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사람의 교사로서 지나간 촌지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1984년. 졸업과 동시에 처음 대방동 어떤 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날, 대거 강남으로 전근해간 빈자리를 우리 초임 13명이 한꺼번에 채웠다. 우리는 서로 똘똘 뭉쳐서 참교육을 몸으로 실천하자고 다짐했지(물론 참교육이라는 말은 그 후 몇년 후에 공식화된 말이기는 하지만).
1학년 13반 담임을 맡게 되었던 일주일 후. 어떤 학부형이 교무실로 나타났다. 첫마디가 "아이고 참한 총각 선생님이시네... 중매좀 서야겠다..." 그땐 몰랐지만 그 말은 '너 쯤은 내 손아귀에서 가지고 놀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끝나고 포장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보니까... 책상에 휴지가 없으시네요. 크리넥스 한통 사왔어요. 놓고 쓰세요."
고맙기 그지 없었다. 돈봉투는 절대로 안받기로 작정했으니, 혹시 가지고 왔으면 어떻게 정중히 거절할 것인가를 고민하던차에 크리넥스 한통이라... 흠... 시작이 좋군. 순진하기 짝이 없었던 나였다.
그분이 가고 나서 상자를 뜯었다. 크리넥스 휴지통 옆에 살포시 끼워져 있던 하얀 돈봉투. 그때 돈 10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984년 내 첫 봉급이 34만원이었으니,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한 40만원쯤 되는 거액이었다.
그걸 들고 한동안 난감해하던 나... 그래서 내가 그걸 돌려줬냐고? 학급문고를 사겠다고 책상 서랍 속에 우겨 넣었다.
두번째 아픈 상처. 종례를 마치고 막 파하려던 차에 교실 창밖에 어떤 생선장수 아주머니 같은 분이 서 계셨다. 아마 장사 하다가 급히 달려오신 것 같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기면서 문밖으로 나가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았다. 그분은 갑자기 허리춤 돈 전대에서 돈을 꺼내 주섬주섬 세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꼬깃꼬깃한 돈 얼마간을 내 손에 쥐어 주면서 "사는게 너무 바빠 이래 찾아뵙지도 몬하고 ... " 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다시 황급히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반 아이 엄마였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과연 그 놈은 엄마가 다녀간 걸 고스란히 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내 손에 쥐여준 돈도? 아이들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시는게 아니라고 돌려 드리는 것이 그분 맘에 상처가 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던 내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서울기계공고로 옮긴 후 이런 사태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공고 학부모가 교사에게 촌지 주는 법은 없으니까.
최재식, 정회준.... 정말 좋은 촌지 받았구나. 졸업하고 다 큰 제자들로부터 받은 백화점 상품권.... 그 얘기를 읽으면서 나의 부끄러웠던 과거가 잠시 생각나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