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도에 영업부로 발령을 받은 후, 첫 보직은 증권 저축 담당 대리였다.
당시 한신 증권은 여의도 미원 빌딩 옆에 신 사옥을 마련하여 막 입주를 끝낸 시점이었고 영업부가 1층과 2층, 두 개층을 사용했는데 나는 자리는 1층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주식도 그렇고 증권 저축에 관해서도 기실 나는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5월 하순경으로 기억된다. 창구에 있던 여직원이 단아한 인상의 사모님 한 분을 모시고 왔다.
“ 조대리님, 우리 금융상품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요. 조대리님 인상이 너무 좋으시대요.”
여직원은 싱글거리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사모님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소파를 권했다. 신규 고객이 전무 하다시피 한 영업부에서 나의 첫 고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주식이 어때요?”
사모님의 첫마디는 주식에 관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항시 그런 순간이 오기를 준비했었다는 듯이 나는 유창하게 설명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침마다 시황에 관한 회의를 하는 까닭에 주식 매매를 거의 않던 나였지만 이야기만은 막힘 없이 할 수 있었다. 사모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지금 돈이 별로 없는데 이 돈으로라도 주식을 좀 사고 싶은데…”
나의 설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모님은 두툼한 핸드백에서 백 만원 짜리 세 다발을 꺼냈다. 계좌를 개설하고 대한투금 우선주를 금액만큼 사드렸다.
아침 회의에서 누군가가 추천한 종목이었지만 참으로 막연하게 추천하고 매수를 했었다. 하지만 귀신도 모르는 것이 주식이라고 했던가! 대한투금 우선주는 그 다음날부터 거짓말처럼 나흘 동안 상한가를 기록했다. 일주일도 못되어 평가금액이 사백 만원대로 올라섰다. 신이 나서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몇 차례 통화를 거친 후 사모님의 계좌에는 7천 만원이 추가로 입금되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주식시장이 서서히 상승기류를 타고 있었기에 계좌는 점차로 평가금액이 불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 8월, 가장 앞장서서 달리던 증권주들이 꺾이기 시작했다. 월초에 2,3만원을 호가하던 증권주들이 월말에 만원 이상의 하락세를 보였다. 팔천 만원 대에서 머물던 평가금액이 오천 만원대로 떨어졌다. 난감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모님은 주식을 모두 팔아달라고 했고 돈을 모두 출금했다. 사모님이 내게 특별히 불평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두고 나는 참치 한 세트를 사 들고 사모님 댁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큰 평수의 아파트였다.
“ 사실은 사모님이 제겐 첫 손님이십니다. 금년에 대리로 진급해서 처음 영업을 하는 바람에 제가 잘 모르고 추천도 하고 매매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됐습니다. “
비슷한 내용의 사과 말씀을 드렸고 사모님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자네 술 마실 줄 아는가? 나하고 호프나 한잔 하지.”
갑자기 안방에 계시던 남편 분이 거실로 나오면서 내게 물었다. 안방에 사람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덤덤히 따라 나섰고 앞장서신 분은 호프집이 아닌 미원 빌딩 내에 있는 고급 일식 집으로 갔다.
“ 나 김장수라 하네. 아까 자네가 집사람과 나눈 이야기를 다 들었네. 보통 손해보고 돈 찾으면 거래 끝인 걸로 알고 있는데 자넨 좀 특이한 사람이구먼.”
서울지검의 부장검사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받았고, 두어 시간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둑 이야기와 당시에 베스트 셀러로 많이 읽혀지던 책 이야기, 정치 이야기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 또한 적지 않았다.
“ 그럼, 자네가 자신 있는 게 무어야? ”
술자리가 거의 파장일 무렵, 김부장이 내게 물었다. 요점은 나와 거래를 하고 싶은데 주식 말고 안전한 상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캠페인이 걸려 있던 ‘세금 우대 소액 채권’ 저축을 설명했고 그 결과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다른 금융기관에서 출금해 온 듯한 4억 3천 만원 짜리 수표를 들고 사모님이 영업부로 찾아 오셨고, 개인당 8백 만원까지 밖에 한도가 없는 까닭에 오십 명이 넘는 계좌를 만드느라 며칠간 영업부로 출근하다시피 하였다. 지금은 물론 남의 명의를 쓰는 것이 불법이지만 당시는 금융 실명제 이전이었다. 평균 15% 대의 수익률이 나오는 채권 상품은 당시로서 그렇게 매력적인 상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시작된 거래는 상품이 바뀌고 법이 바뀌면서도 지속되었다.
채권 투자의 피크는 아이러니하게도 IMF시기에 왔다. 당시 기업체들의 자금난이 최악으로 내달으면서 채권 가격은 헐값으로 떨어졌다. 채권 형 펀드들의 수익률이 치솟았다. 정부가 보증하는 보증채일지라도 채권의 등급이 중요해졌다. 부실기업의 채권들은 등급이 떨어졌고 등급이 떨어진 채권들의 가격은 바닥이 안보였다. 채권이라는 것이 만기에 지급할 원금과 이자를 확정하고 발행하는 것이기에 가격이 떨어질수록 수익률은 반대로 높아졌다. 20%대의 수익률이 흔해졌고 단위채 펀드의 경우 30%대의 수익률도 제시되었다.
사모님의 투자금액은 IMF를 거치면서 어느덧 15억원대로 올라섰다. 10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제도권의 금리만으로 200%대의 수익률을 시현했다는 것은 지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채권 투자가 수익률을 떠나서 항시 안전한 것 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의 지각 변동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IMF와 연관된 대우채 사태는 그 위력으로 볼 때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IMF를 지나면서 이른바 펀드 전성시대를 맞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펀드가 현대증권의 ‘바이 코리아’ 였다. 애국심에 호소한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타 금융기관들도 앞다투어 상품을 내놓았다. 자연히 금융기관별로 수익률 싸움이 치열해졌다. 등급이 낮은 채권을 펀드에 편입시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와중에 대우채 사태가 터졌다. 쉽게 이야기해서 대우 그룹이 부도를 맞았고 대우 그룹의 채권 및 관련 사 들의 채권들이 지급불능 사태에 빠진 것이었다. 당시 대우채들은 등급을 매우 낮게 받고 있었기에 고수익 펀드에는 감초처럼 끼어 있었다. 대우채가 많이 편입된 펀드를 판매한 회사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별로 개인투자자들에게는 환매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놓기도 했었지만 정점을 치닫던 채권시장이 이로 인해 완전히 주저앉게 되었다.
사모님이 가입한 펀드의 경우, 신기하리만큼 리스크를 잘 피해 다녔다. 워낙 장기형이고 안전을 중시하다보니 우량등급의 채권만을 편입시킨 보수적인 펀드에만 가입하였고, 그러다보니 수익률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같은 원칙으로 인해 대우채 사태나 이후에 벌어진 SK글로벌 사태에서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수익률이 보전된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들 이후 채권 수익률은 급격히 떨어졌고 상품의 인기도 많이 시들해졌다. 2000년이 지나면서 사모님은 채권펀드에서 절반 정도의 금액을 인출하여 부동산을 비롯한 타 금융기관에 분산투자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잘한 투자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두 방향 투자에서 안정된 수익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