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때 방과후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거의 해가 지도록 축구를 했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 놈들과 나는 점심 시간에도 도시락을 까먹고 나면 운동으로 나갔다. 한여름 뙤약볕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뛰고 나면 수도 꼭지를 최대한 틀어놓고 머리를 감았는데 그러고 교실에 들어오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그렇게 축구를 하던 친구 중에 용호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놈은 축구도 잘 하고 싸움도 잘했다. 축구 실력은 우리 중에서 최고라서 편을 가르면 서로 놈을 차지하려고 했다. 얼마나 잘 하냐 하면 흑표범 유세비오처럼 날렵하게 마음대로 상대편 골 문을 휘젓고 다녔다. 마치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는 듯 다리를 놀렸다. 골키퍼도 그의 솜씨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손도 못 써보고 골을 주는 것이었다. 바나나 킥은 그의 전매 특허라서 그가 프리킥을 할 때마다 우리는 바나나 킥을 연호했다. 그러면 그는 또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비벽을 휘어서 골대 안으로 그림 같은 골을 멋지게 넣는 것이었다. 이웃 학교 애들과의 시합 때는 질 뻔한 경기를 그가 역전시키기도 했다. 선생님들도 그랬다.
“우리 학교에 축구부가 없는 게 한이다. 잘만 가르치면 국가대표가 될 텐데. 용호는 박이천이나 이회택보다도 잘 한다. 펠레 같아, 펠레!”
그런데 놈은 자신의 완력으로 약한 애들을 괴롭히기도 했기 때문에 난 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실에서 여자 애들 치마를 들춘다거나 남의 연필을 빼앗기도 했는데 난 싸움을 못해서 놈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도 아니었다. 내가 그 놈과 축구를 함께 한 것은 오로지 내가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못된 놈인가 하면 쉬는 시간에도 나를 불러내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난 쉬는 시간에는 절대로 축구를 하지 않았다. 그까짓 10분 동안 하려고 공을 갖고 나가는 수선을 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놈이 하자고 하면 난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축구를 계속 한 것은 오로지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좋은 축구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할 수 없었다. 더러 토요일 오후에도 축구를 하겠다는 애들이 있었으나 그건 극소수였기 때문에 시합이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시장 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놀 수밖에 없었는데 시장 안에서 놀 수 있는 것은 연탄재 던지기 정도였다. 집이라고 해야 공장 한 쪽을 베니어판으로 막은 방 한 개가 전부였다. 공장에는 겨우 내 또래를 벗어난 아이부터 탄력적인 가슴을 자랑하는 미싱사 누나까지 십여 명의 여공들이 옷을 만들고 있었다. 좁은 공장 안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던 그들은 공동변소에 가는 것 빼고는 꼼짝 않고 일만 했다. 내가 다락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떨어져 반나절을 울었는데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바빴다.
집이 3층에 있었기 때문에 옆 공장에 사는 애들과 연탄재를 던지며 싸움을 벌였다. 공장 입구에 쌓인 연탄재를 깨서 시장 지붕 너머의 건너편 공장 복도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건 눈싸움하고 똑같았다. 그런데 눈처럼 맞으면서도 유쾌한 것이 아니고 이건 똥이라도 뒤집어쓰는 것처럼 불쾌한 것이었다. 우린 상대방의 불쾌에서 유쾌를 일궈내는 사특한 애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던진 연탄재 파편이 언제나 공장 복도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반 정도는 건물 벽에 맞고 시장 지붕위로 떨어졌다. 시장은 재래식 반찬 시장이었고 연탄재가 노점상들 머리 위에 얼마나 쌓이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연탄재 던지기를 매일 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겨울 한철이었고 그것도 건너편 건물에 살던 놈과 우연히 눈이 맞아 의기투합 했을 때만 할 수 있었다. 그 외엔 밖으로 나가서 살았다. 그곳은 시장 옆에 있는 공원이었다. 그곳에서 구슬치기를 하면서 주말이나 방학의 긴 낮 시간들을 보냈다. 눈만 뜨면 그것을 했으니 곧 난 구슬치기의 명수가 되었다. 삼각형을 그려놓고 그 안에 두어 개씩 합의 하에 놓은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금을 그은 뒤 거기서 구슬을 삼각형 안으로 던지면 던진 구슬을 맞고 삼각형 밖으로 나온 구슬이 갖는 놀이였다.
