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내와 일산 라페스타에 있는 롯데 시네마에서 마지막 심야프로로<범죄의 재구성>을 보았다. 아내는 잔혹한 하드코어의 스릴러물은 싫어하지만 감독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미스테리물은 무척 좋아하고 영화의 결론을 눈치 채는 데는 매니아급이다. 특별히 영화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생때부터 즐겨 보아 와서 미스테리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감’으로 눈치챈다.
우린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를 ‘재구성’하고 싶었으나 <범죄의 재구성>은 그런 우리 부부의 기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포장마차에서 뒷풀이로 한잔하기 전에 우린 진작에 조각 맞추기에 성공해 버렸기 때문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소재, 편집, 플롯, 대사, 음악, 미장센, 카메라 워킹등에서 무척 잘 만들었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토리라인의 허술함이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의 부재함이 이 영화의 치명적 약점이다.
1996년 한국은행 구미지점 당좌수표 위조사건에서 영화적 모티브를 빌려온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사기꾼의 대부 김선생(백윤식)에게서 사기당한, 그래서 자살까지 하게 된 형의 복수를 위해 최창학(박신양)이 한국은행 털기 프로젝트를 가지고 김선생을 포함한 선수 4명과 벌이는 사기 행각과 그들을 둘러싼 음모이다.
김 선생의 “청진기 대 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시츄에이션이 좋아.”라는 대사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무늬를 드러내 주고, “넌 머리 쓰지마, 머리는 내가 쓴다.”는 대사는 이 영화의 반전을 암시한다.
한국은행 당좌수표 현금 인출 사기극은 성공하지만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경찰의 추격으로 선수들은 월급을 타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지는데.... 50억의 행방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편 사기범들의 주변에는 김선생의 정부 ‘구로동 샤론 스톤’ 인경(염정아)이 있다.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만큼이나 요염한 인경은 미스테리물에 등장하는 팜므파탈 -필름 느와르에서 주인공을 꼬인 상항으로 몰고 가는 운명의 여인 -처럼 과연 그녀의 새로운 애인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인 창혁(혹은 창호)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인가를 미리 예상해 보는 것도 이 영화의 또 하나의 감상법.
한국은행 사기 사건 중에 경찰과 카 레이스를 펼치다 죽은 동생 창혁의 형 창호(박신양 1인 2역)에게 동생의 애인 인경이 5억의 보험금을 노리고 접근하여 동거(?)까지 하게 되는데...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경은 ‘그 사람이 뭘 원하는 지, 뭘 두려워하는 지 알면 게임 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의 끝은 무엇일까...
최동훈 감독은 끝까지 영화적 컨벤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힌트.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같은 치열한 복수 혹은 복수를 향한 내면심리가 영화속에 천착되어 있지 못하고 사기와 반전을 향해 과거와 현재가 악수하며 눈부시게 달려가고 있다. 감독은 허술한 스토리 라인을 감추기 위해 감각적인 대사 - 영화는 줄곧 최고의 떠벌이 얼매(이문식)과 김선생의 어록에 담을 직한 톡톡튀는 대사가 정신없이 이어진다 - 와 허리우드 장르 영화의 영화 문법에 충실한 미장센들로 경쾌하게 채워간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되는 플래쉬 백으로 인하여 관객은 한순간도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깔끔한 플래쉬 백을 위하여 동원된 CG 화면 전환이나 조명, 배경 음악, 효과 음향등의 미학적 완성도는 산뜻한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김선생 역을 맡은 백윤식의 연기는 경지에 올랐으나 선수들과 영화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감독의 의도된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아쉬움은 영화가 종반부로 가며 스릴러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급기야 김선생이 총을 드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본격적인 미스테리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블랙 잭’에 비해 <범죄의 재구성>은 이야기 구성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 밖의 모든 것에서는 훌쩍 앞서 있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대본의 힘’이 문체보다는 구성에 있는 수준 있는 한국판 미스테리물이 나와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도록 범죄를 재구성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