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흐른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공간에 자리한 모두가 그 서있는 데서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있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사람이야 물론 예외가 아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제각기 모습으로 세월을 맞는다.
해마다 예사롭게 진행되는 작은 모임은 그저 자라날 때 같은 울타리에서 지냈다는 인연을 핑계로 하고 있다. 만나면 그 면면에서 서로 흩어져버린 세월의 흔적을 찾는다. 대부분 흰머리가 무성한 중년이다. 싱그러움을 잃은 얼굴빛, 제법 달관한 듯한 아니 습관이 되어버린 세상살이의 태도, 같이 만났던 우리의 시기에 이른 자식들에 대한 얘기. 모두 세월의 패잔병들이다.
삶은 스스로 산다기보다는 살아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간보다 앞서 갈 수도 없고 더디 갈 수도 없으니, 세월은 스스로 흐르고, 모두 그 속에 묻혀간다. 그래서 세월은 흐른다고 해야 맞겠다. 다들 세월이 가져다준 흔적을 뒤집어쓰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래서 더욱 반갑고, 정이 솟는다. 동병이 상린을 일으키니 말이다.
술은 당겨서 먹고, 권해서 먹고. 무슨 대화에서도 모임의 핑계를 잊지 않기라도 하려는지 간간이 십대 후반의 기억들을 들추어내곤 한다. 굳이 짓거리로 판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천렵이면 천렵이고, 산행이면 산행이다. 쪽박조차도 새는 놈은 어디 가서나 샌다고 하니, 사람인들 다르랴. 강가에 있으나 산위에 있으나 그놈은 그놈이다. 각기 제 모양으로 제 꼴값을 하고 살 것이다. 어디서 만나든, 무엇을 하든 질감은 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막걸리를 들이켜고, 곧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을 하는 것으로 천렵은 시작되었다. 소주를 곁들인 점심은 설레임과 반가움의 자리였다.
숙소 아랫녘 다리 밑에 자리를 잡았다. 고기가 있니 없니 하며 오르락내리락 거리다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정확히 1.5미터 간격을 두고 일렬횡대로 늘어선 모습은 교련시간 독기어린 선생의 덕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그렇게 운동장에서 줄맞추기를 했나보다. 서로 얽히지도 않고, 필요한 물건은 안쪽에서 강가에까지 쉽게 전해질 수 있었다.
때때로 터지는 환호성은 서둘러 줄을 감는 친구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몇 해 동안 천렵에서 처음 고기를 잡았다는 친구의 외침은 그만의 쾌감이 아니었다. “왔다!”가 계속되고, 조용히 고기를 줄에 매단 채 으쓱거리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물속에서 행여 강아지라도 잡았는지 줄 맨 개를 끌듯이 고기를 물에 담근 채 끌고나오는 장면도 보기 드문 장면이다. 느긋한 고수의 모습엔 성숙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구경조차 흥겨웠다.
구름 때문에 따가운 햇빛은 피할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추위가 느껴졌다. 바람을 막으려고 폭좁은 비닐봉지를 잔뜩 움츠린 자세로 뒤집어쓴 녀석은 잡혀온 고기보다도 더 초라하게 보였다. 맑은 물살의 간지러움을 즐기며, 손으로 전해지는 파닥거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미 잊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울려 한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 가장 즐거운 모양이다. 역시 놀기와 먹기는 어울려야 제 맛이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눈 아래 맑은 시내를 건너 절정에 이른 푸른 산이 잠기는 공간을 지어내고, 상큼한 공기에서는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정겨움이야 구태여 지어낼 것이 없다.
갖은 솜씨로 끓인 매운탕을 가운데 두고, 오가며 부딪히는 술잔, 지금 떠올려보려고 해도 도저히 되지 않는 사라져버린 말들. 능수능란한 기술로 양주 한 병을 세 개의 물병에 나누고, 그 위에 맥주를 부어 만들어 차례대로 돌려먹은 술맛이 “어째 좀 짜다!”하니, 옆에 녀석은 제 차례에 이르러 호기롭게 마신 뒤 “정말 그렇네! 술에서 짠맛이 나네.”그들 말에 내 혀는 기능을 잃었는지 말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 ‘진짜 좀 짠 것 같은데 …….’ 이미 분위기에 정신을 놓은 탓이다.
밝은 형광등 주위에 날벌레가 잔뜩 꼬여 지들대로 세월맞이를 하고, 고기를 굽는 기름진 연기가 잔치의 분위기를 돋운다. 오가는 모든 말끝엔 웃음이 이어져야 제 맛이 나는 모양이다.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다. 아무 얘기라도 좋다. 의무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머리를 쓸 일도 없고, 긴장을 부르는 들을꺼리도 없다. 그저 제 흥에 겨워 멋대로 해도 모두가 어울린다. 어쩌다 물 흐르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오고.
세월에 청춘을 잃은 패잔병들이 서로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어 마음을 놓고, 낯부터 들이킨 막걸리와 소주, 매운탕과 함께 한 또 소주, 폭탄주, 막걸리, 꼬냑에 약간 혼미해진 상태에서, 머리 위에 수많은 날벌레들이 어지럽게 정신을 빼놓은 데다가, 감미로운 친구들의 목소리에 옛 생각을 하며 넋까지 잃어, 아무리 맑은 공기로 정신을 깨워도 감당이 불감당이라. 그래서 하나가 되었던 늦여름 초저녁이 너무 좋았다.
세월이 흐른들 어떠랴. 어차피 이기지 못할 바에는 간혹 이렇게 집단적으로 제정신을 놓으면 되지. 세월아, 가라! 우리는 이렇게 살란다.
예사로운 자리를 위해 예사롭지 않은 수고를 해준 친구에게 먼저 감사를, 같이 자리한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