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수직의 사랑을 꿈꾸어 본적 있니?
필 꽂히는 대로 팍 사랑을 날려 버리고 싶은 광기의 사랑말이야....
아마도 사회적 페르조나에서는 언감 생심 티도 못낼 일이지만 무의식의 쉐도우에서는 수없이 갈망했을지도 몰라.
제도나 관습 혹은 미풍양속이라는 미명아래 우리들의 건강한 욕망을 재갈 물린 채 사회적금기로 치부해버린, 그리하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억압해 버린 수직의 사랑!
일찍이 이해인 수녀님이 ‘나는 당신에게 수직으로 내리는 빗방울이고 싶습니다’ 라고 절대자에 대한 수직의 사랑을 서정적으로 노래 한적이 있기는 해.
그런데 그런 거룩하고 지순한 사랑 말고.... 그냥 화살처럼 내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가는 날 것으로서의 사랑.... 그것을 우리 모두는 내밀히 꿈꾸고 있는 지도 몰라....
얼마전 우연히 OCN 채널에서 밤늦게 ‘동상이몽’이라는 봉만대 감독의 TV 전문 영화를 본적이 있어. 아... 너희들도 이미 봤다구...
오우, 신선한 충격이었어. 하드 코아 포르노도 아닌데 무쟈게 화끈하더라구.
화끈해서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게 거진 독립영화 버전이기도 한거야. 서사구조도 단단하고 카메라 앵글도 천박하지 않고 색다른 감동이었어.
야하면서도 결이 있는 영화였어.
그 감독이 만든 영화도 있다길래 비디오 샵에서 빌려 봤는데 그게 ‘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이야.
여기서도 그 수직의 사랑이 나오더구만.
그냥 필 꽂히니까 좋아하는 선배가 있어도 바로 작업 들어가는데, 뜸 들이고 되새김질 하고 이런 거 없더라고... 몸이 원하는 그대로 물 흘러 가듯이 가는거야. 그러면서도 두 주인공 사이의 심리 묘사도 미디엄 샷으로 짜하게 보여주고. 그 경지는 거진 홍상수 리얼리티 버전이더라구.
아, 그러고 보니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이다’ 라는 제목의 영화도 보았어. 사람들 제목이 뭔 뜻이냐고 말들이 많더라고.... 그리고 대충 그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라고 하는 것 같아.
근데, 이 대사 하나는 내 맘에 꼭 들었어.
주인공 남자(유지태)가 여자 주인공(선화)에게 성급한 섹스를 원하자 선화는 ‘그냥 안아주면 안돼’라고 말하거든. 그러면서도 선화는 나중에 유지태의 극단적 성적 욕망까지 그대로 품어주지.
이게 바로 여자가 남자의 미래인 이유야... ^^*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샜지....
오늘 난 수직의 사랑을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공자가 일찍이 나이 40에 불혹이라고 야그했잖아.
그게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일 터인데, 내게 불혹의 의미는 세상 아무도 나를 유혹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공자님에게 불혹이란 주체의 발화이고, 내게 있어서 불혹은 대상의 존재일 뿐이지.
물론 가족의 평화와 사회적 성취라는 사랑과 일의 정체성은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있어서의 지존의 가치이겠지.
그러니까 몰래 수직의 사랑을 꿈꾸는 거야.
현실적으로 도무지 그런 수직의 사랑 따위가 찾아 오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의 방어 기제는 교묘하게 일처 일부제의 가족 이데올로기의 고귀함을 접수하게 되잖아.
그런데, 살다 보면 가끔은 그런 일상의 삶에 미묘한 균열이 오기도 해.
나는 때로는 ‘방’에서 단란하게 술을 마실 때 도움을 준 예쁜 아가씨가 헤프게 웃음 몇 번 날려준 민들레 홀씨 같은 정 나부래기에도 쉽사리 감동하여 턱없이 그 다음 날 미열에 들뜨기도 했었으니깐.
아무래도 우리에게 45라는 숫자는 공자의 경지로 편입해 가기에는 아쉽고, 그래서 처연하기 조차 한 것 같아.
그러니 어쩌구 저쩌구 해서 웬 썸씽이 은밀하게 펼쳐지면.... 우린 또 무지하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거지. 자빠질께 뻔한대도 걍 확 앞으로 달려가 버릴까 하다가도 어느새 일상의 끈은 우리를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곤 하지.
그런 면에서 오늘 본 독일 영화 ‘미치고 싶을 때’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어.
원제가 헤드 온(Head on)이라나... 이게 바로 또 수직의 사랑 아닐까...
사랑도 잃고 일도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자살 미수의 차이트란 40대 남자의 광기의 사랑이 아프게 전해져 왔거든.
그에게 있어 삶의 유일한 위안은 술과 마약뿐이야. 차이트가 나누는 사랑조차 그에게는 삶의 본능(리비도)가 아니라 죽음에의 충동(타나토너스)일뿐이야. 롱테이크 풀 샷으로 보여주는 차이트의 사랑은 자기 파멸로 가는 광란이야. 그런 그에게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시벨과의 우연한 사랑은 처음에는 각자 제멋대로의 계약 결혼이었어. (아, 우리들은 인생 한번 더 산다면 한번쯤은 계약 결혼 같은 거 원하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술 마시고 마약하고 자기 파트너하고 각자 섹스하고...
그런던 어느 날 시벨이 차이트의 머리를 잘라 주고 맛있는 식사까지 차려주면서 둘 사이의 제 멋대로의 사랑엔 균열(?)이 가기 시작해.
감독은 결국 차이트의 사랑의 버전을 냉소에서 질투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어. 여전히 차이트의 사랑은 버전을 바꾼 채 수직이긴 하지만... 시벨은 차이트의 미래가 되어 주진 않았어...
내게 가족의 사랑과 사회적 자아가 없다면... 나도 수직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난 너희들의 가슴이 숯불처럼 타올랐던 수직의 사랑을 듣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