나의 깔빼기와 직사포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내가 던지면 백발백중은 아니라도 신기하게도 내가 던지는 곳에는 꼭 구슬이 있는 것처럼 착각 될 정도로 잘했다. 그러면 딴 구슬을 여섯 개에 10원을 받고 팔았다. 그건 꽤 짭짤한 수입이었다. 그걸로 시장에서 빵을 사 먹거나 중부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내 실력이 얼마나 출중했던지 어떤 남자 공원 하나가 점심때 쉬러 왔다가 날 보고 그랬다.
“야, 20원어치만 팔아라. 너, 나하고 둘이서 한번 해 보자. 나도 고향에 있을 때는 명사수였다.”
그러나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 그의 손놀림은 형편없이 굼떠 있었다. 그의 깔빼기는 번번히 삼각형을 외면했고 의욕적으로 던진 직사포는 좌표 없는 곡사포가 되어 애매한 땅바닥만 긁었다. 난 큰소리 치던 그가 불쌍해서 일부러 져주기도 했으나 결국 그는 내게 50원을 잃고 말았다. 만약 점심시간이 더 길었다면 100원도 딸 수 있었다. 그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얼굴이 벌게져서 공장으로 가버렸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무척 더운 날이어서 구슬치기를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공원으로 나갔는데 역시 뙤약볕 아래에서 구슬치기를 하는 애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공원에 있는 수영장에 애들이 바글바글했다. 나도 당장 10원을 내고 수영장으로 들어가 수영을 했다. 누런 때 국물이 범벅이 된 수영장 물이었지만 잠수를 하면서 물장구를 쳤다. 10원을 내고 1시간 동안 수영을 하고 나오면 또 그만큼의 애들이 수영장을 가득 매웠다.
어느 날 비오는 오후였다. 우산을 쓰고 공원에 갔는데 수영장도 문을 열지 않아 공원이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비어있었다. 난 갈 곳이 없어서 비를 긋느라 나뭇가지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니 공장의 소음과 먼지가 싫었다. 그때였다. 덩치가 큰 형들 너댓명이 공원 입구에 들어섰다. 그들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손에는 삽이나 야구방망이 같은 것들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학교에서도 애들이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패싸움 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난 그들이 깡패란 것을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자 수위실 문이 열리며 또 너댓명의 덩치 큰 형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공원 한 가운데에서 만나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수위실에서 나온 형들은 맨손이었다. 그들은 침입자들과 용감하게 맞붙었으나 휘두르는 삽날을 피하기에 급급해서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삽날은 정확하게 목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걸 피하느라 답삭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마치 박노식 주연의 싸움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씹새들, 비겁하게 무기를 들고 왔어? 이래도 되는 거야? 어디 두고 보자. 안되겠다 얘들아, 튀자!”
결국 맨손으로 대항하던 형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수위실은 새로 온 형들에게 접수되었다. 다음날 수영장에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입구에서부터 탈의실에서까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입장하는 애들을 맞았다. 어제의 그 무서운 얼굴들이 아니었다. 죽기살기로 휘두르던 삽날보다도 더 처절하고 매섭던 눈매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악마들이 천사로 바뀌어있었다. 난 그 비밀을 아는 유일한 아이였으나 그들의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히 발설자를 찾아내서 무서운 보복을 할 것이다. 하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난 그저 더운 여름날 수영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수영이 끝나면 집에 가서 쉬었다가 오후 늦게 구슬치기를 하는 나의 일상은 너무도 평화스러운 것이어서 괜한 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해도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새로운 세력이 수영장을 접수한 다음날부터 공원의 구슬치기 판에는 새로운 아이가 한명 들어왔다. 그 놈은 바로 용호였다. 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분으로 반갑게 인사했다.
“너, 여긴 웬 일이냐?”
“응, 그냥 지나가다 들렸어. 요즘 축구를 못해서 영 몸이 근질근질해. 너는 안 그러냐?”
“그래, 그래서 난 방학이 싫어. 어쩌면 넌 내 마음하고 똑같냐?”
