활을 하더니 임용시험에서 순위 2 등으로 합격해서, 드디어 발령을 받
은 것이다.
아내는 엄청 기뻐하지만, 앞으로 다니는 것도 걱정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커서 큰넘이 중
2, 작은 넘이 초등 5 학년에 올라가니 라면은 끓여먹을 수 있어 그 걱정은 덜어졌지만, 인
터넷으로 조사해보니, 거리가 왕복 140 킬로미터에 워낙 학교가 오지에 있어서 대중 교통
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아내는 13 년 된 중고 티뷰론을 끌고 다니겠단다. 그 먼거리를....정말 걱정이 앞선다. 오
늘은 발령받은 ‘산평 초등학교’에 첫인사를 하러 외출 중이다.
정년까지 꽉 채우면 만 22 년의 교직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내게 자랑하면서 아침에 집을
나선 내 마누라, 화이링 !
2008.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