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저녁엔 우리 막내 딸 예랑이가 다니는 도담 유치원에 참관 수업을 갔더랬어.
그런데 그 날은 친한 후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낮부터 술을 마셔 버린거야.
소주 한병에 500씨씨 두잔을 마셨으니 얼추 알딸딸해지더라구. 왜 낮술 마시면 좀 쉽게 취하잖아.
느닷없이 평소보다 유쾌해진 아빠의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우리 딸은 금새 내가 술 마신걸 눈치채더라구.
"아빠, 술 마셨어.... 아무튼 오늘 실수 하면 안돼..." 맹랑하게 기어코 한마디 하더라구.
우린 나트륨 주황 불빛이 그윽하게 켜진 유치원 앞마당에서 널뛰기며 팽이 돌리기, 붓글씨 쓰기, 떡 방아 찍기등 각종 민속놀이를 연인처럼 다정하게 즐기었지. 딸 키우는 아빠들은 그 맛 다들 알꺼야. 딸아이가 '합체' 하며 부웅 가슴팍으로 날아 올 때 짜르르 가슴이 행복모드로 바뀌어 버리는 거 말이야.
나도 우리 예랑이랑 두 손을 꼬옥 잡고 흐믓하게 민속 놀이를 즐겼어.
거기까지는 참 좋았어. 문제는 2교시 골든 벨 퀴즈 마당에서 시작되거야.
'동남아 7박 8일 000000' 한 상품이 있길래 아빠들 모두는 시작부터 들떠 있었어.
예랑이 담임 선생님이 사회를 보는데 무지하게 예쁘고 귀여워 보이더라구.
아이들에게 나긋나긋하게 던지는 말투며 봄 햇살 퍼지듯 번져오는 눈웃음이 동화 속 요정 같더라구...
우린 호흡을 착착 맞추며 초반 문제를 거침없이 맞추어 나갔어. 정답판 위쪽에 담임 선생님 이름인 '최찬진 선생님 너무 예뻐요'를 써 놓고는 무지하게 오바하며 정답판을 흔들어 대니깐 최찬진 선생님도 두뺨이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무척 좋아하더라구.
다섯 번째 문제였던가.... 태극기의 4괘를 우리말로 쓰세요 라는 문제였어.
나는 자신있는 표정으로 우리 딸 뒷통수를 쓰윽 쓰다듬고는 '건곤일척'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놓았어.
아... 정답은 당근 '건곤이감'이잖아. 건곤이감..... 건곤일척.... 왜 난 그 순간 그걸 착각했을까....
최찬진 선생님은 올리비아 햇새 같은 생머리를 흔들며 보랏빛 웃음을 머금고 있는거야.
선생님의 청순한 웃음앞에 나의 교양없음이 어찌나 창피하던지....건곤일척이라니....쩝.
그러나 우리 부녀는 탈락자 자리에 앉아서도 줄곧 정답판을 흔들었어.
정답판에 선생님을 예쁘게 스케치해서 흔들기도 했고, '끝나고 술이나 한잔!' 라고 써서 흔들기도 했고, '구제해 주세요'라고 써서 흔들기도 했어.
아마 그 때부터 술이 본격적으로 취했나봐. 대뇌에 나사가 두 개 정도 풀려버렸던 것 같아. 창피한 것도 말끔히 사라지고 용기도 그득해 지더라구....
아, 나의 간절한 염원이 드디어 최찬진 샘에게 통했나봐. 패배자들을 구원해 주겠다며 조각 퍼즐 맞추기 게임을 시작했어. 나는 태극기 맞추기 쪽으로 갔는데 최찬진 샘은 나를 슬며시 무궁화 맞추기 쪽으로 유인하더라구...
그쪽이 쉽다나... 결국 엇비슷하게 맞추었는데도 최찬진 샘은 무궁화쪽을 손들어 주더라구. 순전히 나를 구원해 줄려구 한거였어.
우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는데 다시 시작된 첫 문제는 '애국가를 만든 사람은?' 이었어. '안익태'이잖아. 난 당연하다는 듯이 '박익태'라고 쓰고 만거야.
아, 이런 망신이 다 있나. 우리 부녀만 틀린 거 있지. 선생님은 너무 안타깝다는 듯이 아쉬위하고....우린 또 다시 탈락자 자리로 갈 수 밖에 없었어.
그 후 우리 부녀는 엉뚱한 답을 쓰고 흔들며 주변 사람들을 웃기며 그게 우리가 이 자리에 있어야 엄중한 의무라도 되는 듯이 뿌듯해 했어. 우리 딸은 뭔지도 모른 채 남들이 즐거워 하니깐 자기도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어.
3교시는 '아빠와 함께 춤을'이었어. 난 자신이 있었어. 내가 한 댄스하거든.
근데 그게 모던 댄스가 아니라 탈춤인거야. '우짜 우짜 우짜라 우짜짜....' 뭐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인데 탈춤은 내가 익숙한 동작하고 자꾸 엇박자로 미끄러지더군.
게다가 머리를 흔드는 동작도 있는데 난 퀴즈 문제를 풀다 머리가 그만 아파 오기 시작했었어. 그러니 머리는 흔들 수 없고 머리카락만 쥐어 뜯고 있는데 지도하시는 선생님이 자꾸 '예랑 아버님. 머리를 흔드세요. 머리를...' 하고 지적하는 거야. 우와... 미치겠더라구... 박자도 못 맞추며 머리까지 안 흔든다고 마치 열등생 다루듯이 하니 말이야.
우리 딸 예랑이는 그냥 막춤으로 자기 맘대로 추면서 좋아하는거야. 자꾸 지적당하는 아빠가 창피해서 그랬을까.....
4교시 다도 예절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난 또 최찬진 선생님에게 수작을 부렸어.
" 선생님... 너무 예쁘신 것 같아요. 수고 하셨는데 맥주나 한잔 하시죠?"
" 네, 좋아요. 아버님. 그런데 아버님이 쏘시는 거지요"
요정처럼 눈망울을 깜짝이며 살갑게 대꾸하는데, 나는 태어나서 이처럼 상큼하고 화사한 화답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
나는 예랑이에게 "예랑아, 네 장래문제에 대하여 선생님이랑 상담할 것이 있으니 먼저 갈 수 있겠니?" 라고 했더니 예랑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거 있지.
우리 딸의 성숙한 반응(?)에 선생님이랑 나는 크게 한번 웃어 버리고 말았어. 나는 얼른 사랑스러운 나의 딸 예랑이에게 달려갔어. 단풍잎 같은 예랑이의 왼손을 내 오른손으로 꼬옥 쥐고 내 왼손은 딸애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채 낯익은 거리를 우린 또 조잘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