정말 난 축구만 한다면 방학도 필요 없었다. 난 그에게 품었던 나쁜 감정이랑은 잊고 남자답게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처음에는 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삼각형 안에 구슬을 태우고 구슬치기를 했다. 놈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 솜씨에 비길 수는 없었다. 내가 누군가. 이 바닥에서 닳고닳은 꾼이 아닌가. 밥 없이는 살아도 구슬 없이는 한시도 그 긴 여름을 보낼 수 없는 구슬치기의 달인이었다. 놈은 구슬을 잃으면서도 싱긋 웃기도 하며 내게 돈을 내고 구슬을 사기도 했다. 난 공짜로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건 엄연히 승부의 세계였다. 지는 놈은 이긴 놈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현실은 냉혹한 것이었다.
“짜식, 잘 하네. 밥 먹고 깔빼기만 했나.”
다음날에도 용호는 공원에 나타났다. 그때부터 난 아무도 모르는 쾌감을 마음 속에 새록새록 키우고 있었다. 싸움이나 축구로야 내가 용호를 따를 수 없지만 구슬치기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난 뭔가 이뤄냈다는 만족감에 어깨가 으쓱거렸다. 기분이 좋아 놈에게 구슬을 팔 때는 두어 개 더 얹어주기도 했다.
“짜식, 인심 쓰네. 좋아, 한번 더 해보자.”
그가 날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용호가 내 구슬을 돈도 안 내고 요구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도 이 공원에서 공짜로 구슬을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큰 애들도 구슬은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온 다른 애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야, 좀 줘봐! 나도 우리 동네에서는 잘했는데 여기서는 너 때문에 죽 쑨다. 왜, 떫냐? 떫으면 공원에 나오지 말든지.”
“안 떫어. 괜찮아. 너 다 가져!”
용호의 요구를 처음 들었을 때 난 충격을 받았으나 짐짓 아닌척했다. 그만한 일로 충격을 받는다면 놀림을 당할 것이다. 나의 쩔쩔매는 모습을 본 애들은 남자새끼도 아니라며 놀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용호가 친구의 우정에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으로 내 멋대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몇 개씩 공짜로 내줬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주 상습적으로 변해서 이젠 내 구슬로 돈벌이까지 하였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난 그의 마수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건 참 비참한 일이었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그때 비참했는지. 갈 곳이라고는 이 공원밖에 없는데 하필 이런 놈이 나타나서 훼방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했으나 대책이 없었다.
“야, 너 돈 땄으니까 사이다 좀 사와라! 목이 좀 마르네.”
놈은 엉뚱한 요구까지 하기도 했는데 마치 형이 동생에게 시키듯 했기 때문에 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은 놈에게 끌려 다니며 시키는 대로 하는 나를 보고 애석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용호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 애들이었다. 용호가 누군가. 한번 붙었다 하면 피를 보는 놈이요 이길 때까지 들러붙는 거머리 같은 놈이었다. 이런 놈에게 괜히 반항을 했다가는 찍소리도 못해보고 죽는 수가 있었다. 나는 그의 수행 비서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죽 괴로웠으면 난 공원 옆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기도 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 나쁜 놈으로부터 저를 해방시켜 주세요. 저 놈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친구라면서 공갈 협박해서 내 돈을 빼앗고 날 종처럼 부려먹고 있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저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다른 녀석들은 그러는 내가 못마땅했다. 자기들 돈을 몽땅 끌어다 용호에게 갖다 바치는 내가 미웠을 것이다. 그들도 더 참지 못하고 내게 따졌다.
“야, 너 왜 저 놈한테만 공짜로 주냐? 우리한테도 공짜로 줘!”
“뭐? 야, 용호하고 너희들하고 같냐? 제는 우리 반 친구야. 나하고 얼마나 친한데. 축구도 잘 하고.”
놈의 완력을 미처 모르는 애들은 날 붙들고 강짜를 놓았으나 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놈들이 날보고 짱구라고 놀렸다. 어떤 놈은 바보라고 했고 어떤 놈은 멍청이라고 했고 어떤 놈은 용호의 똥구멍까지 빨아주라고 했다. 다른 말은 다 참아도 똥구멍을 빨라는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난 그 말은 한 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으나 놈도 지지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땅바닥에 넘어지면서 주먹질이 오갔다. 난 화가 나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놈을 두들겨 패주었다. 옆에 있던 용호도 날 응원했기 때문에 난 놈을 신나게 팼다.
어느날 얼굴이 하얀 녀석 두 명이 나를 자기들 집으로 데려갔다. 놈들은 잊을만하면 가끔 공원에 나와 구슬치기를 하는 애들이었다. 교회 옆 골목에 있는 녀석의 2층 양옥은 중앙청 만큼이나 크고 근엄해보였다. 마당에는 우람한 개가 짖었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녀석의 방에는 침대와 전축과 피아노가 있었고 벽에는 그림들이 붙어있었다.
“너, 그 놈하고 이제 놀지마! 그놈 순 나쁜 애 같더라. 대신 우리가 너하고 놀아줄게.”
“야, 너 걔를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걔 우리 학교에서 거의 싸움 제일 잘 하는 애야. 우리들 다 덤벼도 걔 못 당한다. 오죽하면 중학교 애들도 못 건드리겠니.”
“너, 우리가 태권도 2단이라는 거 모르지. 자, 봐, 저기 벽에 걸려있는 거.”
옆에 있던 애도 주먹을 쥐어 흔들어보였다. 벽에 걸린 그림들 사이로 하얀 액자가 보였다. 액자에는 태권도 2단임을 증명하는 상장이 들어있었다. 피부가 하얗기만 한 아이가 태권도 2단이라니 의심스러웠으나 그가 쥐는 주먹을 보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먹이 내 것의 두 배는 되어보였다. 이만하면 용호와 붙어도 그다지 꿀릴 것 같지 않아보였다. 내가 며칠 전에 공원에서 싸울 때 이들이 나서지 않았던 게 궁금했다.
“너희들, 나한테 맞았던 애하고 친하면서 왜 나를 그냥 두었지?”
“난 절대 싸우지 않아. 내가 태권도를 배운 건 싸우지 않기 위해서야. 물론 처음에는 싸움 잘 하려고 태권도를 배웠는데 배우고 나니까 싸우기 싫더라고. 왜 그런 줄 알아? 내 발에 한대 맞으면 최소한 기절이야. 싸움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거지.”
옆에 애도 맞장구를 쳤다. 나도 가끔 애들하고 싸움을 했으나 고작 주먹 몇 번 휘두르다가 끝나는 시시한 싸움이었다. 코피라도 나면 그건 큰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녀석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진정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거라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내가 싸우는 이유는 주로 내가 맞을까 봐 먼저 공격하는 의미가 많았다. 녀석처럼 싸움의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난 까딱 마음에 들지않으면 다짜고짜 싸웠다. 그러나 싸울만한 상대라야 되지 턱도 없이 센 애들에게는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녀석은 책상 설합에서 구슬을 한 주먹 꺼내어 가지라며 내 손에 쥐어주었다. 책상 안에는 딱지도 한 장자 가득 들어있었는데 그 중에서 또 한 움큼 꺼내어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너, 이제 그 놈 말 듣지 마! 우리가 중간에 나서줄게. 알았지?”
“그래, 알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래도 가슴에 찔렸다. 이 녀석들이 태권도 2단이라지만 용호와 상대해서 이길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설사 이기더라도 사립학교에 다니는 녀석들이 우리학교까지 와서 날 지켜줄 것도 아니었다. 난 용호의 성난 얼굴이 생각나서 녀석의 어머니가 내온 과일주스를 마시다 말고 남의 밭에서 똥싸다 들킨 놈 마냥 부리나케 도망 나오고 말았다.
다음날 용호는 여전히 내 구슬을 빼앗아 갔고 부잣집 애들이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다가 날 슬그머니 불렀다. 이젠 주지마, 우리가 지켜줄게. 그러나 용호는 또 다 잃고 와서는 내게 달라고 했다. 그러자 드디어 부잣집 애 둘이 나섰다.
“너, 아직 이름도 모르겠는데 어디서 온 개 뼈다귀니? 왜 약한 애를 괴롭히는 거야?”
“어, 이것들 봐라! 눈에 뵈는 게 없는가 보지? 내 마음이다 왜! 꼽냐?”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2대1의 결투가 곧 벌어질 찰나였다. 용호는 중키에 까만 얼굴로 허연 눈알을 치뜨고 있었고 얼굴이 하얀 애들은 큰 키에 까만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곧 용호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다. 놈들과 내가 결탁했다면 용호는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중뿔나게 나서는 부잣집 애들이 야속했다. 괜히 가만있는 날 괴롭히는 것이었다.
주먹을 먼저 날린 것은 부잣집 애들이었다. 용호는 역시 프로답게 날아오는 주먹을 더킹 모션으로 살짝 피했다.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부잣집 애의 얼굴에 용호의 주먹이 그대로 꽂혔다. 용호가 날린 주먹은 잽이었다. 몸을 날려 스트레이트로 죽 뻗는 시원한 펀치도 아닌 그저 화장실에 노크하듯 가볍게 톡 던지는 한가한 주먹이었다. 용호는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부잣집 애는 코에서 피를 쏟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옆에 있던 애는 뭐라고 욕을 하며 달려들었으나 그 애도 마찬가지 경로를 거쳐 똑같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난 그때 미국의 흑인 복서 캐시어스 클레이가 생각났다. 조 프레이저를 눕힌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었고 이슬람을 추종해서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고 했다.
“새끼들, 태권도 배웠다고 다냐? 싸움은 권투가 제일이야 임마.”
놈들은 용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빈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구슬치기를 하던 십여 명의 애들이 몰려오 에워싸고 구경했다. 그때까지 용호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애들은 용호의 실력을 확인하고는 존경의 눈빛을 띠었다. 그렇게 되자 난 용호가 자랑스러워 으쓱한 심정이었다. 봐라, 임마들아! 용호가 어떤 앤지 봤지. 난 용호의 첫째 꼬봉이다. 너희들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겠지? 난 용호가 원하면 땅바닥에 엎드려 발가락에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다음날부터 부잣집 애들은 공원에 나오지 않았고 나의 수입은 그만큼 줄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원에서 나는 용호와 함께 절대불가침의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내가 그 권력에 한 발이라도 걸치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깔빼기와 직사포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호도 내가 구슬을 주지 않으면 공원에서 맘껏 놀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없었다면 나 대신의 다른 애가 있었을 테지만. 그래서 난 다른 애들에게 속으로 외쳤다. 자식들아, 부러우면 너희들도 실력을 길러! 권투를 배우든지 구슬치기 실력을 배우든지 임마들아!
그 뒤 공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결정은 용호가 내렸다. 처음 보는 아이의 별명도 용호가 지었고 공원들이 먹다가 남겨주는 찐 빵이나 음료수도 먼저 용호가 차지했다. 모두가 모여서 하는 놀이의 심판도 언제나 용호였다. 술래잡기를 해도 용호는 술래가 되지 않았고 자치기를 해도 용호는 언제나 공격만 했다. 누구도 그에게 따지지 않았고 그런 규칙에 우리는 아무런 반감도 없었다. 그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다들 생각했던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공원들은 젖은 우산을 흔들며 공장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사복차림의 여자들은 꽃처럼 환하고 싱싱했는데 퍼런 작업복만 입으면 약 먹은 닭 새끼처럼 고개가 축 쳐졌다. 하지만 나의 상관할 바 아니라 아침나절 내 발걸음은 공원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은 마치 몽유병 환자의 버릇처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을 나도 어쩌지 못하고 우산을 쓰고 공원으로 갔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않았다.
난 나무 밑에 서서 우산을 쓰고 우두커니 있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진정한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그때 뭐 이런 고민을 했다면 아마 나는 철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그냥 서 있었다. 처량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으나 수영도 못하고 구슬치기도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움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비가 그치고 해가 뜬다면 좋겠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공원 정문에서 칠팔 명의 건장한 형들이 삽과 야구몽둥이를 들고 씩씩거리며 들어섰다. 그러자 또 수위실에 있던 형들이 뛰어나왔다. 두 무리는 비빔밥처럼 섞여서 치고 박고 싸웠다. 삽날을 가로로 세워서 목을 향해 날렸지만 이번에도 자라목처럼 답삭 엎드려 피했다. 그러나 역시 중화기로 무장한 화력에 맨손으로 용감하게 대항하던 형들이 등을 보이고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결국 뿔뿔이 내빼고 말았다. 새로 온 그들은 수위실을 점거하고 수영장의 새 주인이 되었다.
다음날 수영장 입구부터 탈의실까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받고 있던 형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 같았다. 내가 여자 애들 가운데로 함부로 다이빙을 했을 때도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전의 형들과 함께 신기하게도 용호도 사라지고 말았다. 난 그 절묘한 시간의 일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꼭 용호는 그 형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생각도 들고 그게 아니면 단순히 개학이 가까우니 밀린 숙제를 하느라 공원에 더 나오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전처럼 공원의 최고수로서 가공할 깔빼기와 직사포를 날리며 무공을 자랑했고 그 해 가을을 지나 겨울방학을 거쳐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나의 위치는 변함없었다.